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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29화 (330/400)

     

   몇 시간 뒤, 시현 유진의 배는 예정대로 베르잔02를 떠났다.

   물의 요새를 덮은 바이오 돔이 어두운 붉은색으로 물든다.

     

   이사벨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어둑한 골목길에서 호박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빛났다.

     

   ‘갑자기 왜?’

     

   어제 만났을 때만 해도 이상한 점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 일찍 돌아가긴 했지만, 녀석은 노예다. 자유행동에 제한이 있는 상태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오늘 못 나온 것도 사정이 생겨서 그런 것일 수 있으나, 왠지 안 좋은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아니다. 하늘의 어머니도, 배낭에 들어 있는 MPS-05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

     

   ‘안 되겠어.’

     

   여기서 계속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즈즈즈 즈즈즈(창고에 가 보자)]

     

   어쩌면 콜드블러드 노예들이 숨어 있는 낡은 창고에 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해당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에 도착하니 창고 입구는 다른 때와 동일하게 차단막으로 막혀 있었다. 나는 머리를 바닥에 가져다 댔다. 턱 아래의 보조기관으로 이사벨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바닥에 남은 미세한 발자국들, 단말기 근처에 묻은 지문을 보조기관으로 훑던 중, 특이한 것이 감지되었다. 몇 개의 흔적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는 그 흔적들만 최근에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즈즈 즈즈즈즈(열어 봐야겠어)]

   「뭔가 발견한 거야?」

   [즈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아마도. MPS-05를 꺼내)]

     

   하늘의 어머니는 주변을 살펴본 뒤 배낭에서 MPS-05를 끄집어냈다.

     

   “확인. 확인.”

     

   녀석은 뾰족한 금속 다리를 이용해 벽에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머리이자 몸에 달린 케이블 선을 빼서 단말기의 작은 단자에 꽂았다.

     

   “암호, 입력. 요구.”

   「암호?」

   “암호. 필요!”

     

   암호라는 말에 나와 하늘의 어머니가 동시에 서로를 쳐다 봤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페넬로페’.」

   “확인.”

     

   이 창고는 이사벨의 쌍둥이 언니가 남긴 유산을 보호하는 곳이다. 그런 장소에서 요구하는 암호라면 오직 하나뿐.

     

   MPS-05가 암호를 입력하자 예상대로 차폐막이 해제됐다.

     

   창고 내부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놓인 패드형 단말기였다.

     

   「이사벨 거야.」

     

   단말기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우리보고 봐달라는 듯이 말이다.

     

   나는 가슴쪽 작은 팔로 얇은 패드를 주웠다. 손가락이 닿자 바로 작동하며 화면에 여러 가지 정보를 띄웠다.

     

   ‘이건?’

     

   화면을 넘기며 정보를 확인한 나는 이사벨이 왜 오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도.

     

   이사벨은 더 이상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지하에 숨은 콜드블러드들도 보러 오지 않을 거다.

     

   「무슨 내용이야? 뭔데 그래?」

     

   나는 대답 대신 패드를 하늘의 어머니에게 줬다. 털로 덮인 손가락이 화면을 스칠 때마다 그녀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이사벨의 단말기에 들어 있는 데이터는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물의 요새에 존재하는 컬트 고위층 10명에 관한 인적 사항이다. 그들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갔는지, 어떤 직위를 가졌고 얼마나 세력이 강한지,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등 중요한 정보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무역선의 목록이다.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에 있어 제국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것들만 모아 놨다. 딱 봐도 콜드블러드를 피난시킬 때 쓰기 유용해 보였다. 목록 끝에는 락이 걸린 파일이 하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일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제되는 형식이었다.

     

   「이거 설마?」

   [즈(그래)]

     

   무역선 목록과 7일 동안 락이 걸린 파일.

     

   이사벨은 우리에게 콜드블러드를 맡길 생각이다. 본인은 창고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고. 하늘의 어머니와 맺은 계약은 어떻게 되냐고 묻는다면, 락이 걸린 파일이 그 열쇠다.

     

   저 파일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내게 말해주기로 한 환상을 정리해놨겠지.

