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더 아껴 쓰려고 했는데!’
이사벨의 특전 ‘만상의 천안’은 매우 강력한 능력이다. 그런 아까운 도구를 여기서 버려야 한다니. 알샤스는 그 점이 아쉬웠다.
물론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여기서 에이모프를 성공적으로 죽여 놔야 귀환파 내부에서도 그녀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다.
‘이사벨이 소환하는 동안 도망쳐야겠어.’
이 자리에 있는 알샤스는 복제물이다. 그녀의 본체는 이곳이 아니라 감시청에 있다. 시뮬라크럼으로 만든 복제물은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지.’
복제물이 사라지면 본체는 제국모함을 끌고 다른 성계로 도주할 생각이다. 복제물은 최대 다섯까지 만들 수 있으므로 도망치기로 작정한다면 누구도 그녀를 추적할 수 없다. 에이모프가 쫓아오려고 해도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니 헛수고만 할 거다.
모든 생각을 정리한 알샤스는 이사벨을 불렀다.
“이사벨. 계약을 이행할 시간이다.”
그러자 이사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도마뱀의 얼굴에 더듬이가 달린 녀석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볼텍스원을 소환해라.”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 이사벨.
녀석도 그 명령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 때문일 터. 하지만 알샤스는 자신이 있었다.
“사라진 네 언니는 걱정하지 마라. 얼마 전 신시아가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닥쳐.”
“곧 구조할 예정…뭐?”
순간 알샤스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뭐라고 했지?”
어느새 녀석의 얼굴에 금이 간 거울을 연상시키는 상처들이 생겼다. 상처에서는 피가 아닌 검은색 액체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사벨은 알샤스를 비롯해 귀환파 멤버들에게 적대할 수 없도록 계약을 맺었다. 녀석 몸에 계속 생기고 있는 저 상처는 계약 위배로 인한 페널티였다.
상처투성이 콜드블러드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네, 놈, 들이, 나를, 속, 였다는 거, 알고 있어. 언니, 이미, 죽었, 잖아.”
“에이모프 때문에 미친 건가?”
“미, 친 것은 너희, 들이지. 지금, 껏, 나를 기만한, 간악한, 쿨럭! 종자들!”
검은색 액체를 왈칵 토한 이사벨은 허리춤에서 곡도를 뽑아 들었다.
“네놈, 원본, 다, 른 곳, 있지? 절대, 절, 대로, 쿨럭, 도망 못 칠 거, 다.”
단순한 호신용 무기라 생각했던 곡도.
그제야 그녀는 저 물건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벨이 뭘 위해 저 곡도를 준비했는지도.
“잠깐, 네놈?!”
“심연의 거주자, 쿨럭, 거주자에게 고한다.”
녀석이 스스로 복부를 찌르려 하자 알샤스가 급히 손을 들었다. 사이킥 기술인 속박이 펼쳐지며 이사벨의 육체를 옭아맸다.
“컬트 ‘알샤스’를 추적해 말살하는 것을 위해….”
“미친! 그만둬!”
하지만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온몸이 기형적으로 꺾이고, 피와 검은 액체를 토하는 와중에도 녀석은 곡도로 몸을 찌르려 했다.
그걸 본 알샤스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젠장! 여왕!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려!”
전신이 뒤틀린 이사벨이 푸른빛에 휘감겼다. 하지만 곧이어 그 빛은 뭔가에 방해를 받은 것처럼 훅 사그라졌다.
그러는 사이, 이사벨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나의 피, 생명을 바친다.”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곡도가 복부를 꿰뚫었다.
모든 것을 마친 이사벨은 여왕의 몸 위에 쓰러졌다.
-
‘응?’
여왕을 지키는 아웃스페이서 무리의 움직임이 이상하다. 갑자기 우왕좌왕하는 것이 검은 탐식자 대포를 쐈을 때와 비슷했다.
‘통제를 잃었어?’
「큰애기야.」
그때 등 위에서 26호가 보낸 파장이 내게 흘러들어왔다.
「저기 무서워.」
[즈즈즈즈(무섭다고?)]
「응.」
26호의 무섭다는 말. 아주 위험한 적과 조우했을 때 쓰는 표현이다.
‘아직 숨겨둔 카드가 남아 있나?’
혹시 아웃스페이서 랭커나 다른 랭커를 부른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닐 거다. 그랬다면 초광속 항해의 파장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접 확인해야 해.’
