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때? 이번에는 성공했어?」
“다음 개체로 이동합니까?”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괜찮아. 이걸로 충분해)]
특성도 확보했고, 하늘의 어머니한테 필요한 재료도 구했으니 굳이 더 잡으러 갈 필요는 없다.
‘게다가 마침 좋은 특성도 얻었고.’
텍스트박스가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특성 수락을 선택하자 텍스트박스가 사라지고, 소화된 유전자 정수가 몸에 고루고루 퍼졌다.
내 몸을 근본적으로 바꿔줄 정수의 흐름이 도달한 곳은 생체 파이프였다.
에이모프가 성체로 성장하면 몸 여기저기에 길고 짧은 파이프들이 생긴다. 이 생체 파이프들은 초능력 관련 융합 특성인 ‘암흑 장막’처럼 특수한 화학 물질을 분비할 때 사용된다.
드래드송의 유전자 정수가 적용되자 파이프가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색이던 것이 어두운 빨강색으로 물들었고, 특유의 바이오 메카니컬한 형태 위에 용암이 굳은 것처럼 투박하게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파이프가 돋아난 부위, 그러니까 내 전신을 덮고 있는 외피에도 어두운 붉은색의 줄기 무늬가 생겼다. 마치 화산에서 흘러나와 굳기 시작한 용암처럼 말이다.
그동안 날개와 머리 갑각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가 전부 검은색이어서 약간 심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데 몸 곳곳에 포인트를 주니 확실히 더 인상적으로 변했다.
「큰어른」「별의 색」「비슷해」「강해 보여」
아드하이는 발목을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리고 주둥이에 달린 촉수다발로 자신의 붉은 날개를 가리켰다. 내가 자신과 비슷해 마음에 드나 보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보여 줄까.’
생체 파이프의 변이가 모두 끝났으니 이제 실험해 볼 차례다.
이 특성은 크게 두 가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보면 된다.
‘우선 첫 번째.’
체내에서 생성된 화학 물질을 생체 파이프로 내뿜는다.
모든 파이프들이 회색의 액체를 허공에 분사했다. 분무기로 뿌린 물처럼 바닥과 내 외피에 묻은 액체들은 빠르게 기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래드송의 서식지에 깔린 황산 안개를 연상시키는 잿빛 가스가 내 몸을 휘감았다.
가스를 구성하는 물질이 강산성을 띠다 보니 내가 접근한 것만으로도 다른 장비나 건물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산성피’나 ‘산성 진균샘’ 같은 특성을 가스 형태로 뿌리는 거라 보면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지옥의 환영’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터.
[즈즈 즈즈즈(모두 물러나)]
지금까지가 1단계. 나는 애들과 거리를 벌렸다. 이 다음부터는 애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2단계.’
나는 몸에 가스를 두른 채 입을 벌려 이빨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자 불꽃이 튀며 가스에 옮겨 붙었다. 순식간에 내 전신이 거대한 화염에 뒤덮이고, 체내의 온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잿빛 가스를 구성하는 이 강산성 물질은 인화점도 아주 낮아서 불이 잘 붙는다. 화염의 온도 또한 굉장히 높게 올라가기에 작은 총탄 정도는 내 몸에 닿기도 전에 소멸시킬 수 있다.
지옥의 환영이라는 이름답게 나 자신이 끝없는 화염에 타오르는 괴수가 되는 거다.
‘원본이 가진 힘과 많이 달라지는 특성이지.’
드래드송의 경우, 자연적으로 형성된 가스와 폭발성 물질을 들이마셔서 강한 폭발을 일으킨다. 반면, 지옥의 환영은 스스로 독성 가스를 만들어 내는 대신, 그 파괴력이나 공격적인 면모가 약화된 형태라 보면 된다.
‘지금 이 상태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야.’
몸에 불을 두르는 특성이다 보니 육탄전에 특화된 적과 싸울 때 유용하다.
작고 약한 적은 말할 것도 없고, 중장갑을 두르거나 높은 방어력을 지닌 적과 싸울 때도 쓸모가 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근접한 적에게 지속해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방어력을 지닌 적이라도 산성 가스와 고온의 화염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높은 수준의 방열 효과는 덤이고.’
지옥의 환영이 적용되면서 내 외피의 방열 효과가 크게 상승했다. 불 때문에 내 내장과 살점이 익을 우려는 없다. 마그마사우르 같이 화산형 행성에 서식하는 괴물들과 싸울 때도 유용하다.
