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은 이사벨보다도 훨씬 혼란스러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여러 가지 자아가 혼재된 거다.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야.’
뒤섞인 상태로 구현된 자아의 이미지 중에는 잠재된 페넬로페의 의식도 포함되어 있다. 자아가 녀석의 사고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태인 만큼, 이사벨에게 마음을 전달하기도 용이할 거다.
“게다가 저는 기계와 유기물이 합성된 존재. 저의 사고 중 대부분은 AI가 주도합니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글쎄, 그건 직접 해 보면 알겠지.”
“무의미한 행위입니다.”
“어차피 긴 시간이 필요한 일도 아닌데, 굳이 안 할 이유는 없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내가 의견을 굽히지 않자 PS-111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밖에서 한 것처럼 시도해 보자. 이마를 맞대어 봐.”
PS-111이 동생에게 다가가 머리를 가까이했다. 페넬로페의 잔상이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이사벨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둘의 이마가 닿자 몸 위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물방울이 떨어진 수면처럼 일렁거렸다.
“…….”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이사벨.
대신 토굴의 벽면이 반응했다. 반복해서 벽에 투영되던 기억들에 노이즈가 끼더니 서서히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면도날처럼 날카롭던 과거의 기억들이 안개처럼 흐릿해진다. 여러 색깔을 지닌 빛무리가 비워진 공간을 채워간다.
녀석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듯 캄캄하기만 하던 토굴이 금세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녀석의 시선이 찬란한 빛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벽을 채우고 있는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마치 안개 혹은 모자이크가 낀 것처럼 똑바로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느껴졌다.
그건 ‘고마움’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준 것에 대한 감사.
언니가 남긴 유산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준 것에 대한 헌사.
마지막으로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가족을 믿고 기다려 준 것에 대한 찬사.
벽면에 그려진 수많은 모자이크들이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녀석을 고문하던 과거들과 완벽히 대치되는 것이었다.
또한 이사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고.
“…….”
인형처럼 무표정한 녀석의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예상대로 PS-111과 감정이 이어진 것이 효과가 있었다.
“나는, 내가, 모든 것을….”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다면, 내가 더 강했다면….”
말이 이어질수록 공간이 다시 뒤틀린다. 아름다운 빛의 무도회에 그림자가 깃든다. 모자이크처럼 보이던 것들이 선명해지고 다시 어두운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
녀석의 죄의식과 PS-111의 감정이 충돌하고 있다.
“언니가 고통받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오히려 죄의식이 PS-111의 메시지를 집어삼키고 있다.
지금 녀석의 반응을 보니 자칫 잘못하면 녀석이 겪었던 안 좋은 기억에 PS-111이 뮤턴트 스크리머가 된 것이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성가신데.’
이대로 가면 이사벨은 죄의식으로 점철된 정신의 감옥에 완전히 매몰되고 만다.
문제는 PS-111에게는 더 이상 이사벨을 압박할 수단이 없다는 것.
‘지금 녀석을 설득해야 해.’
PS-111이 시간을 끄는 동안, 녀석의 감옥을 박살내야 한다.
나는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쌍둥이에게 다가 갔다.
“이사벨.”
“늘 내가 문제였어. 내가 언니보다 잘나지 못해서….”
“네 말이 맞아.”
녀석이 자학하는 것을 긍정하자 벽에 재생되는 기억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PS-111도 당황해서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제 물러날 수 없어.’
“네가 만약 더 많이 준비했다면 PS, 아니 페넬로페를 잃지 않았겠지.”
“!”
“하지만 이제 와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 너의 언니는 기계 생물이 됐고, 너도 비슷한 꼴이 됐지. 너를 기만한 신시아도 이미 죽었고.”
이사벨이 입을 다물자 토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새까만 어둠이 녀석의 정신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런데 말이야. 페넬로페를 스크리머로 만든 놈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어. 자신들의 성공적인 연구 성과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지. 좋은 샘플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어?”
“…….”
PS-111 제작에 관여한 스타유니언의 대수령, 메가콥 가르멜다 가주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그건 중요하지 않다.
“네가 여기 있는 동안, 그들은 어떻게든 PS-111을 회수하려들겠지. 나야 녀석을 뺏기고 싶지 않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모르는 일이지. 놈들이 만약 네 언니를 데려간다면 어떻게 할까?”
