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이 있던 자리에 생긴 구덩이에서 수백 개의 눈을 가진 거대생물이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감지기관을 지닌 그 존재는 알샤스와 이사벨을 몸 위에 태운 뒤 공중으로 떠올랐다.
“베르잔02를 날리는 것은 정말 아쉽지만, 여제가 강력히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서 ■■하셨■. 친구■ ■■ ‘■■■’를 죽이■고 명하■■다.」
“알아. 알고 있어. 그럼 시작하자고.”
알샤스의 말이 끝나자 구덩이에서 놈들이 나타났다.
크기 5m에 말벌과 뱀, 전갈을 뒤섞은 것처럼 생긴 괴물 수천 마리가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무너진 돔의 하늘이 순식간에 시끄러운 날갯짓 소리로 가득찼다.
비행 괴물들이 나를 포위하는 동안, 지상에 있는 30m의 거대괴수들도 생체대포의 끝을 내게 겨눈다.
저 괴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개인이라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다수.
이 우주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온 존재.
알샤스가 불러낸 아웃스페이서 무리가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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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보석 베르잔02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아우르 성계의 감시청.
감시청은 성계 전체의 안전을 총괄하는 기구. 그렇다 보니 한산한 때없이 늘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난데없이 날아든 급보로 인해 감시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베, 베르잔02 곳곳에 바, 바이오 포털 흔적 확인!”
“아웃스페이서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물의 요새와 연락 두절!”
“구, 구조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감시청에 있는 모든 상황실이 날아오는 보고로 인해 정신이 없었다. 상황실 내부는 컬트들이 띄운 사이킥 이미지로 꽉 차서 상대의 얼굴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상황실에서 부하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감시청장은 지금 이 사태가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제국 내 요직을 두루 거친 그였지만 이만큼 심각한 사태를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웃스페이서의 베르잔02 침공.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대참사였다.
“감시청장님! 어떻게 합니까?”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
지식관리자들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감시청장은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현재 제국의회에서는 섭리파와 혁신파가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혁신파를 지지하는 그가 여기서 대처를 잘못한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머, 먼저 총독 각하의 안전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고개를 돌린 그의 앞에 얼마 전에 만났던 은발의 여성 컬트가 보였다.
“알샤스 함장?”
상황실에 모습을 드러낸 상대는 제국모함 ‘베르잔02의 방어자’의 함장 알샤스였다.
“물의 요새에 참상이 닥치기 직전, 간신히 빠져나왔습니다.”
“총독 각하는? 아니 그보다 키소스 어르신은 무사하신가?”
“죄송합니다. 그분들은 섭리가 직접 거두셨습니다.”
“이럴 수가!”
비보를 전해 들은 감시청장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혁신파의 영수 키소스는 감시청장의 정치적 스승이다. 그런 존재가 섭리 곁으로 떠났다고 하니 크게 흔들릴 수밖에.
“감시청장,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베르잔02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렇군! 빨리 함대부터 소집해야…!”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은 감시청장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알샤스가 그의 곁에 몸을 가까이 붙였다.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뭐…?”
갑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
당황한 그가 알샤스를 밀어 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동시에 눈앞에 보이는 상황실 내부의 풍경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바삐 돌아다니는 컬트들은 갑자기 닥친 어둠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본 감시청장은 깨달았다.
알샤스가 자신에게 정신을 지배하는 기술인 ‘울트라 컨트롤’을 걸었다는 것을.
‘도대체 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의 의문을 풀어 줄 자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역시 허를 찌르니까 잘 걸리네.”
살아 있는 꼭두각시가 된 감시청장을 본 알샤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울트라 컨트롤은 강력한 사이킥 파워를 가진 자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감시청장이 혼란에 빠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정예함대를 투입해 볼까.’
“감시청 소속 정예함대의 출격을 준비하라. 물의 요새에 있는 적들을 타격하겠다.”
“알겠습니다!”
알샤스는 감시청장의 입을 빌어 지식관리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모프박이. 넌 이제 끝이다.’
4위 랭커 여제의 군단에 더불어 감시청 소속 정예함대와 제국모함들까지.
이 자리에 1위가 있다고 해도 절대 이기지 못하리라.
승리를 확신한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유전자 정수’를 자원으로 사용하는 종족은 둘 뿐이다.
유전자 정수를 흡수해 군체 단위로 성장하는 아웃스페이서, 정수를 포식하고 자신을 끝없이 진화시키는 에이모프.
