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서도 사는 생물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지.’
보다시피 화산형 행성은 굉장히 가혹한 환경을 지녔기에 서식하는 생물들의 스펙도 상당하다. 약한 생물과 강한 생물이 고루고루 섞여 있는 얼음 행성과는 많이 다르다.
그때 화산 폭발을 피해 도망치는 생물이 눈에 띄었다.
흐르는 용암을 아랑곳하지 않고 밟고 다니는 그 짐승의 이름은 불카록스. 3개의 뿔, 달구어진 청동처럼 빛나는 피부를 가진 황소처럼 생긴 육식동물이다.
행성 생태계에서 그리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운 적은 아니다. 놈의 돌진은 플라즈마 런처의 화력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막강하다.
‘지금 내 앞에서는 의미 없지만.’
나는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용암의 강을 맹렬히 질주하는 불카록스 위로 날아갔다. 놈은 자신을 덮는 그림자를 눈치채고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사냥감을 막 덮치려는 순간, 내 보조기관들이 다른 생물을 감지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용암의 강에서 의문의 습격자가 튀어나와 볼카록스를 덮쳤다.
2개의 다리와 두 갈래로 갈라진 긴 꼬리, 불가사리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입을 가진 흉측한 생물이 빠르게 불카록스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꼬리 끝에 달린 낫 형태의 뼈로 청동 황소 괴물의 목을 단번에 따버렸다.
“…….”
불카록스는 상처에서 용암처럼 걸쭉한 피를 쏟으며 그대로 용암 바닥 위에 처박혔다.
“키악! 키아악!”
능숙하게 사냥에 성공한 놈이 목을 빳빳이 들고 울부짖었다.
놈의 이름은 라바랩터.
용암 속에 숨어 움직이다가 갑자기 뛰쳐나와 먹이를 사냥하는 생물들이다. 평균 크기가 4m에서 5m 사이로 별볼일 없어 보이지만, 놈들의 무서운 점은 그 부분이 아니다.
“키악!”
“키아악!”
“키악!”
근처에서 수백 마리에 달하는 라바랩터들이 사냥에 성공한 개체의 울음소리에 회답해 울부짖는다.
라바랩터의 진가는 대규모 무리를 지어 사냥한다는 것. 많아 봐야 수십 마리가 모이는 것에 그치는 갤러곤과 달리 라바랩터 무리는 최소 백 마리 이상이다.
용암에서 튀어나온 수백의 라바랩터들이 하늘에 떠 있는 나를 경계하며 으르렁거린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흑색 대지 위에 착지했다. 거대한 내 몸이 땅에 닿은 충격으로 화산 가스와 쇄설물들이 주변으로 흩날렸다.
“키아아아악!”
불카록스를 사냥한 놈이 다시 포효하자 작은 사냥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오늘 처음 본 나를 경계하는지 포위 진영을 갖춘 채 천천히 접근했다.
‘많이 굶주렸나?’
라바랩터는 갤러곤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 지능이 높다. 자기들이 사냥할 수 없는 적에게는 함부로 달려들지 않는다. 현재 나의 몸은 라바랩터 리더와 비교해도 수십 배 가량 거대하다. 그런데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은 꽤 의외다.
‘환경에 뭔가 변화가 생긴 건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먹이가 늘어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나는 세 개의 입을 활짝 벌렸다. 수인 형태로 있던 하늘의 어머니, 아드하이가 중앙의 입에서 뛰쳐나오며 날개를 활짝 폈다. 26호는 촉수로 내 엄니를 붙잡고 나와 내 머리 위에 바로 안착했다.
「화산이 폭발하는 중에 숨어 들어오는 놈은 너 밖에 없을 거다.」
「더워」「뜨거워」
「여기는 쾅쾅 많아!」
이어서 왼쪽과 오른쪽 머리에서도 PS-111과 이사벨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용암 위로 뛰어내린 PS-111은 계속 굽히고 있던 다리들을 쭉 폈다. 똬리를 틀고 있던 이사벨은 내 주둥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바로 공중에 떠올랐다.
“에이모프 입에 실려 화산형 행성에 오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네.”
“현재 보이는 생물은 ‘불카록스’와 ‘라바랩터’로 추정됨. 극한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고도의 진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확인됩니다.”
적이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늘어나니 라바랩터들이 동요한다.
“키악!”
그러자 리더가 울음소리를 내며 동요하는 무리를 독려한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놈들이 우리를 향해 일제히 도약한다.
“200마리를 넘기는 걸 보니 꽤 큰 무리야.”
“연구할 가치가 있는 생물입니다.”
「…도착하자마자 싸움이라니.」
「사냥」「재밌어」
「밥이다! 밥!」
200여 마리의 라바랩터라면 긴 여정동안의 굶주림을 달래는데 부족함이 없을 터.