     

   「그 애,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야!」

     

   하늘의 어머니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다. 당혹스러워하는 마음이 사념파에 적나라하게 묻어나왔기에.

     

   [즈 즈즈즈 즈즈즈즈(왜 그런 지 알 것 같네)]

     

   노예인 이사벨이 왜 컬트 고위층 목록을 만들었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여기 정리된 자들 중에 랭커가 있다.

     

   하나 이사벨은 누가 랭커인지는 서술하지 않았다. 그저 10명의 인적사항을 자세히 기록해 두기만 했다.

     

   누가 랭커인지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녀석은 정보를 읽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랭커를 콕 집어서 정리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즈즈즈 즈즈즈(계약을 맺었어)]

     

   하늘의 어머니와 계약한 것처럼 다른 랭커와 볼텍스원의 계약을 맺은 것이 분명했다.

     

   「콜드블러드가 아니면 계약이 불가능하잖아.」

   [즈즈즈즈즈즈 즈즈즈(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콜드블러드를 제외한 다른 종족이 볼텍스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아웃스페이서와 컬트는 설정상 볼텍스원과 매우 적대적이기 때문에 계약을 맺을 수 없다.

     

   그러니 이 경우에 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 애, 협박당한 거구나.」

     

   적이 어떤 카드를 갖고 이사벨을 압박했는지는 불명이다. 중요한 건 놈 때문에 이사벨이 불공정한 계약을 맺었다는 거다.

     

   계약 내용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으나 녀석이 남긴 데이터를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십중팔구 랭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 터. 추가로 베르잔02를 떠날 수 없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콜드블러드를 밖으로 빼내려고 했던 거야.’

     

   데이터의 양을 보면 아마 한참 전부터 이걸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을 도와줄 조력자가 없어서 시행하지 못했을 뿐.

     

   「이대로 두고 갈 수 없어.」

     

   하늘의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사벨을 손에 넣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서 놓칠 수는 없다. 정보를 수집하는데 뛰어난 조력자는 쉽게 얻기 힘들다. 랭커와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데려가야 한다.

     

   ‘어차피 계약을 맺은 이상, 무조건 싸워야겠지만.’

     

   녀석과 함께 베르잔02를 떠나려면 계약자부터 처리해야 한다.

     

   볼텍스원의 계약을 도중에 취소시키려면 계약자 전원이 같은 뜻이어야만 한다. 그러니 적이 계약을 취소하도록 만들어야 함께 행성을 빠져나갈 수 있다.

     

   ‘문제는 누가 랭커냐는 건데.’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패드의 목록을 살펴봤다.

     

   「여기 ‘키소스의 연회객 명단’이라고 적혀 있어.」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직접 언급할 수 없어서 다른 방법을 택한 거야)]

   「…이 중 누가 랭커일까?」

     

   당연한 얘기겠지만, 10명이 다 랭커는 아닐 거다. 그렇게 많은 수였다면 내가 들켰을 때 이미 끝장을 봤겠지. 적 랭커는 최소 한 명, 많아봐야 두세 명 정도일 거다.

     

   「행성총독, 감시청장…. 전부 이 행성, 아니 성계의 최고 권력자들이야.」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어렵겠군)]

     

   한 명이라도 건드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베르잔02 전체와 싸운다고 봐야 한다.

     

   [즈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수상하거나 걸리는 자 있어?)]

   「…….」

     

   눈을 가늘게 뜬 채 패드 화면을 주시하던 하늘의 어머니는 털이 덮인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는 명단의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베르잔02의 방어자’의 함장 알샤스. 이 자가 수상해.」

   [즈 즈즈즈(그래? 근거는?)]

   「이 명단에 있는 자들과 비교했을 때 지위가 애매해. 총독, 감시청장쯤이면 제국 핵심 권력자인데 제국모함 함장은 거기에 못 미쳐.」

     

   일리 있는 지적이다.

     

   제국모함 함장은 제국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지만, 이 명단에 있는 다른 멤버보다는 살짝 떨어진다.

