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m 크기의 장수풍뎅이 괴수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만한 앞다리를 휘둘렀다. 하늘의 어머니는 마노(瑪瑙)색 날개를 펼쳐서 위로 날아올랐다. 말뚝벌레의 발톱이 간발의 차로 그녀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공격을 피해 날아오른 그녀가 날개와 똑같은 색의 입자를 뿌렸다. 마노색 알갱이가 닿은 말뚝벌레의 다리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다른 생물 같았으면 그 고통에 몸부림쳤겠지만 놈은 아니었다. 말뚝벌레는 앞다리 하나를 잃은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등과 머리에 솟은 바이오 파일을 그녀에게 겨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개조했어.’
그녀는 능숙하게 비행하며 날아오는 생체 말뚝을 피했다.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저 멀리 다른 말뚝벌레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아드하이! 놈들이 오고 있어!」
반쯤 무너진 건물 뒤에 엄폐한 그녀는 아드하이를 불렀다.
녀석은 반대편 빌딩 옥상에서 돔 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수정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눈동자는 함선과 비행 괴물들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검은 존재’에 고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이곳에 있는 다른 생물들처럼 공포에 빠진 건가 했지만, 다시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미동도 안 하는 녀석의 모습은 뭐라고 할까. 정신을 놓을 정도로 극한의 몰입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때 그녀를 노리던 말뚝벌레도 저 작은 갤러곤을 발견했다. 놈의 등에서 3m 크기의 바이오 파일이 발사되었다.
말뚝이 향하는 곳은 아드하이가 있는 빌딩의 옥상. ‘레드아머’로 보호받고 있지 않은 지금 저 공격을 받는다면 100% 치명상을 입을 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녀는 뒷다리 근육에 힘을 줘서 바닥을 세게 찼다. 고양잇과 맹수의 육신을 가진 그녀의 몸이 화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추가로 등에 있는 날개로 공기를 세차게 때려 가속도를 올렸다.
황금색 털을 가진 그리폰의 몸이 무너져가는 건물의 벽을 뚫고 반대편 빌딩 옥상으로 솟구친다.
생체 말뚝이 아드하이를 꿰뚫기 직전, 그녀는 녀석을 붙잡고 피하는데 성공했다. 날카로운 말뚝 끝이 아슬아슬하게 그녀 머리에 난 뿔을 긁고 지나갔다.
그제야 아드하이는 그녀를 돌아봤다.
「못생긴 친구?」
「정신 안 차려? 아직 전투는 안 끝났어!」
「전투?」「사냥?」
그 말을 들은 아드하이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눈처럼 새하얀 몸 위에 새겨진 붉은색 무늬가 일순간 불이 붙은 것처럼 확 타올랐다.
‘뭐지?’
순간 깜짝 놀라 다시 쳐다봤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녀석은 목을 크게 한 차례 털고, 날개를 펼쳤다.
「친구」「말」「맞아」「사냥」「안 끝났어」
「…그래.」
「함께」「사냥해」
그렇게 말한 녀석은 레드아머를 몸에 두르고 날아올랐다.
‘잘못 본 건가?’
본인의 착각이라고 판단한 그녀는 말뚝벌레와 싸우기 시작한 아드하이의 뒤를 따라갔다.
-
에이모프는 다른 생물을 포식하고 그들의 특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다만 끊임없이 진화하는 컨셉에 비해 육체를 유기적으로 바꾸는 특성은 그리 많지 않다. 상황에 맞춰 몸을 수시로 바꾼다는 특징은 에이모프보다는 볼프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에이모프의 몸을 살인기계로 바꿔 주는 ‘완전한 유기체’, 여러 종류의 특수 상태를 취할 수 있는 ‘유기적 진화’, 신체 부위를 에이펙스의 것으로 변형시키는 ‘가변형 생체병기’. 모두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다.
만약 저 중 하나라도 게임에 있었다면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밸런스는 크게 바뀌었을 거다.
아무튼 게임에서는 신체를 바꾸는 특성이 제법 희귀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사용자의 육체를 강화시키는 ‘뼈 야수’는 아주 매력적인 특성이었다.
‘거대생물’을 재료로 사용해 만드는 육체 관련 융합 특성 뼈 야수.
특성이 활성화되면 뼈와 비슷한 성분의 갑옷이 자라나서 몸의 취약한 부분을 보호한다. 덤으로 몸 전체의 크기도 약 3배 가량 커지고.
게임에서도 여러 번 써봤기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다. 다만 이 세계에서 성체가 된 이후 뼈 야수가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성이 발동되자 짙은 검은색 갑각과 비늘에 있는 미세한 틈으로부터 뼈 갑옷을 구성하는 물질이 흘러나온다. 갑각 위를 코팅하듯 덮은 물질들은 순식간에 고체화되어 단단한 갑주가 되었다. 완성된 백색의 갑주 위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들쑥날쑥 솟아났다.
몸에 갑옷을 두르는 동안, 내 전신도 급속도로 성장했다. 근육이 찢어질 듯 늘어나고, 몸 안쪽 뼈마디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1.5배, 2배, 3배. 한없이 커질 것만 같던 내 몸은 길이 200m가 되기 직전에 멈췄다.