“…그만.”
“밖에는 너희 자매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원흉이 아직 남아 있어. 그런데 너는 여기 있을 거야? 그들이 네 언니를 해부하고 고문해도 후회만 할 건가?”
“그만해!”
더 이상 못 들어 주겠는지 이사벨이 소리를 지른다. 녀석의 고함이 토굴에 메아리칠 때마다 어둠에 잠긴 기억들에 금이 갔다.
“왜 여기서 포기하려는 거지? PS-111은 네가 바라는 언니의 모습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왜 너의 가족을 지키려 하지 않지? ”
“빌어먹을 모프박이! 네가 뭘 안다고…!”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이사벨, 네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는 거야.”
“뭐?”
“너와 언니의 행복을 방해하는 자는 전부 지워 버려. 언니를 괴롭히는 자들, 너를 모욕한 자들 모두 말이야. 그들의 시체 위에서 행복을 만끽하라고.”
“내, 내가 행복….”
“지금까지 노력했잖아. 여기서 포기하지 마.”
내 말이 끝나는 순간, 벽면의 기억들이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동시에 우리가 서 있는 토굴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에이모프 말이 맞아. 내게는 할 일이 있어.”
“동생님?”
“언니, 현실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그리고 여기에서도….”
어느새 눈에 빛이 돌아온 이사벨이 우리를 바라본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그 말을 끝으로 악몽의 감옥이 무너졌다.
깊은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처럼 의식이 돌아온다. 에이모프의 육신으로 의식이 옮겨지고, 내 몸의 갑각도 서서히 살아난다. 보조기관이 제조공장에 흐르는 피 냄새를 느끼는 것을 시작으로 커다란 머리와 긴 목 순서로 감각이 느껴진다.
‘둥지와 링크하고 해제했을 때는 금방 감각이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아니네.’
덩치가 커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예 내 의식 전체가 다른 존재의 몸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 회복이 느렸다.
마침내 중앙의 머리를 움직일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눈을 떴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26호와 아드하이가 보일 거로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처음 본 광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Pinche puta(빌어먹을 씨발년아)! 내 권총 어디다 숨겼어!”
“케, 케헥! 나, 나는 몰….”
지네의 몸에 인간 여성의 얼굴을 가진 스크리머가 팔다리가 없는 컬트를 붙잡고 있다. 아름다운 새 몸을 얻은 이사벨이 여러 개의 팔을 이용해 알샤스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동생님, 아직 신체의 조율이 덜 끝났으니 과격한 움직임은 자제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가족 힘세다!」
「아픈 거」「아냐?」「갑자기」「건강해졌어」
나와 마찬가지로 방금 깨어난 PS-111이 긴 몸통을 꿈틀거리며 날뛰는 새 동생을 뜯어말린다. 그 뒤에서는 26호와 아드하이가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 있고.
「에이모프,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하늘의 어머니는 깨어나자마자 난동을 피우는 이사벨을 보며 부리를 떡 벌리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즈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즈(부탁한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했어)]
「아무리 봐도 그것만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외에 딱히 특별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녀석에게 해야 할 일들이 남았음을 상기시켜준 것일 뿐이니까. 그 의무를 다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곁에 남을 거다.
복수라는 의무 말이다.
알샤스의 몸에 붙어 있는 생명 유지 장치에서 위험신호를 보낼 때까지 목을 조르던 이사벨은 곧 정신을 잃었다. 뇌를 이식한지 얼마 안 돼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생님의 뇌에서 보내는 신호가 필요 이상으로 증폭된 것을 확인. 스스로 안정화시킬 수 있기 전까지 외부 지원 시스템으로 전환합니다.”
PS-111은 쓰러진 이사벨의 몸에 케이블과 각종 전자 장치를 연결해서 조율을 시작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가 도로 기절했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는다. 조율 작업만 성공한다면 다시 깨어날 거다.
‘좋아. 그러면….’
나는 주둥이 끝을 바닥에 널브러진 알샤스에게 향했다.
이사벨이 기절하기 전까지 닦달했던 권총.
