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상황 발생시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속 다리를 가진 여자의 머리는 금세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니 스크리머와 동기화된 PS-111이 MPS-05의 상황을 전달해 줄 거다.
‘이건 됐고.’
노예에 대한 부분은 MPS-05에게 맡기기로 하고, 나는 다시 알샤스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수라장이 된 거리를 가로질러 도시의 외곽에 가까워지자 오래된 저택이 눈에 보였다. 또한 저택 앞에 서 있는 자들의 모습도.
나는 속도를 줄인 뒤, 저택 앞에 깔린 정원 위에 내려앉았다. 착지한 충격 때문에 대지가 크게 흔들렸지만, 상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둘 중 한 명은 나와 아는 사이이기에 그럴 수 있다. 작은 키의 콜드블러드 랭커, 이사벨이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한 명이다.
매끄러운 은발을 지녔고, 관자놀이에 야크뿔이 난 여성 컬트. 사진으로 봤기에 저 여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봤다.
제국모함 함장 알샤스.
베르잔02의 컬트 랭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레 같은 놈. 죽은 줄 알았더니 잘도 숨어 있었군.”
컬트 랭커 알샤스는 땅에 내려앉은 나를 보고 혀를 찼다.
나는 대꾸하는 대신 나를 위협할 요소가 있는지 살폈다.
‘만약 다른 랭커나 지원군이 있으면 골치 아파.’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꿈틀거리며 공기 중에 떠다니는 정보를 수집했다.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고.’
그뿐만 아니라 근처 어디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은폐 기술을 사용해서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 방심할 수는 없다. 아니면 초장거리에서 뇌신을 발동, 나를 포격할 수도 있고.
‘게다가 저 저택, 뭔가 이상해.’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낡고 작은 저택인데 뭔가 묘하다.
열린 문과 창문을 통해 들리는 희미한 바람 소리, 그리고 그 안에 섞여 있는 미세한 흙냄새. 정상적으로 지어진 저택이라면 있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조심해야겠어.’
나나 저쪽이나 둘 다 랭커인 상황. 내가 비장의 수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적도 마찬가지다.
빠르게 환경을 점검한 나는 적의 복장도 살폈다.
전에 만난 제이슨과 마찬가지로 알샤스는 블랙 갤러곤의 시체로 만든 용살자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아는 일반적인 구성과는 약간 달랐다.
용살자 세트는 에너지 블레이드 형태의 무기인 정화(淨化), 토마호크 비슷하게 생긴 ‘단죄’, 그리고 갤러곤의 비늘로 만든 강화복으로 구성된다. 알샤스는 그 중 단죄만 두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정화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화복의 외형도 내가 아는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녀가 입은 갑주는 남성용으로 제작된 물건이다.
‘다른 랭커한테 받은 건가?’
어쩌면 파벌의 동료에게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것 말고 녀석에게는 특별한 점이 없어.’
사실 그게 문제다.
지금 이 상황은 내게 지나치게 유리하다.
지하에서 컬트들과 싸울 때 나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최대한 힘을 숨겼다. 심지어 죽은 걸로 위장하기까지 했다.
제국모함 함장인 알샤스라면 토벌대의 작전에 깊게 관여했을터. 그러니 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 거다. 더이상 몸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공격을 개시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비상식적이다.
‘혹시 이사벨을 믿는 건가?’
나는 알샤스 옆에 서 있는 작은 콜드블러드에 시선을 뒀다.
녀석이 배신할 리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나와 애들이 어떻게든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니까.
‘계약 때문에 여기 있는 거야.’
녀석이 불공정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아미 안다. ‘랭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계약이 걸렸다는 것도.
‘이걸 기대했던 건 아니지만….’
이사벨과 적 랭커, 두 명을 상대로 싸우게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계약과 관계된 자부터 먼저 제거해야 해.’
