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애! 혼내줄 거야!」
분노한 씨 데몬이 전력으로 사이킥 파워를 전개한다. 반경 수백m, 아니 수km 이상에 달하는 땅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26호가 사이킥 파워를 퍼뜨리는 동안, 하늘의 어머니도 행동을 개시했다. 땅 아래까지 스며든 마노색 입자를 통해 압력을 조절하는 권능을 행사한 거다.
이전까지 정신없이 분출되던 가스가 곧바로 멈추고, 액상화된 땅이 급격히 굳어졌다.
겉만 봤을 때는 환경 전체가 안정화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농도 사이킥 파워에 의해 지표가 꽉 붙잡혀 있는 사이, 저 아래에서는 저 신성한 그리폰의 권능 때문에 압력이 마구 널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으으으!」
「에이모프! 이 이상 버티기 힘들어!」
[즈즈즈 즈즈즈(조금만 기다려)]
몇 분 지나자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보조기관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드래드송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놈은 위에서 짓누르는 사이킥 파워와 땅 속에서 날뛰고 있는 입자들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다.
[즈즈(됐어)]
내가 파장을 흘리자마자 26호가 바로 사이킥 파워를 해방했다.
그러자 우리 앞에 검은 벽이 생겼다.
그건 이 행성의 지반이었다. 아래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깨진 지반이 일순간 해방되며 위로 튀어 오른 거다.
「적」「발견!」
그리고 날아가는 파편 중에는 드래드송도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놈은 아무 대응도 못하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걸 본 아드하이가 놈을 요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나 그보다 더 빠르게 치고 나간 녀석이 있었다.
길쭉한 몸통을 가진 이사벨은 하늘에 떠 있는 표적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표적들을 모두 들이받아 부순 녀석은 자기 이상으로 커다란 드래드송을 수많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됐어.’
일단 이사벨이 놈을 붙잡았으니 작전은 성공이다.
이제 안심하려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앞발로 나를 툭툭 쳤다.
「저 날아간 파편들 말이야.」
[즈(응?)]
「…곧 떨어질 것 같은데.」
수십km 높이까지 날아간 지반의 조각들. 그것들이 곧 암석의 비가 되어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
“살만님, 화물이 출발했습니다. 도착 예정일은 7일 후입니다.”
“그래.”
식사 중 시종장이 건넨 말을 들은 살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니 계속 연락을 취하라.”
“알겠습니다.”
주인의 명령에 시종장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살만은 다시 접시에 담긴 고기를 나이프로 썰었다. 그가 지배한 짐승인 불카록스의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였다. 커다란 몸의 청동 황소를 도축해도 먹을 수 있는 부위는 접시 하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포크로 귀한 고기 한 점을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육질이 좀 질기다는 점은 단점이나 풍미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아주 비싼 향신료까지 듬뿍 쳤기에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에 살 때 온갖 귀한 음식을 먹고 자란 그의 혀를 만족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쯧.’
이곳에는 샤프란과 바닐라를 듬뿍 친 아이스크림도, 그가 소유한 농장에서 공수한 이베리코 하몽도 없다. 그 사실이 그를 힘들게 했다.
‘다들 참 대단해. 몇 년 안 지낸 나도 이렇게 힘든데 그 긴 세월 동안 어떻게 버텼지?’
그가 이 세계에서 지낸 시간은 겨우 3년. 그런데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그보다 오래 산 멤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살만은 새삼 감탄하며 컬트식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고기는 그저 그랬지만 와인은 라즈베리 비슷한 향이 나서 먹을 만했다.
그렇게 적당히 식사를 끝마치려던 그때, 기묘한 감각이 그를 덮쳤다. 따뜻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뒷목에 찬바람을 쐰 것 같은 서늘함. 그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잘 안다.
그건 살만이 지배한 동물 중 하나가 위험을 감지했을 때 보내는 신호였다.
‘불카록스?’
아스카44는 타행성과 다른 종류의 감시 시스템이 존재한다. 온갖 종류의 동물을 지배하는 살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행성 곳곳에 자신이 지배하는 동물들을 뿌려 놨다. 살아 움직이는 감시카메라들이 돌아다니며 침입자가 있는지 감시 중이다.
그리고 그 동물들이 침입자를 발견하면 살만에게 신호가 간다.
지금처럼 말이다.
‘누구지?’
