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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25화 (326/400)

     

   “아, 그리고 여기서 좀 더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아.”

   “확인.”

     

   MPS-05를 이용해서 저택에 연락한 나는 비행선 바닥에 엎드렸다. 그 상태로 손님용 좌석에 앉은 하늘의 어머니를 마주봤다.

     

   “일이 꼬일 거라고는 예상했으니 나한테 미안해 할 것 없어.”

   「…….」

   “오히려 나야말로 너를 위험하게 했지. 그건 정말 미안해.”

   「…사과할 것 없어. 그건 내가 택한 거니까.」

   “그 말 그대로 나도 마찬가지야.”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호박색 눈동자로 나를 잠시 주시하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해했으니 그건 넘어가고.”

   「응.」

   “이사벨의 요구, 너도 들었으니까 알 거야. 기생충을 쓸 수 없는 상태로는 쉽게 해결하기 어려워.”

     

   그녀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내 팔을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대신 이끌고 가는 건 어때?」

   “생각 안 한 건 아닌데 좋은 방법은 아니야. 이곳에서 너는 노예로 밖에 안 보이니까. 신분 자체를 위조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 의심하는 자가 나올 거야.”

   「그러면 별빛 좌표를 쓰는 건 어떨까? 공생물 포자를 심으면 콜드블러드를 옮길 수 있잖아.」

   “그건 비장의 카드니까, 최후의 수단으로 쓰고 싶어.”

   「그건…확실히 그 말이 맞네.」

     

   그녀 역시 별빛 좌표가 가진 잠재력을 알기에 바로 수긍했다.

     

   “내가 생각 중인 방법은 아예 다른 민간선에 노예들을 몰래 태우는 거야.”

   「다른 배에? 밀수꾼들이 하는 것처럼 하자는 거지?」

   “그래. 이 성계를 벗어나면 그때 노예들이 배를 점거해서 직접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게 쉬울까? 이사벨이 데리고 있던 녀석들,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던데.」

   “공생물 포자와 둥지를 이용하면 녀석들을 회복시킬 수 있어. 추가로 녀석들에게 무기까지 준다면 어렵지 않게 배를 뺏을 수 있을 거야.”

   「배 조종은 어떻게 하려고?」

   “걱정할 필요 없어. MPS-05를 같이 보낼 생각이니까.”

   “출장? 출장!”

     

   함선 장악 능력만 따지면 본체에 버금가는 MPS-05라면 배의 통제권을 어렵지 않게 뺏을 수 있다. 문제는 배를 조종하는 것보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있다.

     

   콜드블러드들을 회복시키고 무기를 쥐어 준다고 해도, 저들은 전투원이 아니다. 녀석들이 볼텍스원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이를 잘 쓰려면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을 잘못 사용해서 자해하거나 아니면 동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배를 강탈하는 과정 중에 피를 적잖게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너무 위험한 방법이야. 도착하기도 전에 못해도 절반은 죽을 걸.」

     

   하늘의 어머니도 내 생각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사벨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들이 그 아이에게 소중한 존재일 테니까.」

   “소중한 존재?”

   「응. 그 눈빛, 그 감정. 남편이 보여줬던 것들과 똑같아.」

     

   그녀는 플레이어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이 세계의 주민들과 어울리는 것을 택했다. 볼프들이 섬기는 강대한 생물, ‘대지의 아버지’와 맺어진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녀가 ‘하늘의 어머니’라고 불린 것도 그 덕분이다.

     

   비록 자식을 보는데 실패했지만, 그 대신 볼프 원주민들을 아끼고 돌봤다. 만약 뮤리엘이 볼프 원주민을 전부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나를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아마 남은 볼프들을 위해 헌신하려 했겠지.

     

   ‘이사벨도 그런 경우라는 건가.’

     

   하늘의 어머니는 이사벨을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복수를 택한 그녀와 달리 이사벨은 가족을 지키는 길을 택한 것 같지만 말이다.

     

   「내일 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있어?」

   “기회?”

   「내가 설득해 볼게. 그 애가 콜드블러드들과 함께 떠난다면 굳이 위험 부담을 질 필요가 없어. 우리도 다 같이 배에 타면 그만이니까.」

     

   그녀 말대로 이사벨이 설득된다면 다른 고민은 불필요하다.

     

   ‘설득이 된다면 말이야.’

     

   근거는 없지만 이사벨의 행동 동기는 가족을 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어머니가 뮤리엘에게 복수했을 때와 비슷한 광기와 집념이 느껴진다고 할까.

     

   물론 이 부분은 소중한 존재를 잃어 버린 경험이 없는 나이기에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26호와 아드하이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나도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거다.