물론 그런다고 계약 자체가 무효화되지는 않을 거다. 볼텍스원을 죽여서 계약을 파기시키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이후에 처리해도 되는 문제다. 당장 보호 대상을 이사벨 앞에서 치우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그녀가 지금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의외인건 그걸 알고도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데.’
어쩌면 나와 이사벨 간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저런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게임에서는 모든 랭커가 나를 싫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알샤스 입장에서 보면 이사벨이 나를 적대할 것이라 믿는 게 당연하다.
솔직히 알샤스 역시 빈말로라도 좋은 동료라 말하기 힘들었지만, 모든 것을 유전자 정수로 보는 나보다는 나은 상대일 거다. 실제로 내가 PS-111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 이사벨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는가.
“모프박이와 펫이라니. 믿을 수 없는 조합이군. 갑자기 없던 인간성이라도 생기셨나?”
비꼬는 말투로 나를 조롱하는 알샤스. 나의 전력을 계산 중인지 눈이 계속 움직인다.
‘이제는 내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알 텐데.’
내 등에 올라탄 씨 데몬과 레드 갤러곤, 그리고 나와 함께 날아온 그리폰 볼프. PS-111을 제외한다고 쳐도 이쪽 전력은 레이드 보스급 생물 둘과 랭커 둘이다.
하지만 알샤스의 모습에서는 긴장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나와 아는 사이인 이사벨조차 내가 나타나자 움찔거렸는데도 말이다.
‘뭔가 숨겨둔 카드가 있는 것 같은데….’
이 이상의 분석은 무의미하다. 직접 공격해 보면 확실해질 터.
“펫을 데리고 있다면 대화도 가능….”
놈의 말이 끝나기 전, 나는 침식 촉수를 꺼내 놈을 후려쳤다. 놈은 말하던 도중에 내가 공격할 줄은 몰랐는지, 다급히 들고 있던 도끼를 들었다.
두 자루의 단죄가 엑스자로 교차한 상태로 앞서 날아온 촉수의 부속지들과 맞부딪쳤다. 양자 간에 덩치 차이가 워낙 심하다 보니 알샤스는 부딪친 충격 때문에 공중에 떠 버렸다.
자세가 무너진 채 날아가는 그녀에게 다른 침식 촉수가 빠르게 접근한다. 촉수 끝에 달린 날카로운 부속지가 그녀의 발목 끝을 살짝 벴다.
“뭣?!”
알샤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몸이 갑자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긴 것이리라.
‘좋아.’
놈의 발목을 벨 때, 나는 그동안 철저히 숨겨놨던 유일 특성을 활성화시켰다. 접촉한 적을 석영 조각상으로 만드는 특성, ‘메두사 기관’ 말이다.
무릎 아래까지 빠르게 결정화된 그녀가 뒤편에 있는 정원 위에 처박혔다. 나는 남은 촉수들도 전부 꺼내 그녀를 공격했다.
“…….”
그녀는 몸의 절반 이상이 돌덩어리가 된 탓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 좌측의 머리가 아가리를 벌려 그녀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끝났군.’
긴 목을 통과한 놈의 시체가 소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랭커를 잡아먹었으니 특전이든 특성이든 뭐라도 하나 뜰 거다. 나는 곧 나타날 텍스트박스를 기다렸다.
‘응?’
하지만 기다려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이사벨을 쳐다 봤다. 녀석의 표정은 알샤스 곁에 서 있었을 때와 동일했다. 지금걸로 숨통이 트였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새끼,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그때 저택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택 입구에서 목소리의 주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 죽었어?’
저택에서 걸어 나온 존재는 방금 내가 잡아먹은 알샤스였다. 얼굴과 목소리부터 시작해 입고 있는 장비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역시 여제의 말이 맞았어. 네놈은 대화가 안 되는군.”
방금 있었던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녀석은 도끼 자루로 이마를 긁적였다.
‘뭐지? 조율자는 착용하지 않았으니까 아니야.’
