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깔끔히 분리된 목 부근의 흔적을 주시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여기 왜 왔는지 이제 생각이 났네. 할 말이 있어.」
[즈즈(뭐지?)]
「PS-111말로는 이사벨의 조율은 30시간 정도 걸릴 거라네.」
30시간이라니.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당장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사벨이 무력화된 상태가 장기간 이어지는 것은 달갑지 않다. 녀석을 지키기 위해 다른 녀석이 계속 곁에 있어 줘야 하니까.
내 생각을 읽은 하늘의 어머니가 이어서 말했다.
「기가크래커의 설비로는 미세 조정이 어려워서 그렇다고 하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즈(그 말은 설비가 좋으면 더 빨리 끝난다는 거지?)]
「응. 아마도.」
그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것이 있다.
기가크래커에 탑승한 40명의 콜드블러드들. 그들을 아드하이의 무리가 지배하는 얼음 행성에 보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스크리머 지원선이 있지.’
스크리머 생산 설비의 도움을 받는다면 PS-111의 작업 효율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 터.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하나 생각나는 게 있는데)]
「응?」
나는 얼음 행성으로 가는 김에 콜드블러드 노예들을 갤러곤과 함께 살도록 하자는 의견을 꺼냈다.
「게임 같았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능할 것 같네.」
[즈즈즈(그렇지?)]
「여기서 따져봐야 할 부분은 갤러곤이 아니라 환경이야. 내가 지난번 갔을 때 산소가 존재하는 것은 확인했고. 세균 감염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콜드블러드는 각종 바이러스에 내성이 있으니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부리 끝을 매만지며 얼음 행성이 콜드블러드들이 서식하기 적합한지 따졌다.
「문제는 온도야. 콜드블러드는 저온에 취약해. 녀석들은 지하의 냉기를 견디지 못할 거야.」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둥지 주변은 유황의 강 덕분에 따뜻할 텐데?)]
「건강하다면 네 말대로 견뎌 내겠지만, 지금 그들의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체력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버티기 어려워.」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그 부분은 강화복을 입혀서 해결하려고)]
「강화복? 아아, 기가크래커에 있는 강화복 말이구나.」
기가크래커에는 우주 공간에서 활동하는데 특화된 강화복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걸 입히면 녀석들의 온도 문제, 세균 감염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물론 평생 입고 다닐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회복해야겠지만.’
거기부터는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콜드블러드들을 안전한 곳에 이주시키는 것으로 나의 역할은 끝났다.
「그들에게는 내가 얘기할게.」
[즈즈 즈즈즈즈즈 즈즈즈(나는 PS-111에게 가 볼게)]
하늘의 어머니를 보낸 뒤, 나는 ‘왼쪽 머리’의 정수리 끝을 본체 쪽으로 향했다.
‘연습하는 김에 이걸로 한 번 가 볼까?’
복제물과 거리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는 겸, ‘왼쪽 머리’로 PS-111에게 가 봐야겠다.
본체가 격납고에 엎드려 쉬는 동안, 나는 ‘왼쪽 머리’와 연결된 상태로 복도 위를 기었다. 거리가 멀어지는 동안에도 이질적인 감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조공장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는 동안 몇 가지 실험을 해봤다. 복제물과 연결된 상태에서 본체와의 감각을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상태에서 접촉하지 않고 다시 연결할 수 있는지 말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는 연결을 해제하자마자 본체로 의식이 돌아왔다. 본체 대신 ‘왼쪽 머리’에게만 내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는 녀석이 독자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내 몸의 일부에 불과하므로 그런 것 같았다.
그 상태에서 ‘왼쪽 머리’를 통제하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시 감각이 연결됐다. 팔을 꽉 붙잡아서 피를 안 통하게 했다가 다시 푼 것처럼 저린 느낌과 함께 ‘왼쪽 머리’와 감각이 공유됐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장점이 하나 있어.’
흥미로운 점은 의식이 분리된 시점에서도 ‘왼쪽 머리’는 내가 행하려고 했던 것들을 자발적으로 이행하려 했다는 거다. 의식이 끊긴 잠깐의 시간 동안 녀석은 계속 복도 위를 기어서 제조공장으로 가려고 했다.
‘어쩌면 두 머리들, 생각보다 똑똑할지도 몰라.’
본능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긴 하지만, 뭐가 됐든 나를 기반으로 탄생한 존재들이다. 내 지배를 받지 않을 때도 나의 전투스타일, 나의 전략 등을 모방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신경 쓰지 못하는 상황이 와도 미리 명령을 주입해 놔서 전략적으로 싸우게 할 수 있다.