전자는 고전 전략시뮬레이션의 괴물 종족 ‘저X’를 모티브로 하고, 후자는 고전 크리쳐 영화의 우주괴물 ‘에X리X’을 모티브로 한다.
사실 모티브만 따져 보면 둘 다 유명한 SF소설의 곤충형 외계종족에서 갈라져 나온 거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게임 속에서 두 종족을 보고 비슷하다고 느끼는 자는 많지 않다. 유전자 정수로 만든 특성도 다르고, 플레이 방식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홀로 싸우고 진화하는 에이모프와 다르게 아웃스페이서는 개체가 아닌 군단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군체의 구성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디자인하는지에 따라 군단의 강함이 판가름 난다.
가령 전투에 직접 나서는 개체는 생존력이 좀 떨어져도 상대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도록 진화시킨다. 지휘를 맡은 개체는 전투는 젬병이지만 동족들을 잘 지원하는 방향으로 특화시키고.
지금 내게 날아드는 말벌과 비슷하게 생긴 비행 괴물들, ‘수집벌레’들도 마찬가지다. 놈들의 역할은 여왕의 명을 받아 정수를 수집하는 것. 전장을 빠르게 돌아다니며 적의 목숨을 빼앗고 그 정수를 취하는데 특화되어 있다.
「스스스스스」
「스스스스」
수많은 수집벌레들이 내 몸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입 안에서 아주 강력한 위산을 내뿜으며 내 갑각을 녹이기 시작했다.
설정상 아웃스페이서는 사이킥 파워를 사용할 수 없다. 여왕이나 근위대 정도 되면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진화시켰겠지만 수집벌레들까지 그렇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신체 부분에서 진화시키는 것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집벌레들의 위산 공격 때문에 내 갑각에 구멍이 생기고 있다. 플라즈마 무기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 갑각이 말이다.
‘메탈릭 그렘린의 유전자랑 산성액을 토하는 생물의 유전자를 섞었어.’
위력만 보면 내가 발사하는 산성 브레스보다 훨씬 약하다. 하지만 위산을 토해내는 개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지.’
나는 수백 마리의 수집벌레들을 몸에 매단 채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 충격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저리 가!」
「스스?!」
내 몸에서 떨어진 수집벌레들을 향해 26호의 촉수가 날아든다. 밤송이의 가시처럼 끝이 뾰족해진 촉수들이 수집벌레들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가 목숨을 잃었지만 남은 수는 그보다 훨씬 많다. 새로 나타난 벌레들이 죽은 동료들의 자리를 채웠다.
놈들은 나보다 26호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녀석의 촉수를 공격했다.
「앗 따가!」
[즈즈 즈즈(몸을 줄여)]
레이드 보스급 강함을 지닌 씨 데몬은 방어력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저놈들은 26호보다 높은 방어력을 지닌 내 갑각도 녹인다. 녀석이 버티기 쉽지 않다.
게다가 놈들은 자아가 없는 생체 기계 같은 존재이기에 ‘심해의 공포’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녀석이 몸을 크게 키울 이유가 없다.
내 말을 들은 녀석이 몸을 10m로 줄였다. 그 사이에 나는 침식 촉수로 녀석 주변에 달라붙는 수집벌레들을 후려쳤다. 어떤 개체는 내 촉수에게 먹혔고, 어떤 개체는 ‘메두사 기관’ 때문에 석영 덩어리가 됐다.
「날파리」「많아」
「날파리라기보다는 말벌에 가깝지만!」
“말벌. 지구산 육식 곤충 ‘악마벌’의 선조로 추정. 400년 전 발견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아드하이, 하늘의 어머니, PS-111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적들을 줄이고 있다.
아드하이는 ‘레드아머’로 강화된 날개를 쌍검처럼 사용해서 수집벌레들을 베어 넘겼다. 운좋게 공격을 피한 놈들은 아드하이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레드아머가 활성화되지 않은 뒷다리나 꼬리를 노리려는 거다.
놈들이 날카로운 이빨이 돋은 입을 크게 벌리고 위산을 쏘려는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마노(瑪瑙)색 입자들이 놈들을 감쌌다. 입자에 닿은 적들은 압착기에 들어간 캔마냥 허공에서 찌그러졌다.
놈들 뒤에는 마노빛 날개를 활짝 핀 하늘의 어머니가 있었다. 아드하이를 위기에서 구출한 그녀는 적들을 반대편으로 유인했다.