「그르르르르」
「그르륵」
처음 느끼는 변화에 좌우의 머리들이 으르렁거린다. 거대화된 몸에 맞게 녀석들의 울음소리도 훨씬 중후해졌다.
두 머리의 주둥이 위에는 동물의 두개골로 만든 투구와 비슷한 갑주가 덮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사납다는 인상을 줬다.
‘좋아.’
「■■■■■■■■!」
변화를 끝마친 나는 힘차게 포효했다. 양옆에 달린 머리들도 나와 똑같이 울부짖었다.
세 개의 머리가 동시에 포효하니 공기가 찢어지며 뇌성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콰광한다! 콰광!」
“청각 기능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잔여 에너지로 복구합니다.”
내 몸에 탄 26호와 PS-111도 내 움직임에 반응했다. PS-111은 일시적으로 발생한 소닉붐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것 같다.
[즈즈 즈즈즈(모두 조심해)]
나는 애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날개팔을 크게 흔들었다. 몸과 마찬가지로 3배로 커진 검은색 날개가 공기와 함께 내 몸을 앞으로 밀어낸다. 저 아래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 새카만 그림자로 뒤덮이는 게 보인다.
「스스스!」
다가오는 나를 본 수집벌레들이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낸다. 공포와 별개로 여왕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돌격하는 벌레들. 나는 피하지 않고 그들을 들이받았다.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와 충돌해 터지는 날벌레들처럼 아웃스페이서들이 마구 박살난다.
놈들이 자랑하는 흉악한 위액도, 뾰족한 이빨도 소용없었다. 갑각을 녹이는 위력이야 그대로지만, 뼈 야수의 갑주가 워낙 두껍다 보니 큰 피해를 주기 힘들었다.
「나쁜 파닥파닥!」
「스슥?!」
“지원사격을 실시합니다.”
내 등에 올라탄 26호, 중앙의 머리에 있다가 26호 곁으로 이동한 PS-111도 나를 도와 벌레잡이에 나섰다.
몸을 다시 수십m 크기로 키운 26호는 날카로운 톱날이 달린 촉수들을 꺼냈다. 나와의 충돌을 간신히 면한 수집벌레들은 26호의 촉수에 얻어맞고 산산조각이 났다.
PS-111은 26호 아래에 숨은 채 데몰리셔가 달린 꼬리로 우리를 지원했다. 비행 궤도를 계산해서 쏘는 건지 놈이 쏜 물질분해탄은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다.
아웃스페이서들을 학살하는 우리를 향해 적들도 반격을 개시했다.
벌레들 사이에 숨어 있던 컬트 전함들의 주포가 불을 뿜는다. 보랏빛의 세례가 내 위로 쏟아진다. 몸을 뒤덮고 있는 아웃스페이서의 위산과 피가 열선에 맞아 그대로 증발했다.
그러나 해골을 연상시키는 갑각과 그 아래에 있는 검은색 비늘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튀어나온 가시 중 일부가 부러지긴 했지만, 그 정도 손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전함을 향해 두 개의 꼬리를 휘둘렀다.
집게가 달린 오른쪽 꼬리와 전함의 실드가 충돌했다. 반투명한 보라색 보호막이 유리창이 깨지는 것처럼 금이 가더니 산산이 조각났다. 실드를 깨부순 집게는 전함의 전면부를 강하게 후려쳤다.
완전히 날아간 전함 내부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발생한다. 나는 침식 촉수를 뻗어서 추락하려는 전함을 붙잡았다.
“으아아아악!”
부서진 전함에서 컬트 승무원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중 일부는 내 촉수에 의해 먹이가 됐고, 일부는 저 아래 붉은 모래 위로 추락했다.
나는 망가진 전함을 방망이로 삼아 다른 배와 아웃스페이서에게 휘둘렀다. 전함과 부딪칠 때마다 수십 마리의 수집벌레들이 으깨졌다.
그러자 한가득 뭉쳐 있던 벌레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여왕의 지시를 받은 놈들이 빠르게 산개했다.
‘뒤를 보이면 안 되지.’
나는 일시적으로 진영이 무너진 놈들의 뒤를 쳤다. 모든 머리의 주둥이를 크게 벌려서 후퇴하는 놈들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몸이 비약적으로 커져서 그런지 한 번 아가리를 벌릴 때마다 열 마리 이상씩 뱃속으로 들어왔다.
「포식 효과 발동!」
수백 마리의 벌레들을 삼킨 덕분에 마침내 원하는 특성을 손에 넣었다. 수락하자 움직이지 않던 팔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전자 정수의 소실로 인해 금제가 걸렸던 ‘기생 군체’가 마침내 복구되었다.
‘휴. 겨우 복구를….’
그때 멀리서 날아온 황금색 뇌전(雷電) 내 몸을 스쳤다. 전함 주포에 맞았을 때도 큰 피해가 없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열선이 스친 백색 갑각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둘러싼 적들과 맞서면서 보조기관으로 주변을 살폈다. 저쪽 먼 하늘에 수백m의 크기를 가진 구체가 홀로 떠 있었다.
