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만큼은 저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거다.
개인 비행선에 오르기 직전, 허리에 매달린 곡도가 짧게 빛났다.
그건 창고를 물들이던 섬뜩한 빛과 흡사했다.
-
이사벨과 컬트 랭커를 태운 비행선이 도시의 외곽으로 날아간다.
실드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체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사실 선체 밖에 일어난 일을 고려해 본다면, 이 정도 진동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행선이 부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를 감싸는 바이오 돔 전체에 엄청난 충격이 닥쳤다.
폭발하는 화산의 분화구 한가운데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이사벨은 이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 폭발을 한 번도 체험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 결과도.
비행선의 유리창 너머, 바이오 돔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보인다.
저 돔을 구성하는 벽은 단일 벽이 아니라 여러 층이 중첩된 구조다. 그리고 벽 사이의 간격만 수십에서 수백m 사이에 이른다. 뇌신 같은 궤도병기로 포격을 가해도 돔의 벽이 관통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현재의 돔은 그야말로 반파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벽은 무너졌고, 건물들은 불에 타올랐다. 에너지 폭발로 인해 수많은 함선들이 추락하면서 도시는 완전히 지옥이 됐다.
베르잔02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도시의 이미지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친놈. 도시를 박살내려고 작정을 했구나.”
유리 너머에 비치는 참상을 보며 컬트가 중얼거렸다. 말 내용과 다르게 목소리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상대는 이 세계에서 이사벨보다 오래 살았다. 개인의 힘은 물론이고, 보유한 세력 또한 상당하다.
하지만 저 악명 높은 랭커, 에이모프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게임에서 그는 랭킹에 들기도 전에도 랭커들을 사냥하고 다녔다.
게다가 바이오 돔을 파괴한 걸 보니 게임보다도 훨씬 강해진 게 확실했다. 어쩌면 게임에 존재하지 않던 특성을 손에 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상대가 모르지 않을 터. 당장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궁금한가 보군.”
“…….”
“하긴 다른 놈도 아니고 ‘그 에이모프’인데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하겠지. 특히 14위 나부랭이가 말이야.”
“…무엇을 준비해도 그를 이기는 것은 어려울 겁니다.”
이사벨의 입장에서는 적이 에이모프에게 당하는 게 이익이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증오하는 자들을 지켜야만 한다. 과거 신시아가 그녀를 살려주면서 맺은 계약 때문이다. 그렇기에 속마음을 숨기고 순종적으로 대꾸했다.
“그렇겠지. 혼자라면 말이야.”
“혼자?”
둘이 대화하는 사이, 비행선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여긴?’
내려서 보니 아는 장소였다.
“집에서 농성할 생각입니까?”
“비슷한데 약간 달라.”
상대는 계속 이해가 될 듯 안 될 듯 아리송한 말만 해댔다.
둘은 비교적 소박해 보이는 인상의 저택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저택을 관리하는 노예가 마중을 나와야 했지만, 모두 도망갔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왔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컬트가 저택의 방문자를 반겼다.
서로 마주보고 선 두 명의 컬트.
기이하게도 둘은 마치 거울에 모습을 비추는 것처럼 똑같았다. 은색으로 빛나는 매끄러운 머리카락, 관자놀이에 솟은 야크뿔의 끝부분까지.
외형만 닮은 것이 아니다. 목소리도 녹음해서 튼 것처럼 완벽히 똑같았다.
이사벨도 쌍둥이 언니 페넬로페와 똑같이 생겼지만 저 정도로 닮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두 컬트는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동일했다.
“이사벨, 이쪽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겠지.”
“내가 가진 특전이 보일 테니까.”
그들의 말에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뮬라크럼’.
대량의 에너지를 소비해 자신과 동일한 복제품을 만드는 능력.
한때 랭킹 14위에 올랐던 자이며 현재는 제국모함 ‘베르잔02의 방어자’를 지휘하는 자, 알샤스의 고유 능력이다.
게임에서도 분신을 만드는 사이킥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알샤스의 능력은 실로 규격 외였다. 원본과 동일한 자아, 동일한 능력, 동일한 장비를 지닌 상태로 복제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알샤스와 싸운다고 한다면 다수의 랭커와 싸운다고 봐야 한다.