불카록스가 보낸 신호에 따르면,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 생물이 드래드송의 영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살만이 강적과는 싸우지 말라고 미리 명령해놨기에 놈은 수수께끼의 괴수를 피해 도망쳤다.
‘칫, 시야 연동은 피곤해서 일부러 안 해놨더니.’
살만이 받은 특전, ‘야수신의 올가미’는 지배한 괴물과 신체 기능을 연동할 수 있다. 다만 연결됐을 때 제약이 많다 보니 자주 사용하는 기능은 아니었다.
다만 이전에도 그가 지배한 생물들이 엉터리로 보고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지배해서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야생동물들의 낮은 지능까지 개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의 접시 위에 올라간 불카록스도 잘못된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봐야겠군.’
살만은 손짓으로 시종장을 불렀다.
“함선을 보내 드래드송의 영역을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멍청한 불카록스가 저지른 실수일 거로 생각하며 그는 남은 와인을 마저 비웠다.
-
[즈즈 즈즈즈(다들 괜찮아?)]
「휴, 깔려 죽는 줄 알았네.」
「난 괜찮아!」
“꼬리의 11%가 손상된 것을 제외하고 문제없습니다.”
나는 세 개의 머리들과 침식촉수 6개를 활용해 등 위에 쌓인 암석들을 치웠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지반의 파편들은 고스란히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바위의 비를 보자마자 나는 여러 개의 팔로 애들을 붙잡고 달렸다.
26호와 하늘의 어머니가 힘을 합쳐 만든 대폭발의 범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만약 ‘강화 뒷다리’ 특성이 없었다면 쏟아지는 암석들에 깔렸을 거다.
저 정도 타격으로 내가 피해를 입을 일은 없으나 애들은 아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하늘의 어머니나 PS-111가 부상을 입었으리라.
‘실제로 PS-111은 다쳤고.’
달리던 중 녀석의 꼬리가 쏟아지는 바위와 용암에 맞아 약간 손상되었다. 꼬리 끝부분에 달린 데몰리셔는 다행히 손상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즈즈즈 즈즈즈즈(치료할 수 있겠어?)]
“적절한 유기물이 있다면 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녀석은 머리를 위쪽으로 향했다.
사냥감을 붙잡은 이사벨이 하강 중이었다. 녀석은 몸에 달린 수십 개의 팔을 커다란 두꺼비 괴물의 몸에 박아 넣고 있었다.
드래드송이 발버둥을 칠 때마다 팔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아마 날카로운 손톱으로 놈의 몸속을 찢어발기는 거겠지.
「나」「먼저」「발견」「새치기」「치사해」
“새치기라니. 먼저 발견한 것보다 먼저 손에 넣는 것이 중요해.”
「부정」「예쁜아이」「실망」「실망!」
“뭐든지 방심하면 지금처럼 뺏기는 거야.”
뒤에서는 아드하이가 불만 가득한 사념을 쏟아 내며 따라붙었다. 물론 이사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둘이 내려왔을 때쯤, 드래드송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가 됐다. 이사벨은 괴물을 든 채 내게 다가왔다.
“특성을 얻으려면 네가 죽여야 하지? 여기서도 그래?”
고개를 끄덕이니 녀석은 군말없이 내게 전리품을 넘겼다.
콜드블러드의 경우, 상급 계약을 해금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 중에는 에이펙스 사냥도 포함되어 있다.
‘드래드송은 안 잡아도 되지만.’
놈 또한 에이펙스다만, 콜드블러드가 잡아야 하는 목표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면 이제 몸이 바뀌어서 상관없으려나?’
어느 쪽이든 녀석에게는 드래드송의 육신이 불필요하다.
나는 새 유전자 정수를 포식하기 위해 준비했다. 포식시 특성 획득 확률을 높여주는 ‘사냥의 표상’ 말이다.
특성 효과가 발동되고 내 육신이 변화한다.
중앙의 머리에 달린 눈 위로 갑각이 덮이면서 시야가 암전했다. 그 대신 보조기관이 훨씬 강화되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생생히 느껴졌다. 각각의 머리들에서 두 번째 턱, 인두 턱(咽頭顎)이 튀어나왔고, 머리를 덮는 갑각과 뿔은 더 두터워졌다.
구조가 아예 바뀌는 것은 머리만이 아니었다. 몸 크기도 이전에 비해 2배가 되었고, 허리 부근에서는 새로운 뼈 낫 팔이 튀어나왔다.