‘지금 그 공격, 설마 뇌신인가?’
내가 아는 뇌신은 납작한 만다라 형태지, 저런 식으로 생기지 않았다. 만다라 모양의 뇌신을 여러 개 겹쳐서 구체로 만들면 저렇게 생겼을 거다.
‘강화형인가?’
생긴 것도 그렇고, 화력도 더 강한 걸 보니 아무래도 업그레이드된 버전 같다.
‘다 부서진 줄 알았는데.’
‘검은 탐식자 대포’의 파괴 범위에는 뇌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선들과 같이 전부 쓸려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아마 저게 감시청의 정예함대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뇌신일 터.
‘누가 조종하는지 알 것 같네.’
궤도병기 뇌신은 강력한 사이킥 파워 사용자만이 다룰 수 있다. 필시 알샤스가 조종하는 물건이리라.
나를 타격하는데 실패한 뇌신에 다시 뇌광이 모여든다. 나 역시 피하지 않고 사이킥 파워를 모았다.
검은 탐식자 대포로 소모된 에너지 때문일까? 앞서 난사했을 때와 다르게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확연히 들었다. 용의 심장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고 있긴 하나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집중하자.’
극한까지 에너지를 모은 뇌신이 찬란하게 빛난다. 태양을 정면에서 마주하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황색의 열선이 발사되는 순간에 맞춰 나 또한 고도로 응축된 에너지의 숨결을 토해냈다.
세 줄기로 뻗어가는 용의 힘이 뇌신의 번개와 충돌한다. 에너지 간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충격파가 베르잔02의 천공을 뒤흔들었다. 주변의 적들도 충격파에 휩쓸려 서로 부딪치거나 지상으로 추락했다.
‘확실히 강하지만….’
나를 이길 정도는 아니다.
대치는 길지 않았다. 구렁이가 자기보다 작은 뱀을 통째로 삼킬 때처럼, 세 개의 머리로부터 발사된 브레스가 번개를 먹어 치웠다.
붉은색 하늘에서 황색의 빛이 거의 꺼져갈 때쯤 보라색 열선이 뇌신에 닿았다. 이어서 턱 아래의 보조기관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폭발이 발생했다.
수 개의 핵폭탄이 동시에 터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화염이 하늘을 뒤덮는다. 얼마 남지 않은 전함들은 불길에 휩쓸려 먼지로 산화했다.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 수집벌레들에게 보호받는 여왕 위에 알샤스와 이사벨이 보인다.
놈은 자기 계획이 실시간으로 붕괴되고 있어서 그런지 몹시 당황해하는 중이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감정만큼은 확실히 느껴진다.
나는 회복된 전투용 팔로 놈을 겨냥했다. 그걸 본 놈이 크게 뒷걸음쳤다.
“뭐라고 했지? 협력해서 난관을 극복한다고?”
“!”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놈은 복제물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 우주 어디에 숨든, 어떤 무기를 가져오든.
놈의 정수를 포식하기 전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거다.
-
알샤스는 눈앞에 닥쳐오는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에이모프가 제이슨을 죽였다는 얘기는 한참 전에 들었다. 그녀의 오랜 동료, 신시아 또한 당했다는 소식도.
그래서 철저히 준비했다. 정예함대를 운용할 수 있도록 한참 전부터 행성 내 유력자들을 포섭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여제에게 연락해 아웃스페이서 군단을 대기시켰다.
그뿐 만일까. 그녀는 계획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대비해 보험도 마련해놨다. 즉 이중, 삼중으로 준비했다고 봐야 할 터.
놈이 불시에 찾아온다고 해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감시청의 정예함대는 전멸했고, 아웃스페이서 군단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준비해 둔 보험과 감시청을 지키는 제국모함뿐.
「여제께서 명령하셨다. ‘포식자’ 사냥을 실패했으니 물러나라고 명하셨다.」
“아냐! 기다려! 이렇게 끝낼 수 없다고!”
「여제께서 경고한다. 친구가 ‘포식자’에게 먹힌다면 위험하다. 도망쳐라.」
「도망쳐라.」
「도망쳐라.」
“닥쳐! 닥치라고!”
가뜩이나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데 여왕의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계속 울리니 견디기 힘들었다.
‘보험! 아직 보험이 남아 있어!’
그녀는 핏발선 눈으로 옆에 있는 이사벨을 노려봤다.
‘볼텍스원을 부르도록 시킨다면….’
콜드블러드는 계약을 많이 맺을수록 그들의 지배자와의 관계가 깊어진다. 그 관계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볼텍스원을 직접 소환하는 계약이 해금된다.
소환된 볼텍스원은 일정한 대가를 받고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 준다. 적을 암살하는 것부터 시작해 행성을 불태우거나 함대를 궤멸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소원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대가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제대로 된 대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소환에 응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볼텍스원을 부르는 대가에는 소환자의 목숨이 반드시 포함된다. 게임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이사벨이 볼텍스원을 부른다면 무조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