사용자에게 위기시 순간이동 능력을 부여하는 ‘조율자’라면 내게 벗어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아닐 거다. 머리에 아무것도 안 쓰고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무엇보다 놈의 시체는 내 뱃속에서 전부 소화되었다. 도중에 사라지거나 그런 징조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내 앞에 나타난 알샤스, 내가 잡아먹은 놈과 외형만 똑같을 뿐 다른 존재다.
‘복제인간이라 보기도 이상한데.’
방금 깨어난 클론이라 보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다. 몸은 그렇다 쳐도 남성용 강화복, 단죄 두 자루까지 복제된 것은 설명이 안 된다.
게임에서도 분신을 만드는 사이킥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로 자연스럽지는 않다. 내가 모르는 기술일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나와 싸웠던 컬트 랭커들도 사용했을 거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녀석의 특전.’
여태껏 싸웠던 랭커들은 하나 같이 게임에서 존재하지 않는 특전들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추측컨대 알샤스가 가진 특전은 지금처럼 자신과 동일한 복제물을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추측이 사실이라면 저놈도….’
내 앞에서 태연한 태도로 지껄이는 저놈도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복제물을 만든 원본은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터.
‘성가시게 됐는걸.’
나의 악명을 아는 놈치고는 당당하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이야.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네 특전인가 보군.”
내가 로베츠의 목소리로 말하자 알샤스는 코웃음을 쳤다.
“하, 지금까지 꾹 다물고 있어서 벙어리인 줄 알았네.”
똑같은 분신을 만드는 힘이라. 상당히 탐나는 능력이다. 놈이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원본을 찾기 전, 복제물의 능력부터 더 확인해야겠어.’
“방금 그 공격은 예상 밖이었어. 아, 정확히 말하면 예상은 했는데 훨씬 빨랐다고 해야 하나.”
내가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알샤스가 나를 품평했다. 그건 자신이 위기에 빠질 리 없다고 확신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였다.
‘근육의 움직임, 심장 소리, 그리고 갑주의 상태까지. 완전히 동일해.’
“모프박이 넌 지금 이게 궁금할 거야. 나와 이사벨이 협력한다고 해서 너를 이길 수 없을 텐데 무슨 자신감인가 싶겠지.”
그렇게 말한 놈은 이사벨에게 손짓했다.
찰나의 순간, 이사벨과 눈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많은 감정들이 들어 있었다. 미안함과 원망, 그리고 걱정까지.
여러 감정을 내게 전달한 녀석은 곧이어 시선을 돌리고 알샤스 뒤에 가서 섰다.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인지 알아? 서로 협력해서 난관을 극복하기 때문이지.”
그녀의 말과 함께 지표면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보조기관이 저릿할 정도로 막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지하에서 무언가가 지상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여제님.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낡은 저택이 폭발했다.
[즈즈 즈즈즈(모두 조심해)]
나는 날개를 활짝 펼쳐서 재빨리 고도를 높였다. 찰나의 순간, 약 3m에 달하는 말뚝 수십 개가 날아와 날개의 피막을 꿰뚫었다.
「큰애기야! 괜찮아?」
부상으로 인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게 말뚝을 날린 존재가 땅에서 기어 나온다. 어쩌면 기어 나온다는 말보다는 땅을 들어내며 나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땅속에서 올라온 존재의 크기는 30m를 가볍게 넘겼다. 장수풍뎅이를 닮았지만 등에 다수의 생체대포를 장착한 거대 괴수. 무너진 저택의 잔해는 놈이 튀어나온 구멍 안으로 떨어졌다.
「큰어른」「적」「조심해」
“생명 반응 다수 감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발아래에 있는 구역, 그리고 도시 전체에서 비슷하게 생긴 생물들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에이모프, 저거 설마….」
[즈(그래)]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괴수들을 보며 내 곁에서 비행 중인 하늘의 어머니가 경악한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컬트의 영토에서 놈들을 볼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나와 그녀의 생각에 쐐기를 박는 존재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