     

   「그 애가 뭘 위해 이곳에 남는 지 아직 몰라. 분명 중요한 거겠지.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돕고 싶어. 가족과의 이별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말이야.」

     

   그녀는 오래된 친구가 자기가 겪은 슬픔을 똑같이 겪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한 번 더 맡겨볼까.’

     

   그녀의 제안은 이성적이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딱히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입장에서도 이 일이 잘 풀려서 이사벨의 도움을 주기적으로 받을 수 있다면 이득이다.

     

   설령 그녀의 설득이 실패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콜드블러드를 옮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면 그만이기에.

     

   “좋아. 우리 중 이사벨을 제일 잘 아는 건 너니까. 내일 제대로 얘기해 보자.”

   「믿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일은 MPS-05도 데려갈 거야. 다른 배를 강탈하는 작전을 쓸 거면 이 녀석이 필요할 테니까.”

   “필요. 필요.”

     

   이사벨에 대한 회의는 그걸로 끝났다.

     

   둘 사이에 맺어진 오래된 인연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으리라.

   -

     

     

   밤의 태양이 베르잔02를 뒤덮은 시간.

     

   이사벨은 힘든 일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왔다.

     

   낡은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발에 감은 붕대부터 풀었다. 일 때문에 온종일 감고 있었던 붕대를 풀자 굳은 피딱지 속에 재생되고 있는 발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콜드블러드는 종족 고유의 특징으로 여러 종류의 내부기관 특성을 품고 있다. 그 덕분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고, 오래 굶주려도 장기간 생존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신체 일부를 잃어버려도, 긴 시간 동안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다면 회복이 가능하다.

     

   “…….”

     

   인간에 비해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아무리 큰 위기가 닥쳤어도 그녀는 이 저주받은 몸뚱이 때문에 살아남았다. 소중한 자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회복되는 발가락에 붕대를 다시 감은 그녀는 방구석에 놓인 탁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랍에서 비석 하나를 꺼냈다.

     

   그건 트럼프 카드의 다이아몬드를 닮은 형태의 비석이었다.

     

   그녀는 탁자 아래에 뻗어 있는 전선들을 쭉 뽑아서 비석에 연결했다. 그러자 비석이 빛을 내뿜으며 허공에 떠올랐다.

     

   「늦었군.」

   비석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변조된 상태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사벨은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일이 많아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도구’의 상태는 어떻지?」

   “적합도가 65%로 상승했습니다.”

   「65%? 갑자기 왜 이렇게 느려졌지?」

   “그건 저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신체 반응을 보면 천천히 상승 중입니다.”

     

   하루가 끝날 때 비석 너머의 인물에게 ‘계획’과 관련된 사항을 보고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오늘도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계획에는 한 치의 차질도 있으면 안 된다. 이미 예상외의 변수로 인해 계획이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한 번 더 오차가 생긴다면 이탈자가 생길 터.」

   “…….”

   「우리가 너를 살린 이유는 네 ‘눈’ 때문이다. 눈이 멀었다면 더 이상 함께 할 이유가 없지.」

     

   비석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경고에 이사벨은 입을 다물었다.

     

   지배파의 랭커들에게 쫓기는 몸인 그녀가 베르잔02에 숨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연락하는 자 덕분이었다.

     

   상대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모두 그녀가 가진 능력 때문이다.

     

   「이름: 정신감응 통신석

    상태: 작동 중

    …(기타 정보 열람 가능)」

     

   22위 콜드블러드 랭커인 이사벨이 보는 세상은 남들과 달랐다.

     

   그녀가 인식하는 세상은 정보 그 자체. 타인이 보기에는 그저 허공에 떠 있는 비석으로 보이는 물건이 그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다.

     

   이름이 무엇인지, 상태는 어떤지, 용도는 무엇인지, 연락하는 대상은 누구인지 등등. 비석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

     

   ‘만상의 천안’.

     

   그녀가 받은 특전은 사물의 숨겨진 정보를 읽는 능력이다. 상대가 랭커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그녀에게 적대감을 갖고 접근한 것인지 전부 알 수 있다.

     

   다만 눈으로 직접 봐야만 정보를 볼 수 있어서 완전히 만능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가 랭커들에게 쫓기는 몸이 된 것도 그 약점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배파의 랭커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그녀와 함께 움직이던 동료들을 습격했다. 그녀만이 특전 덕분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데리고 있던 식솔이었다. 수십 명의 인원을 데리고서 은밀히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을 버린다면 무사히 숨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눈앞에서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기에.