     

   「또 근거가 하나 더 있어. 이 알샤스란 이름, 낯익지 않아?」

     

   그 말을 들으니 기억난다.

     

   광명의 거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노예상, 알카디.

   

   나는 콜드블러드 노예를 찾기 위해 놈의 머리에 기생충을 심었다. 덕분에 이사벨이 물의 요새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름 유용한 하수인이었던 그는 동생과 함께 어떤 모임에 참여했다가 갑작스레 죽었다.

     

   [즈즈즈즈 즈즈즈즈즈(알카디의 동생이로군)]

   「응.」

     

   알샤스는 이사벨이 작성한 명단에도 있고, 알카디가 죽던 날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 랭커로 의심할 만한 자였다.

     

   [즈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수상하니까 일단 체크하지)]

   「너는 의심 가는 자 없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명단 중 가장 앞에 있는 자를 골랐다. 연회의 주최자, 키소스 의원 말이다.

     

   「과연. 컬트 플레이어는 정당을 잘 운영할수록 이익을 보니까.」

     

   내가 컬트 플레이어였다면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과 친하게 지냈을 거다. 컬트나 인간 같은 지성체 종족에게는 관계, 사회망 또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게임이 아닌 현실 세계라면 더더욱 그렇고.

     

   실제로 지하에서 싸웠을 때, 적은 단기간에 여러 종류의 부대와 장비들을 동원했다. 다수의 권력자들과 연계되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자리라면 여러 분야의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키소스 의원뿐이다.

   

   두 명까지 정한 뒤 계속 목록을 살펴봤지만, 이 둘만큼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키소스와 알샤스. 이 둘이 가장 수상하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둘 중 하나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어)]

   「하나는 제국모함 함장, 다른 하나는 제국의회의 유력자. 누구부터 노리는 게 좋을까?」

     

   양쪽 다 상당히 까다로운 적들이다.

     

   누구부터 확인할지 한참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즈즈즈즈즈 즈즈(키소스부터 치자)]

     

   알샤스보다 이쪽을 먼저 치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키소스는 베르잔02의 권력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구축한 상태다. 명단의 인원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즉시 다른 이에게 알릴 가능성이 높다.

     

   ‘공격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 그렇다면 머리부터 치는 게 맞아.’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사령탑으로 기능하는 놈이다. 랭커든, 랭커가 아니든 상관없이 먼저 치는 것이 낫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이번에는 다 같이 움직일 거야)]

     

   적 랭커가 다수일 가능성이 높은 이상, 이쪽도 전원이 함께 움직여야 피해가 줄어든다.

   

   우리는 이사벨의 단말기를 챙기고 낡은 창고를 나섰다.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머리 위로 폭격을 맞고, 잘 써먹던 특성에 금제까지 걸렸지만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참았다.

   

   그런데 그 목표를 손에 넣으려던 찰나, 적들이 해 놓은 귀찮은 짓거리 때문에 실패했다.

   

   ‘아주 불쾌해.’

   

   이사벨에게 계약을 건 랭커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만약 내 손에 잡힌다면.

   

   세상에는 볼텍스원보다도 두려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리라.

   -

     

     

   “시현 유진은 떠났는가?”

   「예. 아침에 떠났습니다.」

     

   알샤스가 한 말에 키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의 집무실에서 그는 반투명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알샤스와 대화 중이었다.

     

   “쓸모가 많은 인간이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지원하신 자금이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돈 얘기가 나오자 키소스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얼마 되지 않는 비용이네. 그걸로 메가콥의 황제를 교체한다면 남는 장사지.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제국의 경쟁자에게 내분이 일어난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야.”

   「맞는 말씀이십니다.」

   “다만 괴수와의 싸움에 능한 전사를 잃은 것은 아쉽군.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니 말일세.”

   「…신전수호단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혀를 찬 키소스는 손에 쥔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달콤한 과일 향으로 포장된 독주가 입과 목구멍을 적셨다.

     

   “섭리파의 제이슨이 실종될 때 신전수호단원 다수가 함께 사라졌지. 제국 안보가 위태로운 상황에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 탓에 전사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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