나는 날개를 흔들어 공기를 박찼다. 내 몸이 여왕을 둘러싼 무리와 빠르게 가까워진다. 통제에서 벗어난 수집벌레들은 나를 공격하는 대신 도망치기 바빴다.
흩어진 무리들 너머에는 혼란에 빠진 여왕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이사벨?’
작고 여린 몸을 가진 콜드블러드가 쓰러져 있었다.
여왕의 몸 위에 쓰러진 이사벨의 몸이 간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바들바들 떨린다. 몸을 마구 떠는 녀석의 입에서는 검은색의 걸쭉한 액체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죽은피처럼 보이지만 저건 혈액이 아니다.
검은색 액체는 자아를 가진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공중의 한 지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저것이 무엇인지 안다.
‘볼텍스원!’
이 자리에서 놈을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뿐이다. 콜드블러드 랭커 이사벨 말이다.
‘설마 알샤스가 시킨 건가?’
처음 봤을 때는 알샤스가 이사벨에게 강제로 명령한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내가 잘못 판단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사벨 곁에 있는 알샤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놈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걸 보면 이 소환을 누가 주도한 것인지 명백하다. 이사벨은 자신의 의지로 볼텍스원을 불렀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사벨은 끊임없이 몸을 떨며 검은 액체를 토해냈다. 소환 도중이라 아직 죽지 않았다.
‘게임이었다면 무조건 사망 판정이었지만.’
여기는 현실. 의식 중에 녀석을 끄집어낸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저 소환 방식 때문이다.
아웃스페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우주에서 건너왔다는 설정을 지닌 볼텍스원은 이 우주의 법칙에서 많이 벗어난 존재다.
그 예로 볼텍스원의 육체는 소량의 유기물과 ‘심연의 힘’이라 부르는 특수한 에너지들이 합쳐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자아를 가진 에너지 생명체라 보면 된다.
에너지로 구성된 육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유기물이 필요하므로 평상시에는 몸을 여러 개로 쪼갠 뒤 휴면 상태로 지낸다.
그리고 콜드블러드는 쪼개진 볼텍스원을 보호하는데 최적화된 존재, 즉 일종의 살아 움직이는 보관 장치다.
‘볼텍스원을 부르면 죽는 것도 그 때문이지.’
물질세계로 나온 우주의 악마들은 계약자를 잡아먹는다. 필요 없는 보관 장치를 폐기하는 김에 육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원도 얻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볼텍스원이 완벽히 소환되기 전에 이사벨을 분리시켜야 한다. 녀석을 살리려면 그 방법뿐이다.
[즈즈즈즈 즈즈즈즈(이사벨을 빼낼 거야)]
“돕겠습니다.”
「응! 친구의 가족 구하자!」
나는 여왕과의 거리를 좁힌 뒤 침식 촉수를 뺐다. 등에서 튀어나온 촉수 여섯 개들이 공중에 모여 있는 검은 액체에게 향했다.
「‘■식자’의 공격. 방■■다.」
아웃스페이서들만의 고유 파장이 내 괴물의 촉수를 간질였다. 놈의 명령을 받은 수집벌레들이 촉수 앞을 가로막았다. 한밤중에 전등에 달라붙는 나방들처럼 수집벌레들이 내 촉수에 덕지덕지 달라붙어서 못 움직이게 했다.
오직 촉수 하나만이 고기방패들을 무사히 통과해서 검은 액체를 후려쳤다.
내 촉수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크기의 검은 액체와 닿는 순간, 엄청난 반발력이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액체와 부딪친 부위가 물질분해탄을 맞은 것처럼 푹 파였다.
「고통 경감 발동!」
오랜만에 ‘고통 경감’ 특성이 활성화되었다. 강렬한 통증이 뇌리를 강타했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의도한 일이었기에.
‘좋아. 먹이를 먹였으니 소환자에 대한 집착이 조금 줄어들었을 거야.’
어떤 볼텍스원은 소환 의식, 그러니까 몸이 재구성되는 과정 중에 소환자를 공격하기도 한다. 소환자의 육신 대신 다른 먹이를 줬으니 이사벨의 목숨이 조금 더 연장될 거다.
이어서 나는 이사벨을 직접 떼어놓기 위해 재차 여왕에게 접근했다. 내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여왕이 초광속 항해를 시도한다.
