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35화 (336/400)

   녹색, 보라색, 그외 수많은 물감이 서로 뒤엉킨 채 검은색 갑각을 물들인다. 혼돈 그 자체를 표현한 것 같은 불경한 색깔이 스멀스멀 내 머리로 기어온다.

     

   「스스스스!」

   「스스스!」

     

   수집벌레들이 불길한 빛을 내뿜는 나를 보고 다급히 물러난다. 언제나 그렇지만 저 탐욕스러운 ‘색’들은 적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에이모프를 닮은 포식의 빛이 괴물의 촉수를 휘감는다. 모인 에너지의 양은 ‘타이런트로이드’로 강화됐을 때보다 많이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심연의 색채로 강화된 사이킥 브레스는 그 무엇보다도 위협적이기에.

     

   물방울이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듯, 세 갈래로 나눠져 뻗은 머리들 끝에 모인 에너지가 구체 형태로 구현된다.

     

   내 덩치가 덩치다 보니 심연의 색채로 강화된 사이킥 구체도 그 크기가 상당했다. 등에 탄 26호도 타이밍에 맞춰 구체의 움직임을 조종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강화 사이킥 브레스. 비눗방울이 물체에 맞아 터지는 것처럼 수집벌레들 위에서 폭발했다.

     

   다른 때와 같이 강렬한 폭음 따위는 없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거품은 아주, 아주 조용히 벌레 무리를 빨아들였다. 벌레 하나가 도망치면 더 많은 죽음이 찾아올 뿐이었다.

     

   ‘좋아. 이걸로 끝낼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눈으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강화 사이킥 브레스의 거품에 닿은 벌레들이 푸르게 물들더니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벌레 무리 중 일부가 사라지면서 생긴 틈으로 여왕의 모습이 보인다. 놈의 수많은 눈들에는 푸른빛 잔상이 남아 있었다.

     

   여왕 위에 올라탄 알샤스는 입꼬리를 올린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방금 그거, 워프보이의 능력이었어.’

     

   설정상 아웃스페이서는 다른 우주에서 건너온 존재다. 그래서 초광속 항해 방법도 다른 종족들과 다르다.

     

   아웃스페이서가 이동하려면 무조건 바이오 포털이 있어야 한다. 놈들이 아무리 메탈릭 그렘린을 잡아먹어도 워프보이의 순간 이동 능력, ‘워프가이드’를 뺏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플레이어 특전.

     

   게임 속과 달리 아무런 제약 없이 군단을 강화시킬 수 있거나, 내가 모르는 모종의 방법을 통해 초광속 항해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이리라.

     

   ‘…다행인 것은 원본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거야.’

     

   만약 놈들이 워프보이처럼 별다른 페널티를 받지 않고 초광속 항해가 가능했다면, 굳이 바이오 포털로 병력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냥 여왕들 다수를 대동해서 군단 전체를 데려오면 되니까.

     

   알샤스와 함께 있는 저 여왕이 이동에 특화된 개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군단 전체의 초광속 항해에 제한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지금은 놈부터 먼저 처리해야 해.’

     

   원래는 구덩이의 바이오 포털을 파괴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포털보다 저 여왕이 더 위험하다. 놈이 가진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심연의 색채를 해제하고 일반 상태의 사이킥 브레스를 준비했다. 브레스로 앞에 있는 적을 정리한 뒤, 단숨에 여왕에게 접근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순간, 바이오 돔 밖에서 강렬한 에너지 반응이 느껴졌다. 여태껏 두 번 맞아봐서 익숙한 신의 번개, 뇌신이다.

     

   황금색 열선이 돔의 외벽을 꿰뚫은 뒤 내 날개를 강타했다. 그 탓에 몸이 쏠리면서 사이킥 브레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보라색의 숨결은 물의 요새에 아직 남아 있는 돔에 새로운 구멍을 만들고 사라졌다.

     

   나는 중앙의 머리를 들어 위를 확인했다.

     

   뻥 뚫린 구멍 너머에는 달갑지 않은 적들이 있었다.

     

   붉은색 하늘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배들. 베르잔02에 잠입하기 전에 봤던 감시청의 정예함대들이었다. 그 중간에는 뇌신과 제국모함들도 끼어 있었다.

     

   ‘알샤스!’

     

   놈은 단순히 여왕 위에 타서 구경만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복제물을 이용해 행성 밖의 감시청과 연락을 취한 것이리라.

     

   “MPS-05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지상에도 적이 너무 많습니다.”