‘실험을 더 해 봐야 확실해지겠네.’
그밖에 본체와 거리가 얼마만큼 떨어져도 연결이 유지되는지, 의태 기관이나 인면충 숙주 같은 복잡한 특성들을 어떻게 써먹을지 등등. 확인해 봐야 할 것이 많다.
그렇게 간단한 실험을 하며 이동하는 동안, 제조공장에 도달했다.
안에서는 PS-111이 길쭉한 갈고리 손톱을 이용해 누워 있는 이사벨을 만지고 있었다.
적과 싸울 때는 상대의 몸을 토막 내는 위협적인 손톱이 지금은 섬세한 수술도구가 됐다. 녀석의 날카로운 손가락들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이며 각종 기계 장치들을 조작했다. 주변에는 MPS 시리즈들이 자신들의 창조주를 돕기 위해 짧은 금속 다리를 놀리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작업에 열중하던 녀석이 내가 온 것을 감지하고 고개를 든다. 시각기관을 대체한 붉은색 카메라렌즈가 나를 향한다.
“서브컨트롤러 ‘에이모프’와 82% 유사. 누구십니까?”
“에이모프야. 알샤스를 포식하고 새 힘을 얻었어.”
“새 힘?”
녀석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MPS와 동기화해서 조종하는 것과 비슷해.”
“짧은 시간 원본과 유사한 단말기를 만든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피부 샘플 채취를 허가해주신다면 MPS 설계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확인됩니다.”
나름 흥미로운 제인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그보다 물어볼 것이 있어.”
“무엇입니까?”
“하늘의 어머니가 그러는데 조율이 끝날 때까지 30시간이 걸린다면서? 스크리머 지원선에 있는 설비라면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나눴던 얘기를 짧게 설명했다.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PS-111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크리머 지원선의 설비라면 10시간미만으로 조율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
“예. 잠시 조율을 중단하고 기가크래커의 운행에 나서겠습니다.”
“부탁해.”
“그동안 ‘동생님’의 상태를 확인 부탁드립니다.”
반은 기계인 녀석답게 뭐든 결정이 되면 행동이 빠르다. 녀석은 미니 스크리머들과 함께 배를 출발시키기 위해 제조공장을 나섰다.
‘그럼 여기서….’
“에이모프.”
인면충이나 실험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전선과 케이블이 연결된 이사벨이 어느새 눈을 뜬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깨있었네?’
PS-111이 열심히 조율 중이어서 당연히 휴면 상태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콜드블러드의 안구를 그대로 이식한 덕분에 녀석의 눈은 바다와 같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새빨간 기계 눈을 가진 쌍둥이 언니와는 정반대였다.
녀석이 파란색 눈으로 나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육신, 알샤스를 먹었구나.”
“그래.”
반응을 보니 몸이 바뀌었지만 상대의 정보를 읽는 능력은 상실하지 않았다. 눈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서 PS-111에게 눈만큼은 이식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다행히 정답이었다.
“이건 내가 이 세계로 오면서 받은 특전, ‘만상의 천안’이야. 이름처럼 눈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어.”
“역시 특전이었군.”
“이제 와서 이런 말 하기는 우습지만, 너라면 당연히 나를 죽여서라도 빼앗을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약간 남아 있다. 상대의 정보를 읽는 특전은 그만큼 매력적이니까. 다만 녀석이 살아 있는 것이 내게 더 이익이 될 거라고 판단했기에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
“네 언니, PS-111이 부탁했어. 너를 살려 달라고. 나는 그저 녀석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고.”
“알고 있었지만 역시 다르네.”
게임 속 나와 이 세계에서의 내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는지 녀석이 혼잣말을 했다.
‘보니까 대화하는 것에 크게 지장이 없어 보이네.’
긴 몸통의 일부는 분해된 상태고 머리에 전선이 다닥다닥 꽂혀 있지만, 정신 자체는 멀쩡해 보였다.
얼음 행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여기서 묻고 싶던 것들을 질문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정보를 읽는 능력이 있으니 남보다 아는 것이 많겠지?”
“응.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줄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사벨에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여태껏 만난 플레이어들, 그리고 나까지. 모두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특이한 환상을 봤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마땅한 단서도 없어서 계속 의문만 품고 있었던 환상의 비밀. 지금까지 만난 랭커들 중 환상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려 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사파이어를 닮은 두 눈으로 말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잠시 후, 침묵하던 녀석의 작은 입이 열리고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뭐?’
그리고 그 답은 내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환상이 랭커를 세뇌한다고?”
“응. 내가 봐 왔던 플레이어들은 전부 ‘기억’에 의해 사고방식의 변화를 겪었어.”