멋모르고 달려드는 간식들을 정리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화산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아스카44는 행성 특유의 환경만큼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컬트 제국의 황제가 갑자기 미쳐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황제는 유능한 의원과 제사장들을 숙청하고, 컬트들이 섬기는 섭리를 모욕했다. 그 와중에 황제를 숭상하는 신흥 파벌이 의회를 점거하는 바람에 제국은 거의 분열된 상태였다.
가뜩이나 부패로 인해 죽어 가던 제국은 미친 황제 때문에 세가 크게 기울었다. 수많은 컬트들이 실망스러운 고국을 떠나 메가콥으로 이주했고, 막대한 부가 다른 열강들로 유출되었다.
미친 황제의 지배는 5년간 이어지다가 끝이 났다. 별궁에서 매일 수십 명의 노예들과 난교를 벌이던 황제는 제국의 마지막 충신들의 손에 의해 암살되었다.
특이하게도 당시 암살자들 중 컬트 출신 스페이스독도 있었다. 그가 암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컬트들의 동화, ‘폭군을 시해한 해적대왕의 전설’은 이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친 황제의 이야기와 극한의 환경을 가진 아스카44가 무슨 상관일까?
그건 바로 아스카44가 바로 황제가 자신의 숭배자들을 지원할 비자금을 보관한 장소라는 점이다. 황궁에 있던 보물, 황제 개인이 축적한 부의 일부가 그곳에 숨겨져 있다.
황제가 암살된 이후 황제파도 완전히 와해되면서 아스카44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 한 젊은 컬트가 찾아오기 전에는 말이다.
황궁 이상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방.
마스티프의 머리를 가진 볼프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있는 건물에는 중력 조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용암 위에 떠 있었다. 외벽은 겹겹이 겹쳐진 실드로 보호받는 중이었다.
컬트 황제가 남긴 유산에서 밖을 구경하는 볼프, 그는 이 별의 관리자였다.
“살만님. 새 화물이 준비되었습니다.”
문가에 선 시종이 부르자 마스티프 머리의 볼프, 살만이 고개를 돌렸다.
“운반할 자들도 모두 준비됐나?”
“예.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자들로 준비했습니다.”
“좋아.”
살만은 시종과 함께 방을 나섰다.
값비싼 명화(名畵)로 꾸며진 복도를 지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그곳은 화려한 것을 넘어 사치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다른 시설과 다르게 그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기계 장치라고는 오직 벽면에 달린 전등, 그리고 천장을 대신하는 돔 형태의 게이트뿐이었다.
풍경만 봤을 때 우주선이 정박하는 장소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간 중앙에 있는 것은 우주선과 거리가 멀었다. 화산을 옮겨 온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바위산이 그곳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 덩어리 앞에 한 마리의 생물이 쓰러져 있었다.
고슴도치를 닮은 외형에 피 대신 용암을 토해내는 그 생물의 이름은 엘리멘탈호저. 이 행성에 서식하는 에이펙스 생물 중 하나다.
살만은 시종이 건넨 길쭉한 창을 들고 엘리멘탈호저에게 다가갔다. 크기만 13m에 달하는 거대한 육식성 고슴도치는 눈을 크게 뜨고 자기보다 한참 작은 볼프를 노려봤다.
엘리멘탈호저에게 다가간 살만은 말없이 창으로 놈을 가볍게 찔렀다.
“구우우우.”
작게 으르렁거리는 괴물. 살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까이 가 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방금까지 적대감을 표하던 엘리멘탈호저는 갑자기 몸을 옆으로 눕더니 살만에게 배를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애교 섞인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주인을 본 애완견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사실을 놀라워하지 않았다.
“됐군. 대충 큰 부상만 치료하고 ‘여제’에게 보내라.”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그마사우르는 발견됐나?”
“현재 활동 중인 화산 다섯 곳이 마그마사우르의 움직임으로 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좋아. 모든 인력을 마그마사우르 추적에 투입해라.”
“알겠습니다.”
시종에게 엘리멘탈 호저의 처리를 맡긴 살만은 바위산을 흘낏 쳐다봤다.
“아. 그리고 녀석에게도 먹이를 주는 것, 잊지 마라.”
“옙.”
그 말과 함께 살만은 그곳을 떠났다.
다른 하인들이 들어와 엘리멘탈 호저를 옮기는 동안에도 바위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맛있다!」
「맛」「자극적」
낯선 풍경의 행성에서 오랜만에 만찬이 열렸다.
몸을 크게 키운 26호가 촉수들을 빼서 라바랩터를 쓸어 담았고, 아드하이는 입 대신 달린 촉수다발을 먹이에 꽂아 피를 쭉쭉 빨아들였다.