「스스스스」
「스스」
수백 마리의 비행 괴물들이 날아다니는 그리폰과 거리를 유지하며 위산을 쏴댄다.
아무리 랭커라 해도 전 방위에서 날아드는 산성액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 위산에 맞은 황금색 털이 검게 그을렸다.
위기에 빠진 그녀를 도운 것은 내 머리 위에 타 있는 PS-111이었다. 녀석은 갤러곤의 발톱검이 이식된 갈고리 발톱을 휘둘러 검풍을 날리는 한편, 긴 꼬리 끝의 총구로 물질분해탄을 발사했다.
아웃스페이서는 사이킥 파워를 사용할 수 없는 대신 모든 개체가 사이킥 파워에 대한 일정 수준의 내성을 갖고 있다. 그렇다 보니 검풍만으로는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다.
물론 녀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효과가 떨어지는 몸통 대신 얇은 날개 부분을 노렸다.
말벌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수집벌레는 날개가 한쪽이라도 손상되면 움직임이 극히 둔해진다. 느려진 적은 나나 26호가 처리했다.
커다란 나의 촉수와 녀석의 분홍색 촉수가 하늘이라는 무도회 위에서 춤을 춘다. 때로는 침식 촉수의 부속지가 벌레들을 양단했고, 때로는 분홍색 톱날 촉수가 적들을 붙잡아 으스러트렸다.
‘호흡 자체는 잘 맞지만….’
우리는 매초마다 수십 마리씩 죽이고 있다. 그런데도 적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저 구덩이.’
나는 알샤스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생긴 구덩이를 노려봤다. 지금도 저곳에서 벌레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필시 저 아래에 놈들을 불러내는 바이오 포털이 있을 터.
‘포털을 깨부수거나 아니면….’
알샤스와 이사벨을 태운 채 날아다니는 저 괴물. 아까부터 저놈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처음 보는 디자인이긴 한데.’
놈의 몸은 작고 얇은 촉수들에 휘감긴 상태였다. 수많은 촉수들 끝에는 눈이 달려 있었다. 실제로 감각 기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지, 각각의 눈들은 쉬지 않고 깜빡이며 움직였다.
게임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의 개체다. 어떤 유전자 정수를 적용한 건지, 어떤 능력을 갖춘 건지는 불명이다.
탐지 기관이 발달되었다는 점, 후방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 개체가 여왕일 가능성이 높다.
잠깐 놈을 살피고 있는데, 지상에서 3m짜리 말뚝들이 내게 날아왔다.
저택을 박살내며 등장한 30m짜리 거대 괴수, ‘말뚝벌레’들이 나를 향해 부지런히 포격 중이다.
말뚝벌레는 군단 내에서 에너지를 활용하는 몇 안 되는 개체 중 하나다. 다만 내가 하는 것처럼 그 에너지를 직접 토해내지는 않는다.
대신 체내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쉬지 않고 순환시킨다. 거기서 발생한 힘을 이용해 몸 밖으로 ‘바이오 파일’이라 부르는 생체 탄환을 발사한다. 그런 점을 보면 총기의 발사 원리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문제는 저 생체 말뚝의 관통력이 굉장히 높다는 것. 중장갑을 두른 적이나 전함을 상대할 때 유용하다.
다시 말해 중장갑을 두르고 날아다니는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성가신 적이라는 뜻이다.
‘안되겠다.’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개체들이 바이오 포털을 타고 넘어올 거다. 여왕을 제거하든, 바이오 포털을 부수든 뭐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내게는 유기물로 구성된 적을 상대하는데 최적인 무기가 하나 있다.
‘심연의 색채를 써야겠어.’
종족 전체가 생체병기나 다름없는 아웃스페이서. 놈들에게 이보다 치명적인 무기는 없으리라.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모두 지상에 가서 저놈들을 맡아줘)]
「너는?」
[즈 즈즈즈즈즈즈 즈즈즈즈즈즈(난 수집벌레들을 쓸어버릴 거야)]
주변에 수집벌레들이 워낙 많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우리 편이 말려들 수도 있다. 나 혼자라면 걱정이 없으니 애들을 전부 지상으로 보내기로 했다.
「좋아. 가는 김에 콜드블러드들이 괜찮은지 봐볼게.」
「큰어른」「조심해」
둘이 떠난 직후, 나는 심연의 색채를 활성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