아마 과거의 기억 속에서 적들과 싸울 때 썼던 그 무기를 말하는 거겠지. 신시아가 녀석을 속이고 난 뒤 챙겨 간 것으로 추정된다.
제이슨이 말하길, 사냥한 랭커들의 장비는 신시아가 챙겼다고 했다. 그리고 놈은 지금까지 제이슨과 함께 최소 랭커 둘 이상을 사냥했다.
‘우주요새에서 싸웠을 때는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어.’
이사벨, 페넬로페, 그 외 랭커들로부터 얻은 장비를 그냥 버렸을 리 없다. 필시 어딘가에 숨겨놨겠지.
그리고 그 장소를 알 만한 자가 내 앞에 있다.
죽다 살아난 놈은 내 시선을 느끼고 몸을 흠칫 굳혔다. 내가 고개를 가까이 하자 놈이 덜덜 떤다.
“우리는 계산해야 할 것이 남았지?”
“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 몰라요. 지, 진짜로! 믿어 주세요!”
정황상 이사벨을 노예로 만든 자는 신시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알샤스는 신시아로부터 이사벨 관리 권한을 인계받았다.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던 신시아가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랭커의 관리를 맡길 리 없다. 아무리 같은 파벌의 동료라 해도 말이다. 서로 친한 관계라면 신시아가 획득한 장비를 어디 숨기는지도 알고 있겠지.
‘지금 보니까 정신도 멀쩡한 것 같고.’
대화가 통하니 정보를 빼먹는데 지장은 없을 듯하다.
“너에게 이사벨을 맡긴 신시아. 놈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
“시, 신시아? 녀석은 제 동료일 뿐 제가 아는 건….”
“아는 게 없으면 네가 살아 있을 이유도 없지.”
“…말해주면 살려줄 건가요?”
“그래. 너는 죽지 않을 거다. 약속하지.”
PS-111을 도와 이사벨을 돌보던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흘낏 쳐다 봤다. 또 시작이냐는 눈빛이었다.
“자리를 좀 바꿀까.”
“예…히익?!”
나는 전투용 팔로 알샤스를 집어 들었다.
「큰애기 어디가?」
「나」「같이」「가」
「잠깐만. 이사벨이 데려온 콜드블러드들이 아직 식사를 못했어. 둘이 좀 도와줄래?」
「부속지가 많은 인간들 배고파?」
「귀여운 난쟁이」「도와줄게」
「우리가 먹는 것 말고, 식당에 가서 남은 음식을 갖다 주면 돼.」
「응.」
나를 따라오려던 26호와 아드하이는 40명의 콜드블러드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기 위해 식당으로 떠났다.
‘그러고 보니 40명을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봐야겠네.’
계속 기가크래커에 태우고 다닐 수는 없다. 안전한 행성에 내려 줘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
‘안전한 곳이라.’
녀석들은 우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만에 하나 다른 랭커들과 접촉하게 되면 우리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갈 수도 있다.
따라서 안전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르는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것이 좋다.
‘용의 둥지로 보내볼까?’
함 오르트가 아드하이를 대신해 통치하는 얼어붙은 지하의 왕국. 그곳은 게임에서 등장하지 않은 행성인데다가, 지하세계로 가려면 두꺼운 얼음층을 뚫고 내려가야만 한다. 다른 배가 행성을 우연히 발견해도 지하세계까지 확인하기 쉽지 않다.
‘얼음 아래의 지하는 콜드블러드들이 살기 나쁘지 않아.’
게다가 갤러곤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 그 어떤 행성보다 안전할 거다. 스쳐지나가듯 떠오른 생각인데, 의외로 괜찮을 같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아드하이를 보면 믿기 힘들지만, 갤러곤들은 매우 포악하다. 녀석들은 무리의 동족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을 전부 적대한다. 괜히 서양의 드래곤을 모티브로 한 생물이 아니다.
물론 나는 아드하이 무리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함 오르트에게 콜드블러드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면 필시 들어 줄 거다.
‘알을 품거나 블루 갤러곤을 양육하는데 도와주는 일을 맡기면 되겠지.’
나중에 하늘의 어머니와 이에 관한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알샤스를 데리고 격납고로 이동했다.
“먼저 신시아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