아드하이의 고향에서 떠난 이후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지 못해서 그런지 다들 포식하는데 집중했다.
심지어 야생 동물을 포식하는 것에 소극적인 하늘의 어머니도 라바랩터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라바랩터를 토막낸 뒤, 제사장의 황금창에 고기 조각을 꽂았다. 그리고 이를 흐르는 용암 위에 대서 그 열기로 고기를 구웠다.
고기 표면이 바싹 익고, 살점 사이에 낀 지방이 녹아 흘러내릴 때쯤 그녀는 창을 거둬서 고기를 먹었다.
「뭐? 왜?」
[즈즈즈즈 즈즈즈(아무 것도 아니야)]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기름이 잔뜩 묻은 부리를 새침하게 닦았다. 잘 먹어서 보기 좋다고 하려다가 관뒀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장시간 동안 쉬지 않고 초광속 항해를 한 덕분에 제법 배가 고픈 상태였다. 오다가 해적선을 털어먹긴 했지만, 그걸로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용의 심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허기까지 해결되지는 않았다.
‘게임에서는 이런 거 신경 안 써도 됐는데 말이지.’
「중간애기야, 그거 맛있어?」
「응? 하나 줄까?」
「응응!」
「여기.」
하늘의 어머니가 고기 한 점을 빼서 26호의 촉수에 건넸다. 녀석은 촉수를 몸쪽으로 끌어당겨 고기와 함께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환하게 빛냈다.
「더 맛있다!」
「그거」「맛있어?」
「응!」
「친구」「나도」
「언제는 못생긴 친구라며.」
「부정」「예쁜 친구」
「이제는 안 속아요. 저리 가세요.」
「치사해」「치사해」「치사해」
다들 즐겁게 식사하는 것을 보며 나도 라바랩터 시체를 입 속에 툭 던져 넣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독특한 풍미를 담은 피가 혓바닥을 적셨다. 양념하지 않은 생고기인데도 알싸한 매운맛이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직화로 구운 양고기에 쿠민 가루를 적당히 친 것 같은 맛이다.
‘씹는 느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양고기보다는 훨씬 부드럽네.’
양고기보다는 레어로 익힌 쇠고기에 가까운 식감이라 사실 꽤 차이가 났다. 물론 맛 자체가 좋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추가로 특성까지 얻었고.’
수십 마리의 라바랩터를 먹다 보니 특성 하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놈들의 생물학적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잘 발달된 뒷다리다. 라바랩터의 강점 중 하나가 내 몸에 흡수되었다.
‘강화 뒷다리라.’
이름 그대로 뒷다리의 성능을 향상시켜 주는 특성이다.
‘강화 뒷다리’가 적용되면서 내 다리의 근육량은 이전보다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다리 내부에 혈관 말고 새로운 생체관이 추가되었다. 달리거나 위로 뛰어오를 때마다 특수한 액체가 이 관을 통해 흐르면서 다리 근육의 부담을 줄여준다.
내부 구조가 변한 것에 맞춰 다리 자체의 굵기도 전보다 굵어졌다. 원래도 두 발로 설 수 있는 체형이었지만, 이제는 한층 더 안정적으로 설 수 있게 됐다.
‘엄청 필요한 특성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겠지.’
사실 내가 이 행성에서 획득하기를 원하는 특성은 다른 놈한테 얻을 수 있다.
바로 화산형 행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강의 에이펙스 생물, ‘마그마사우르’.
신체에서 끊임없이 마그마와 불을 내뿜는 초거대 괴수로 에이펙스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분류된다.
재밌는 점은 놈은 막강한 힘을 지닌 것과 별개로 육식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용암과 화산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를 먹는다. 에이펙스 생물 중 육식하지 않는 개체는 그리 많지 않은데, 놈이 그 중 하나다.
‘물론 고기를 안 먹는다고 약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야.’
마그마사우르는 화산의 심부에서만 서식하기에 사냥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또한 놈 자체도 독특한 고유 능력을 지녔기에 상대하기가 심히 까다롭다. 게임에서 나도 혼자 잡기 위해 꽤 애를 먹었을 정도다.
‘뭐 그건 게임 속 얘기고. 여기서는 달라.’
현재 나는 게임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지녔다. 나 자체의 스펙도 상당한 수준이고 나를 도와줄 친구들도 많다.
‘문제는 놈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화산 심부에서 외부로 거의 나오지 않는 놈의 특성상 이쪽에서 직접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화산이 굉장히 많다. 마그마사우르를 잡기 위해 일일이 들어갔다가 나오려면 시간이 적지 않게 소모되리라.
‘놈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