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28화 (329/400)

     

   이사벨이 발꿈치를 들어 PS-111과의 거리를 한층 좁혔다. 콜드블러드 특유의 튀어나온 주둥이가 옅은 크롬빛 피부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이게 진짜 언니의 얼굴이야.”

     

   녀석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얼굴?”

   “응. 언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건 지금의 몸이 되기 전의 얼굴이야.”

   “그 말은 저와 동생님의 몸이 바뀌었다는 뜻입니까?”

   “정확히는 나도 모르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해.”

   “둘 다 실험체였다니. 중요한 정보를 습득했으니 기록하겠습니다.”

     

   PS-111의 엉뚱한 반응에 이사벨이 웃음을 흘렸다.

     

   “동생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동생님이 아니라 이사벨이라 불러줘.”

   “확인 불가. 코드명을 ‘이사벨’로 재분류하기에는 권한 부족. 죄송합니다.”

   “저런. 할 수 없지. 뭐가 묻고 싶어?”

   

   이사벨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싸웠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 절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한 태도였다.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PS-111,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이사벨. 둘 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모습이었다.

     

   나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녀석들을 멀리서 지켜봤다.

     

   의외로 이사벨은 그다지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상대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PS-111이 궁금해하는 것을 대답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시간 정도가 흐르자 PS-111 곁에 앉아 있던 이사벨이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잿빛 가면을 다시 쓰고 내게 다가왔다.

     

   “벌써 가게?”

   “응. 오늘은 바빠서 일찍 가 봐야 해.”

   “그렇군.”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줘서 고마워.”

   

   처음 만났을 때의 적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텐데 벌써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러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내 말을 들은 녀석이 웃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나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여 준 녀석은 그 직후 창고를 떠났다.

     

   “어때?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어?”

   “제가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면 동생님과 이 이상 같이 있지 못해 아쉬워 했을 겁니다.”

   “좋아서 다행이네.”

     

   이사벨이 떠난 뒤, PS-111이 내게 다가왔다.

     

   “특히 예상하지 못한 정보를 수집한 덕분에 새 목적이 생겼습니다.”

   “새 목적?”

   “예.”

     

   창고를 떠나기 위해 단말기를 만지고 있는데 옆에서 녀석이 조잘거렸다.

     

   “동생님은 제가 과거에 많은 가족들을 데리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가족? 아, 지하의 콜드블러드를 말하는 거구나.”

   “예.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개체들이지만, 저의 원본은 비합리적 판단을 내려서 구했다고 합니다.”

   “그래?”

     

   영락없이 이사벨이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었나 보다.

     

   ‘18위가 구한 걸 녀석이 이어받은 건가?’

   “동생님은 그들을 언니의 유산으로 판단, 지속적인 물질적 자원을 공급했습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녀석이 바로 의문을 해소시켜줬다.

     

   ‘그래서 어색한 모습을 보였구나.’

     

   노예들이 구세주라고 할 때마다 이사벨은 뭔가 묘한 반응을 보였다. 낯이 뜨거워서 그런 거라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진짜 구세주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

     

   PS-111의 표현대로 40명의 콜드블러드는 쌍둥이 언니가 남긴 유산이었다.

     

   ‘책임감, 그리고 부채감인가.’

     

   언니가 남긴 자들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 그들을 볼 때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나오는 부채감. 이 두 가지가 이사벨을 얽어매는 요소들이리라.

     

   “하지만 동생님은 노예이면서 비합리적 판단을 고수했습니다. 에이모프라면 전부 포식해 약점을 최소화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실제로 나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으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비합리적 판단’이 꼭 나쁜 것은 아니야.”

   “그렇습니까?”

   “네 말대로 내가 합리적인 판단만 고수했다면 내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을 거야.”

     

   26호가 씨 데몬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고민했지만 결국 먹지 않았다.

     

   돌연변이 갤러곤 아드하이를 처음 만났을 때, 먹을지 말지 고민했지만 살려 두는 것을 택했다.

     

   하늘의 어머니도 보험으로 두기 위해 목숨을 빼앗지 않았지만, 지금은 든든한 동료가 됐다.

     

   “너도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었어. 너무 위험했으니까.”

   “동의합니다. 저는 불완전 요소의 집합체였으니 제거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미래에 유용할 것이라 판단해 투자하신 겁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해.”

     

   나의 경우는 애들이 나와 함께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될 거라 판단해서 한 행동이다. 18위 랭커 페넬로페가 노예를 구한 것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거다.

     

   ‘아마 도덕적인 이유에서 내린 판단이겠지.’

     

   이 세계에서 페넬로페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쌍둥이 동생인 이사벨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을까 추측된다.

     

   비참하게 사는 노예들을 측은하게 여기고 도우려 한 것.

   

   ‘그런 걸 보면 비슷하긴 하네.’

   

   본인도 노예면서 다른 노예들을 챙기는 동생,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동족을 구하려는 언니.

   

   둘은 거울 앞에 선 것마냥 닮은 꼴이었다. 구세주 자매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하나 그렇다고 자매가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필요는 없을 터.

   

   ‘여기를 떠나면 녀석을 괴롭히는 것들은 상당 부분 사라져.’ 

   

   18위의 유산은 안전한 장소에 가서 살 것이고, 자매를 잃은 것에서 오는 괴로움은 PS-111이 어느 정도 해소시켜 줄 테니까. 마음의 상처가 남는다고 해도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비합리적 판단이 어떤 결과를 유발할지 흥미가 생깁니다. 원본이 남긴 가족들을 계속 관측하겠습니다.”