     

   능력 덕분에 그녀는 40명에 달하는 동족들을 데리고도 상당히 오랫동안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컬트 랭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이제는 다 틀렸다고 생각한 그때, 자신을 신시아라 소개한 상대가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들의 계획을 위해 봉사하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이다.

     

   「우리는 계획 성사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중이다. 네가 빠진다면 너의 쌍둥이 언니를 되찾는 일도 재고할 수밖에 없겠지.」

     

   상대가 계약에 관한 사항을 꺼내자 이사벨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는 비석 앞에 바짝 엎드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저 비석에는 연락하는 상대의 모습을 확인하는 기능이 없지만, 상관없다. 숙소에 숨겨진 감시 장치를 통해 그녀의 행동을 전부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예상대로 그녀가 굴종의 태도를 취하자 비석 너머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뭐 좋아. ‘도구’가 계획의 루트를 이탈할 리 없으니. 굳이 괜한 짓을 할 필요는 없겠지. 상태가 어떤지만 내게 보고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 발가락이 다쳤는데 그건 왜 그런 건가?」

     

   상대의 질문에 이사벨은 멈칫했다. 그녀의 손끝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만큼 미세하게 떨렸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호텔에서 음식을 손질하다가 선인장 가시에 찔렸습니다.”

   「선인장? 약이라도 보내줄까?」

   “이미 괴사한 부위를 제거한 터라 괜찮습니다. 이 몸이라면 금방 나을 테지요.”

   「쯧, 조심 좀 하지.」

     

   그녀는 태연스럽게 거짓말했다.

     

   베르잔02에 자라는 야생 선인장은 지독한 마비독을 품고 있다. 그런 주제에 고급 술 재료로 쓰이는 터라 그녀가 말한 것 같은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그렇기에 상대도 딱히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좀 전에 했던 말, 흔들리는 것 같아서 일부러 세게 말한 거야.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괜찮습니다.”

   「그래. 우리만이 이 세계의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만 기억해. 계획도 우리 모두를 위한 거고. 알겠지?」

   “예.”

     

   그 말을 끝으로 비석의 불이 꺼졌다. 그녀는 일어나서 비석을 정리했다.

     

   “으득.”

     

   숙소의 감시 장치 때문에 분노조차 함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이를 가는 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참자.’

     

   몰래 계획한 일이 잘 풀린다면, 그녀가 걱정해야 할 요소가 하나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서아 언니랑 모프박이가 온 것은 예상외였지.’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올 것이라 생각했다. 최서아에게 받은 통신기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타이밍이 좋게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게임에서는 원수나 다름없었던 모프박이까지 함께 왔다.

     

   ‘얼마 전 있었던 궤도 폭격. 분명 놈 때문일 거야.’

     

   그녀도 개량형 뇌신들이 다른 도시를 포격하는 것을 봤다. 제국 내 가장 번영한 행성을 궤도병기가 포격하는 상황은 결코 흔하지 않다. 아마도 모프박이를 죽이기 위해 컬트들이 손을 쓴 것이리라.

     

   ‘저쪽에서는 모프박이가 죽은 줄 알고 있어.’

     

   놈은 위장 특성을 이용해 멀쩡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은 그 사실을 보고하는 대신, 침묵을 택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이득이었기에.

     

   ‘도움을 요청하면 좋겠지만 어렵겠지.’

     

   서아 언니라면 모를까, 모프박이는 절대 그녀를 돕지 않을 거다.

     

   이 세계에 온 플레이어들이 타락한 사례는 여러 번 봤다. 저 악명 높은 모프박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할 가능성은 낮다. 유전자 정수와 특전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봐야 할 터.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나 혼자 끝내야 해.’

     

   비석을 서랍에 도로 집어넣은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기다려. 이번에는 내가 반드시….’

     

   이사벨은 자신의 삶이자 목표가 된 과거의 존재, 쌍둥이 자매를 떠올리며 잠에 빠졌다.

     

     

   -

     

     

   비행선 안에서 밤을 보낸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이사벨과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움직였다.

     

   녀석이 숨겨주고 있는 콜드블러드 노예들에게 줄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다.

     

   ‘뭐가 됐든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시켜놔야 하니까.’

     

   콜드블러드는 장기간 음식과 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다. 다만 이는 말 그대로 생존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굶주린 상태에서 부상을 입는다거나 병에 걸리면 쉽게 목숨을 잃는다.

     

   내가 생각한 대로 배를 강탈하는 작전으로 가든, 아니면 전혀 다른 작전으로 가든 상관없다. 저런 몸으로는 볼텍스원의 힘을 빌려서 쓰는 것도 어려울 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저것. 여기까지 사고 다음 가게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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