알샤스에게 환상에 대해 들었을 때 얼추 짐작했다.
환상에서 나타난 ‘현실 속 자아’ 또는 ‘이 세계에서의 자아’를 죽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쩌면 환상은 이 세계에 온 이방인들의 목줄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만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가설에 머물렀을 뿐.
그랬던 것이 이사벨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확신에 가까워져간다.
“신시아와 알샤스만 본 게 아니었군.”
“맞아. 페넬로페 언니와 함께 있었을 때와 신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 나는 여러 랭커들을 만났어. 그리고 그들이 ‘기억’ 때문에 변해가는 모습도 봤지.”
나 또한 여러 랭커들을 통해 환상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바 있다. 하나 환상을 보기 전후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른다. 하늘의 어머니의 경우, 신격화 단계가 한 번 상승했지만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내 경우는 예외적인 케이스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의외인걸.’
나도 모르는 사실을 이사벨은 알고 있었다. 정보를 읽는 특전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가 궁금해 한다는 것을 인지한 녀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기억’이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페넬로페 언니 덕분이야.”
“18위 덕분에 알았다고? 어떻게?”
“언니와 나는 사이가 좋았거든. 언니가 독립하기 전까지는 뭐든 함께 했어. 덕분에 금방 알 수 있었어. ‘기억’이 언니의 생각을 바꿔간다는 걸 말이야.”
스페이스 서바이벌은 여러 나라의 플레이어들이 참여하는 게임. 그렇다 보니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만나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안다. 기껏해야 같은 클랜, 같은 나라 출신끼리 어쩌다 한 번씩 얼굴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페넬로페와 이사벨은 예외지.’
둘은 현실에서 쌍둥이였다. 가족인데다가 사이까지 좋다면 상대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릴 터.
“분명 나와 함께 겪은 일인데 언니는 아예 다르게 기억했어.”
“기억이 바뀌었다고?”
“응. 환상을 보고 난 뒤 언니는 현실 세계에서의 삶을 왜곡된 형태로 인식했어.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으니 왜 그녀가 환상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기억’이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세뇌라고 했는지도.
‘육체가 완전히 바뀐 우리에게 기억은 자아를 지탱하는 유일한 수단이야.’
어렸을 때 넘어져서 생긴 상처,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 맺은 관계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요소들이 이 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실’에서 살아왔다는 기억만이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 상황에서 기억이 조작된다면?’
이 세계에서는 현실의 요소와 기억을 대조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다른 존재로 변해 가는 것을 입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페넬로페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지?”
“원래도 언니가 이 세계를 좋아했던 것은 맞지만 환상을 볼 때마다 집착하는 정도가 심해졌어.”
“목숨을 바쳐서라도 콜드블러드 노예를 구하려고 한 것은 그것 때문인가.”
18위 페넬로페는 스페이스 서바이벌에 유독 애정이 많은 랭커인 걸로 알고 있다. 내가 모프박이라 불리던 것처럼 그녀는 갤러곤 마니아라 불렸다. 그랬던 그녀이니 동족의 안전에 신경 쓰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 수준이 과하다는 거겠지.’
그걸 보면 환상의 목표는 인격을 완전히 바꿔서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 목표,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겠지. 이사벨의 표현대로 세뇌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하지만 왜?’
문제는 이 부분이다.
엔딩에 가까워질수록 자아가 반강제적으로 뒤바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군가가 우리를 바꾸고 싶어 하는군.”
“아마도.”
“목적이 뭐지?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나도 몰라. 다만 누가 한 짓인지는 알 것 같아.”
“우리를 이 세계로 끌어들인 존재겠지.”
이사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에 들어온 플레이어들 중 자발적으로 온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만났던 플레이어 중에서는 없었다.
나 또한 베타서비스에 참여하겠냐는 메일에 동의했다가 이곳에서 깨어났다.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우리를 바꾸려 한다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왜 서로 다른 환상을 보는 거지? 어떤 자는 이 세계의 ‘나’, 어떤 자는 현실 세계의 ‘나’가 되어 환상을 보는 것 같던데.”
“내가 수집한 정보만 봤을 때 현실 세계에서의 삶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현실 세계에서의 삶이라.”
인면충이 된 제이슨에게 물어봤을 때, 현실에서 그는 좋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 하늘의 어머니의 경우 제대로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적잖게 힘든 생활을 보냈던 것은 확실했다.
‘나도 마찬가지고.’
“너와 언니는 어땠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녀석은 살짝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앞서 언니 얘기를 했을 때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 평온하지 않았어. 언니나 나나 서로가 없었다면 버티기 쉽지 않았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