「못 가!」
「!」
그때 26호가 톱날 촉수를 마구 뽑아내 여왕을 붙잡았다. 대왕문어가 상어나 고래를 잡아먹을 때처럼 수많은 촉수들이 여왕의 몸을 얽어맸다. 푸르게 빛나던 여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젠장! 모프박이 네놈 때문에…!”
그걸 본 알샤스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에 쥔 ‘단죄’로 26호의 촉수를 내리쳤다. 블랙 갤러곤의 뿔로 제련한 것이다 보니 톱날 촉수가 맥없이 잘렸다.
「아야!」
‘어딜 감히!’
26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본 양쪽 머리들이 분노에 휩싸였다. 입을 최대치로 벌린 머리들이 알샤스 위를 덮쳤다.
“이런 씹…!”
알샤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내 머리에 으깨져버렸다. 동시에 여왕의 몸에도 큰 상처가 났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여왕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나를 공격하던 수집벌레들은 부상을 입은 여왕을 따라갔다.
사막의 모래 위에 처박힌 여왕은 몸이 파랗게 빛나더니 곧 모습을 감췄다.
다른 때 같았으면 여왕을 추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허공에 떠 있는 이사벨 때문이다.
‘몸의 떨림이 약해지고 있어.’
녀석의 몸에서 나온 검은 액체는 어느새 녀석 몸집은 물론이고 여왕보다도 크게 퍼진 상태였다. 내가 시간을 번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거지, 몇 분 후면 저 검은 액체가 볼텍스원으로 완성될 거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소환하기 전에 소환자를 죽인 적은 있어도 지금처럼 도중에 방해한 적은 없었다. 침식 촉수와 전투용 팔로 이사벨을 빼내려고 해도 검은 액체가 가로막았다.
사이킥 브레스나 검은 탐식자 대포를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시간도 부족할뿐 더러 자칫 잘못하면 이사벨도 죽어버릴 테니까.
고민하고 있는 그때, 등에 탄 26호가 움직였다. 녀석은 몸 아래에 있는 지느러미를 이용해 내 중앙의 머리까지 기어 올라왔다.
‘응?’
「친구의 가족 지킬 거야.」
그 다음 이어진 녀석의 행동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녀석이 촉수 하나를 뻗자 보라색 줄기가 나타났다. 밤바다의 물결처럼 요동치는 줄기가 이사벨이 떠 있는 공간을 향해 뻗어 나갔다.
‘저건?’
거미가 먹이를 고치로 만들 듯 보라색 줄기가 막처럼 활짝 펼쳐져서 이사벨을 감쌌다. 막 위에는 보라색 줄기가 이리저리 얽혀서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갑자기 생긴 에너지막이 이사벨의 몸 전체를 덮으면서 콜드블러드 몸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액체도 차단되었다. 검은 액체가 이사벨의 육체를 다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전부 26호의 보라색 물결에 막혔다.
그렇게 검은 액체와 이사벨이 완전히 분리된 후 26호가 만든 보라색 줄기는 사라졌다. 이사벨의 몸도 실이 끊어진 연처럼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런!’
나는 추락하는 이사벨을 따라 빠르게 강하했다. 모래와 충돌하기 직전, 전투용 팔로 녀석을 간신히 붙잡았다.
‘휴.’
죽기 전에 떼어놓는 것은 성공이다.
물론 그 과정에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산재해 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모래 위에 착지한 나는 손가락을 펼쳐서 녀석을 확인했다.
작은 키를 가진 콜드블러드의 상태는 실로 참혹했다. 날붙이로 난도질한 것처럼 보이는 상처가 전신에 가득했고, 복부에는 전에 봤던 곡도가 꽂혀 있었다. 상처에서는 검은 액체와 피와 살점이 뒤섞여서 흘러내렸다.
숨만 붙어 있을 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부상이 심각하다. 나는 다급히 내부기관 관련 융합 특성 ‘울트라 젤리’를 활성화했다.
울트라 젤리는 보유한 체력을 소모해서 높은 열량의 영양 물질을 만드는 특성이다.
게임에서는 미리 만들어 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먹어서 체력을 회복시키는 용도로 썼다. 적진에 잠입해서 연전(連戰)하게 될 때나 아니면 둥지를 만드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때 등등. 간단히 말해 에이모프의 포션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