물론 몇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나 장점이 이를 압도하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로는 에이모프를 못 이길 텐데.’
시뮬라크럼이 강력한 특전인 것은 사실이나 에이모프를 제압하기에는 부족하다. 녀석이라면 몇 번 겨뤄본 것만으로도 알샤스의 약점을 잡아 낼 게 틀림없었으니.
“준비는?”
“모두 끝났다.”
“좋아. 우리를 안내해 줘.”
“이사벨도?”
“어차피 이사벨도 우리와 같이 싸울 거야. 그렇지?”
‘비행선을 끌고 온 알샤스’의 물음에 이사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가 결정한 일이니 문제는 없겠지.따라와.”
‘저택에 있던 알샤스’는 둘을 저택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셋이 탑승하자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쪽은 어때? 이번 계획은 저쪽이 입안한 거잖아.”
“말 안 해도 알텐데. 그 친구가 모프박이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불필요할 정도로 열의가 넘쳐서 곤란할 정도야.”
“몇십 년 전의 기억일 텐데 독하기도 하군. 겁도 많은 인간이 말이야.”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
“하긴 그런가.”
한없이 내려가던 아래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독한 냄새가 이사벨의 더듬이를 감쌌다. 그건 녹아내린 아스팔트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얼마나 고약한지 더듬이가 찌릿할 정도였다.
알샤스와 복제품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들 뒤로 따라 내린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지하 공동이었다.
“호버 버스 센터를 짓겠다는 명목으로 파둔 공간이다.”
“뭐 중간에 프로젝트가 엎어졌지만.”
“애초에 이걸 의도한 것이었으니 상관없잖아.”
“원래 계획대로라면 더 많이 팠어야 했는데.”
“상황이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지. 이 정도 규모면 문제없을 거야.”
전함 여러 척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
그 중앙에 한 구조물이 있었다.
유기물 조직이 200m 크기의 고리 형태로 뭉쳐져 있었고, 반투명한 피막이 고리 안쪽을 덮었다. 세로로 세워진 고리는 천장과 바닥에 닿았는데, 닿은 부분은 끈적끈적한 점막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그녀는 저 생체 구조물이 뭔지 잘 안다.
저것의 이름은 ‘바이오 포털’. 아웃스페이서가 주로 이용하는 이동 수단이다.
알샤스는 대량의 아웃스페이서를 끌어들여서 에이모프와 싸울 생각이었다.
-
하늘에서 금속의 비가 내린다. 녹아내린 철골, 각종 자재와 금속이 늘러 붙은 덩어리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저것들이 불과 몇 분 전까지 바이오 돔의 외벽, 또는 컬트 전함이었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까.
내가 서 있는 이곳, 물의 요새를 둘러싼 바이오 돔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모두 내가 발사한 사이킥 브레스가 만든 결과물이다.
‘타이런트로이드’가 활성화된 덕분에 에너지 출력이 평소보다 몇 배 이상 상승했다. 그 덕분에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전함하고 계시의 눈 사제단만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바이오 돔이 파괴될 줄은 몰랐다. 게임에서도 여러 번 부숴봤지만, 온전히 나의 힘만으로 파괴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즐겨 쓰던 방법은 행성 궤도에 떠 있는 제국모함을 추락시켜서 돔을 파괴하는 거였으니까.
‘예상과 다르지만 오히려 잘 됐어.’
타이런트로이드의 효과는 내가 입은 부상이 심해질수록 더 강해진다. 그러니 사이킥 브레스의 위력도 이게 끝이 아니다.
‘내 의지대로 쓰기 힘들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데.’
괴물의 촉수로 브레스를 쏘기 직전에 느꼈던 압도적인 힘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을 휘감던 활력이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재생력 특성으로 인해 몸이 회복되면서 타이런트로이드 효과가 떨어지는 거다.
「와! 세다!」
그때 뒤에서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파장이 느껴졌다. 몸을 크게 키운 26호가 쏜 파장이었다.
「큰애기 아플 텐데 세다!」
녀석이 커다란 촉수로 손상된 나의 신체를 쓰다듬었다.