   “그래. 이곳을 떠나면 계속 볼 수 있을 거야.”

     

   비행선이 접근하면 창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도록 조정해 놓은 나는 PS-111과 함께 비행선에 올라탔다.

     

   “아니면 이사벨하고 같이 잘 얘기해 봐. 녀석이라면 너보다 잘 알 테니까.”

   “동의합니다. 동생님은 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이좋은 자매라서 잘 됐네.”

     

   PS-111이 더 업그레이드된다면 내게 큰 이익이다.

     

   또한 이사벨도 자기 언니 곁에 있는 것을 원할 터. 오늘 녀석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녀석이라면 PS-111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나와 함께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이사벨이 아군이 되면 다른 랭커의 위협도 수월히 대응할 수 있어.’

     

   여태껏 랭커들을 피해 은밀히 움직인 것은 적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사벨이 있다면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녀석이 가진 정보와 잠재성.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나와 PS-111은 기쁜 마음으로 저택에 귀환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녀석과 만나는 장소인 으슥한 골목길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이사벨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눈을 뜬 시현 유진은 순간 자신이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유물을 얻은 뒤, 그녀는 늘 바이오 캡슐에서 수면을 취했다. 그런데 지금 전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바이오 캡슐 특유의 인위적인 편안함과 거리가 멀었다.

     

   등과 허리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감싸는 매트, 가슴 부분에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 모두 바이오 캡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재 그녀는 고급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그 점을 인지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걸어 들어왔다.

     

   상대는 호텔에서 그녀의 수발을 드는 시녀였다. 유독 작은 키를 가진 콜드블러드는 넓은 방을 가로질러 침대 옆에 수건과 컵이 올라간 쟁반을 내려놓았다.

     

   “여기는?”

   “회복실입니다. 방에서 쓰러지신 것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말한 콜드블러드 시녀는 시현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야생 선인장과 여러 과일을 갈아 넣은 주스입니다. 두통을 가라앉혀 줄 겁니다.”

     

   통증을 완화시켜준다는 말을 들은 시현은 바로 주스를 들이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했는데 효과가 굉장했다. 머리 전체를 프레스기로 누르는 것 같던 통증이 싹 가셨다.

     

   “…좋군.”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주스를 함선에 보급할 수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건…더할 나위 없이 좋군. 부탁한다.”

     

   시현의 함선은 오늘 아침 베르잔02를 떠날 예정이다. 이 효과 좋은 음료가 많이 있다면, 한동안은 두통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될 거다.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없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시현이 침대에 몸을 기대서 안정을 취하는 동안, 시녀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 모습에 시현은 무심코 시녀를 불러 세웠다.

     

   “잠시 괜찮겠나?”

   “예?”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그런 것일까? 클론이 된 이후, 아니 그 이전에도 지금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본인이 불렀으면서 속으로는 크게 당황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얘기를 나누고 싶군.”

   “알겠습니다.”

     

   시녀는 시현의 부름에 따라 작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앉았다.

     

   “이름이 뭐지?”

   “이사벨이라 합니다.”

   “이사벨? 컬트식 이름이 아닌데 특이하군.”

     

   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콜드블러드 시녀, 이사벨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제가 가장 사랑하던 이들이 붙여 준 이름입니다.”

   “그런가. 좋아. 이사벨. 혹시 나를 위해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앞서 이사벨을 부른 것은 한순간의 충동 때문이었지만, 지금 것은 진심이었다. 물의 요새에 있는 동안 이사벨은 시현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완벽히 도왔다. 그래서 시현은 이 작은 콜드블러드 시녀가 꽤 마음에 들었다.

     

   “시현님을 위해서 말입니까?”

   “그래. 내게 충성을 바친다면 노예의 멍에는 없애주도록 하지. 내 아래에 있는 자들은 전원이 자유민이다.”

     

   시현의 제안에 이사벨은 침묵했다.

     

   잠시 후, 콜드블러드는 뾰족한 주둥이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은 제안을 주셨습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노예로 계속 남겠다고?”

   “제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노예의 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지요.”

   “…….”

     

   조곤조곤 말하는 이사벨. 콜드블러드와 눈을 마주한 시현은 상대가 생각보다 심지가 굳다는 것을 깨닫고 살짝 놀랐다.

     

   암살자로 오래 활동한 그녀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추 읽을 수 있었다. 이사벨의 마음은 노예라 보기 힘들 정도로 굳건했다.

     

   ‘아쉽군.’

     

   이사벨의 마음을 확인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내 제안을 이렇게 단칼에 쳐내는 자는 드문데.”

   “죄송합니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음료수는 잘 마셨다.”

     

   짧게 감사를 표한 시현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창 출발 준비를 하던 중 그녀가 사라졌으니 배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을 거다.

     

   “시현님.”

     

   막 방문을 나서려던 찰나, 이사벨이 그녀를 불렀다.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당신이 누구인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언가가 당신을 지우려 해도 지지 말고 저항하세요.”

   “…그건 콜드블러드식 격언인가?”

   “약간 다르지만 비슷합니다.”

   “그대도 자신을 잃지 않고 기억하길 바란다.”

     

   묘한 인사를 끝으로 시현은 회복실을 떠났다.

     

   이사벨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도구가 아니야.”

     

   그녀도. 나도.

     

   끝의 말은 내뱉지 않고 집어삼킨 그녀는 회복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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