   「저기 큰애기 괴롭힌 나쁜 파닥파닥이 있어.」

     

   앞과 아래에는 아웃스페이서, 위에는 감시청의 정예함대라니.

     

   성체가 된 이후 처음 겪는 위기다.

     

   ‘어떻게 돌파하지?’

     

   제국모함이 있긴 하나 코스믹 볼트는 충전 시간이 있어서 바로 쓸 수 없다. 그밖에 다른 공격들은 내 갑각으로 버틸 수 있다.

     

   ‘아웃스페이서와 컬트들이 싸우도록 유도할까?’

     

   일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부정했다.

     

   알샤스와 아웃스페이서 여왕은 바보가 아니다. 여기서 내가 교란을 시도한다고 해도 넘어갈 확률은 낮다.

     

   ‘뼈 야수로 거대화해서 싸울까? 아니면 사냥의 표상을 지금 써야 하나?’

     

   둘 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전황을 뒤바꾸기에는 결정력이 부족하다. 적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나 혼자서 잡아 죽이는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적들은 오합지졸이 아니다. 나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대응하려들 거다.

     

   ‘그걸 막으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해.’

     

   심연의 색채를 본 수집벌레들이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물러났던 것처럼.

     

   압도적인 공포가 필요하다.

     

   ‘뭐가 있을…잠깐.’

     

   고민하던 내 머리에 어떤 특성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해적들의 요새에서 획득한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특성이.

     

   ‘검은 탐식자 대포!’

     

   나는 다시금 달려드는 수집벌레들과 맞서면서 텍스트박스를 띄웠다.

     

   「검은 탐식자 대포: 무한한 힘이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 체내에 저장할 수 있는 총 에너지의 50%를 소모해 포탄을 쏩니다.

   *추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검은 탐식자 대포는 해적들이 점거한 우주요새에서 탈출한 뒤 만든 유일 특성이다. 내 왼쪽 꼬리에 달린 생체 대포는 이 특성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초월 시스템을 활용해 만든 유일 특성 중 이 특성의 튤팁이 제일 간단했다. 에너지를 소모해서 포탄을 쏜다는 것이 끝이었으니까. 주의사항 또한 몸에 저장할 수 있는 최대 에너지 중 50%를 소모한다는 것 말고는 딱히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괜찮아 보이지만….’

   

   특성을 보면서 방심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든 이유는 맨 아래에 있는 추신 때문이다.

     

   게임과 이 세계에서 수많은 특성들을 봤지만, 그 중 조심하길 바란다는 말만 적혀 있는 특성은 한 번도 못 봤다.

     

   ‘전에 기가크래커를 상대로 쓸까 하다가 말았는데.’

     

   기가크래커를 뺏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해서 실험은 관뒀다. 그 이후 사용할 기회가 없어서 계속 잊고 있었다.

     

   ‘마침 잘됐어.’

     

   나는 날아든 수집벌레를 잡아 뜯으면서 바이오 돔 밖으로 날아갔다. 알샤스와 이사벨을 태운 여왕을 비롯해 비행 괴물 무리가 내 뒤에 따라붙었다.

     

   밖에 나오니 다수의 군함들이 나를 반겨 줬다. 뇌신이 가동하고, 전함들의 주포가 불을 뿜는다.

     

   밤의 태양이 뜬 붉은색 하늘이 황금색과 보라색으로 물든다. 그에 맞서 나는 내가 가진 최고의 방패를 꺼냈다.

     

   전신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아지랑이가 납작한 쟁반 형태로 뭉친다. 투명한 쟁반으로 완성된 그것이 프리즘처럼 자연의 빛을 굴절, 분산시킨다.

     

   에너지를 반사할 수 있는 유일 특성 ‘복잡화 분광체’다.

     

   하늘을 가득 채운 에너지 열선들이 완성된 복잡화 분광체와 충돌한다.

     

   그중 어느 하나도 투명한 쟁반을 뚫지 못했다. 나를 죽이기 위해 날아온 빛들은 모두 자신이 나왔던 장소를 향해 되돌아갔다. 에너지와 정예함대의 함선들이 충돌하고 하늘이 환하게 빛났다.

     

   “지금 공격으로 컬트 정예함대의 전력 중 1%에서 3%가량이 손실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머리 위에 있는 PS-111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려하게 터져 나가는 것치고 피해가 적다. 알샤스가 대응하도록 시켰겠지. 

     

   ‘상관없어.’

     

   진짜 공격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한 차례의 포화를 막아 낸 나는 곧바로 정예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아웃스페이서 무리는 목표를 바꿔 정예함대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함대 진영이 흐트러진 지금, 나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거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 실수다.