현재 나는 타이런트로이드의 강화 효과로 인해 훨씬 거대화된 상태다. ‘뼈 야수’로 거대화된 것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최소 1.5배 정도 커졌다고 봐야 할 터.
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26호의 촉수들의 크기 또한 변화한 내 몸 못지않았다. ‘심해의 공포’ 효과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녀석의 덩치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설정상 씨 데몬의 크기는 20m에서 30m 사이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몸을 더 크게 부풀릴 수 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녀석은 바다의 악마라 불러도 될 정도로 위엄이 넘쳤다.
‘물론 행동은 여전하지만.’
「다친 거 안 아파?」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금방 나으니까 괜찮아)]
“급격히 향상된 신진대사로 인해 손상된 세포와 조직이 매우 빠른 속도로 복구되고 있습니다.”
내 머리갑각에 올라탄 PS-111이 말한 대로다. 슬레이어와 주포에 맞아 부서진 갑각들은 아주 빠르지는 않지만 차근차근 재생 중이다.
나는 날개 팔을 뻗어 전투 모드에 들어간 녀석을 쓰다듬었다. 거대해진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 빌딩들이 크게 흔들렸다.
적이 순식간에 소각되었기에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도 내 근처로 날아왔다.
「큰어른」「엄청」「엄청」「큰어른!」
아드하이는 변화한 내 모습과 내가 보여 준 파괴 행위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내 등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걸 보면 녀석의 기분이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타이런트로이드로 강화된 상태로 쏴서 그런가? 브레스가 거의 레드갤러곤 수준인데.」
[즈즈즈 즈즈즈(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무슨. 물의 요새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하늘의 어머니는 엉망이 된 돔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녀 역시 바이오 돔을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거다.
‘일단 요새 내부의 적은 얼추 정리가 된 것 같네.’
행성 밖에서 주둔 중인 함대가 내려오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그 전에 랭커로 추정되는 적들을 확인해야 한다.
[즈즈즈 즈즈즈즈즈(다음은 알샤스인가?)]
「아마도.」
계시의 눈 사제단의 부단장도 유력한 랭커 후보였지만, 놈은 내 브레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가기 전, ‘동생님’이 데리고 온 콜드블러드를 확인할 것을 요청 드립니다.”
‘아. 맞네.’
잊고 있었다.
노예들의 숙소가 있는 구역은 중심지로부터 거리가 멀어서 홍수에 휘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돔이 크게 무너진 지금, 녀석들이 숨은 토굴이 멀쩡할지 모르겠다.
‘그 녀석들이 죽으면 말짱 꽝이지.’
[즈즈즈 즈즈즈 즈(움직일 테니까 타)]
「응!」
26호가 몸을 대략 20m 크기로 줄인 뒤 내 위에 올라탔다. 굉장히 큰 물풍선이 등을 감싸는 느낌이라 기분이 상당히 묘했다.
「좁아」「몸」「더」「줄여」
「나쁜 인간이 나올 수도 있어서 안 돼.」
“촉수로 휘감지 않으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더 바짝 붙으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할 말은 아니지만 모양새가 좀 그러네.」
애들을 태운 나는 날개를 활짝 폈다. 타이런트로이드 효과로 움직임이 느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이 상태라 해도 개인용 비행선보다 훨씬 빠르다.
날개를 몇 번 흔들자 내 몸이 위로 떠올랐다. 나는 힘차게 날갯짓을 해 노예들이 숨은 창고로 향했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노예들의 숙소가 모여 있는 구역에 도착한 나는 땅에 조심히 착지했다.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악!”
내 모습을 본 도시의 거주민들이 아우성치며 뛰어다닌다. 그중에는 전사단원과 사제단원들도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머리가 입을 활짝 벌린 채 건물 사이로 도망치는 이들 위로 돌진했다. 그리고 수십 명에 달하는 컬트들을 흡입했다.
그렇게 소모한 에너지를 다시금 보충하는 한편, 날개 팔을 바닥에 가까이 대서 MPS-05가 내리기 쉽도록 도왔다.
[즈즈 즈즈즈 즈즈(가서 그들을 도와)]
“확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