“이건…?”
「아, 그러고 보니 이사벨은 이번에 처음 보는 건가?」
내 모습이 갑자기 변하자 녀석이 눈을 크게 떴다. 옆에서는 하늘의 어머니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으로 변하면 유전자 정수의 습득 확률이 올라간다더라.」
“…뭐? 그럼 사기 아냐?”
「뭐 아무 때나 변신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여러 제한도 있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사벨. 에이모프인데 사기라는 소리를 다 듣다니, 격세지감이었다.
변신을 끝마친 나는 이사벨이 준 드래드송을 집어 들었다. 몸이 100m를 훌쩍 넘기다 보니 이 초대형 육식성 두꺼비도 햄버거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심해서 먹어야겠네.’
놈의 시체는 쓸 데가 많다. 실수로 머리 말고 다른 부위까지 다 먹어버리면 곤란하다. 나는 이중 턱을 내밀어 놈의 넙데데한 머리를 깨물었다. 놈의 두개골이 으깨지고 안에서 진득한 액체와 살점, 뇌가 흘러나왔다.
‘이건 또 맛이 특이하네?’
놈의 뇌에서는 전에 인도 음식점에 가서 먹었던 커리 맛이 났다. 기분 좋게 혀를 자극시키는 매운맛이 먼저 뇌리를 강타하고, 뒤이어 기름기 있는 살점이 그 맛을 중화시켜줬다.
라바랩터를 먹었을 때도 살짝 매운 맛이 났었는데, 아무래도 용암과 각종 산성 물질이 뒤섞여서 이런 풍미를 내는 듯싶다.
‘더 먹고 싶지만….’
기다리는 애들이 있으니 그럴 수는 없겠지.
나는 머리가 사라진 에이펙스를 땅에 내려놓았다. 수인 형태로 돌아온 하늘의 어머니가 먼저 나섰다. 그녀는 제사장의 황금창으로 드래드송의 외피를 벗기기 시작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이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꽁무니 부근을 맡아줘.」
“알겠습니다.”
녀석들이 시신을 갖고 작업하는 동안, 나는 씹고 있던 것들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기대하던 텍스트박스가 뜨길 기다렸다.
‘응?’
에이모프 특유의 뛰어난 소화력 덕분에 드래드송의 고기는 금방 에너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포식 성공을 알리는 텍스트박스는 뜨지 않았다.
‘뭐야? 설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얼어붙은 행성에서 크리스털윙 부부를 잡을 때 한 마리한테서만 포식 효과가 떴다.
사냥의 표상은 포식 성공 확률을 대폭 증가시켜 줄 뿐, 무조건 특성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잡아서 좋아했는데, 이런 결과물이 나올 줄이야.
「응? 에이모프, 혹시 또 안 뜬 거야?」
가죽을 거의 다 벗긴 그녀는 내가 그대로인 것을 보고 당황해했다.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사기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구나.”
안타까워하는 이사벨의 반응이 한층 뼈아프게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새로 찾아볼래?」
[즈즈즈즈(힘들겠지)]
게다가 기껏 변신했는데 사냥의 표상을 아깝게 날려 버린 것도 꽤 아쉬웠다. 하늘의 어머니 말대로 새 드래드송을 더 찾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쉽지 않다. 땅속에 숨어 다니는 놈을 제한 시간 내에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단념하려던 찰나, 조용히 가죽을 벗기던 PS-111이 입을 열었다.
“비행선에서 이 행성에 서식하는 드래드송의 생태 정보를 전부 입수했습니다. 해당 개체를 포함해 총 3마리의 개체가 감시를 받는 중입니다.”
[즈(뭐?)]
“원하신다면 남은 2마리의 위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평소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PS-111.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몹시도 따뜻하게 들렸다. 마치 천사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놈의 위치부터 말해줘)]
예상치 못한 구세주가 나타난 지 19분 후.
사냥의 표상이 끝나기까지 정확히 2초를 남긴 시점에 나는 드래드송을 포식하는데 성공했다.
「포식 효과 발동! ‘지옥의 환영’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드래드송’의 생물 특성 중 ‘지옥의 환영’을 탈취.」
「‘지옥의 환영’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아슬아슬했네.’
텍스트박스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사냥의 표상’이 끝났기 때문이다. 거대화된 몸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여기저기 변한 부위도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