     

   컬트와 아웃스페이서. 게임에서는 서로 원수 관계인 족속들이 한곳에 모였다.

     

   나는 왼쪽 꼬리를 움직여 목표를 향해 조준했다. 대포의 포구(砲口)가 적을 겨냥하는 상태로 미지의 특성 검은 탐식자 대포를 사용했다.

     

   특성이 활성화된 순간, 극심한 탈력감이 나를 덮쳤다. 아성체 시절, 사이킥 브레스를 처음 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머리가 멍해진 다음 이어지는 것은 에너지의 급류였다. 막대한 에너지가 왼쪽 꼬리로 모여들었다. 마치 전신에 퍼져 있던 모든 피가 한 군데에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탓에 하마터면 날갯짓을 멈추고 추락할 뻔했다.

     

   마지막 ‘그것’이 발사되기 직전, 내 보조기관이 이상현상을 감지했다.

     

   주변의 공간이 기이하게 굴절된다. 정체불명의 무언가 공간 자체를 비트는 것처럼.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꼬리에서 ‘그것’이 발사됐다.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심연의 색채가 색과 빛의 과잉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 한다면, 그건 정반대였다. 탐식자라는 이름답게 ‘그것’은 모든 색과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빛, 공기, 색, 자연의 모든 요소를 집어삼키면서 날아간다. 지나간 자리에는 저 미지의 포탄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 할 수 있는 짙은 암흑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모여 있던 적들에게서 이변이 발생했다.

     

   이상을 눈치챘을 때는 아주 작은 점인 줄 알았다. 잘못 봤다고 착각해도 좋을 정도로 작은 점.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도화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빠르게 번졌다.

     

   태양이 모습을 감추고 밤이 찾아올 때처럼.

     

   검은 먹물이 함선들과 아웃스페이서 무리의 색채를 빼앗는다.

     

   그 누구도 검은 ‘그것’에 저항하지 못했다. 컬트들이 자랑하는 실드도, 뇌신의 뇌광도, 아웃스페이서의 푸른빛도. 그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태양까지 집어삼킬 것만 같던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늘이라는 이름의 도화지를 잠식했던 검은색이 빠져나가고 붉은색이 그 자리를 채웠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었다. ‘그것’에 먹힌 함선과 아웃스페이서 무리를 제외하고.

     

   운좋게 생존한 수집벌레와 정예함대는 아까에 비해 대략 20% 정도에 불과했다. 알샤스와 이사벨을 태운 여왕도 거기 있었다.

     

   그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주변 동료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확신하건대 지금 그들 머리에는 오로지 하나의 감정밖에 없다.

     

   압도적인 공포.

     

   ‘뼈 야수 활성화.’

     

   그 공포에 쐐기를 박을 시간이 왔다.

   -

     

     

   「…맙소사.」

     

   하늘의 어머니는 돔의 구멍 너머에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니.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오늘 이 순간만큼은 상관없었다.

     

   그녀와 싸우고 있던 아웃스페이서의 말뚝벌레들도 똑같은 상태였으니까.

     

   붉은색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이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퍼졌다. 그저 검기만 한 ‘그것’은 하늘을 채우던 함선과 아웃스페이서들을 마구 집어삼켰다.

     

   전쟁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폭음도, 공포에 빠진 비명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조용한 학살이었다.

     

   ‘저 정도면 거의 볼텍스원급이야.’

     

   그녀도 랭커다 보니 여러 레이드 보스들을 사냥한 적이 있다. 저 하늘에서 벌어지는 파괴 행위, 볼텍스원이나 레드 갤러곤들과 싸울 때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구한 콜드블러드들도 볼텍스원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녀 뒤편에서 덜덜 떨고 있는 걸 보면 거대 괴수를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더 두려운 것 같았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로 인해 반쯤 착란 상태에 빠진 그들에게 압력을 조종하는 입자를 쏴 보냈다. 입자를 이용해 아주 살짝 자극을 주자 그들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모두 정신 차려!」

   “!”

   「지금이 기회야! 모두 저쪽에 있는 비행선에 타!」

     

   덕분에 정신을 차린 콜드블러드 40명이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녀석들 뒤로 미니 뮤턴트 스크리머, MPS-05가 따라붙었다.

     

   이 행성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별명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 차라리 모래가 가득한 사막 밖에 잠시 몸을 숨기는 것이 훨씬 안전하리라.

     

   「구오오오오오오!」

   ‘쳇!’

     

   콜드블러드들과 MPS-05가 비행선에 탑승하는 동안, 말뚝벌레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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