「큰애기 이글이글 뜨거워.」
「큰 별」「힘」「살짝」「느껴져」
“가스의 구성 성분을 분석하니 산성 물질과 인화성 물질이 섞여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물질과 접촉시 발화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활활 타오르는 내 몸을 보고 녀석들이 흥미로워한다.
“그걸 보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네.”
「전에 있었던 일? 아, 아아!」
“서아 언니도 아나 보네. ‘우주 폭탄마’.”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그것 때문에 요새 갖고 있는 애들은 에이모프만 보면 치를 떨잖아.」
하늘의 어머니와 이사벨은 나를 보고 옛날 일이 떠오른 건지,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우주 폭탄마라.’
예전에 게임에 열중할 때 잠깐 그렇게 불린 적이 있었지.
여기서는 성체가 된 다음 이 특성을 얻었지만, 게임에서는 준성체 시절에 얻었다. 당시 나는 우주요새에 어떻게든 잠입하면 바로 산소 공급 시설로 뛰어갔다.
‘그리고 빛이 되었지.’
밀폐된 공간, 다량의 산소, 그리고 인화성 물질로 이루어진 가스까지. 자폭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다. 요새를 터뜨리면 유전자 정수를 얻을 수 없지만, 당시 나는 적에게 공포를 안겨 주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좀 너무했지.’
폭탄테러에 재미가 들려 좋은 유전자 정수를 날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후 유일 특성을 얻은 뒤에는 자폭을 자제했지만, 그 전까지는 많은 플레이어들이 나 때문에 요새를 날려먹고 게임을 접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해금했던 유일 특성 합성식이 있었지?’
볼텍스원을 죽이고 해금한 합성식 말고 딱 하나, 한참 전 해금해둔 합성식이 있다. 이번에 얻은 지옥의 환영 특성이 그 합성식의 재료 중 하나였다.
‘자리부터 옮기고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특성을 해제하려고 마음먹자 몸에 있는 파이프들이 잠겼다. 거칠게 타오르던 화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안전한 곳으로 가자)]
「어디로 가려고?」
“오던 길에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했습니다. 입구의 구조상 지하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애들을 태우고 PS-111의 안내를 따라 구덩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황량한 검은 땅 위를 날아 왔던 길로 되돌아가다 보니 아주 큰 구덩이가 보였다. 너비는 구축함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또한 날면서 내려다 봐도 바닥이 안 보이는 걸 보니 깊이도 꽤 되는 듯했다.
‘안에 용암은 없나 보네.’
수증기나 가스가 피어오르지 않고 세찬 바람 소리만 들리니 말이다.
나는 아래로 강하해서 구덩이 안으로 진입했다.
입구를 봤을 때 넓다고 짐작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내부에는 작은 터널 같은 것이 여기저기 뚫려 있고, 형태도 상당히 복잡했다.
그걸 보니 용암과 가스가 차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공간 같았다. 세월이 흐르며 내용물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밖으로 분출되면서 이처럼 거대한 지물을 남긴 것이리라.
밑바닥에 도착하니 용암이 빠져나간 통로가 보였다. 내가 들어가 숨어도 될 정도로 입구가 상당히 컸다.
‘저기 숨어야겠다.’
나는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진 자연 터널에 기어들어갔다. 그 안에는 나갈 길을 찾지 못해 죽은 여러 동물들의 시체가 있었다.
‘마침 적당한 먹을거리도 있고.’
내 등에서 내린 애들은 말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음식을 챙겼다.
「이거 있으면 친구 낫는 거야?」
“꼬리 수리에 사용하기 유용해 보이는 유기물입니다.”「나도 도와줄게. 뭐가 필요하지?」
「먹이」「퍽퍽해」
“내가 구워줄까?”
「거절」「그 방법」「식사」「불편해」
애들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고 말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디 그럼….’
나는 편히 누운 채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확인했다.
「‘초월’ 재료 목록: 무기물 소화, 수확자의 아가리, 뼈 야수, 지옥의 환영, 울트라 컨트롤(획득되지 않음)」
「‘초월’ 재료 목록(신규!): 악마 기계, 타이런트로이드, 확인되지 않음, 확인되지 않음, 확인되지 않음」
‘원래는 여기서 두 번째 융합식 때문에 여기 온 건데.’
‘고뇌의 고리’를 포식하고 뜬 불완전 특성, ‘악마 기계’를 보고 에이펙스 생물 사냥이 단서가 될 거라 판단해서 여기에 왔다.
‘원래는 마그마사우르랑 다른 상급 에이펙스 생물을 노리려던 거였으니까.’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드래드송을 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지옥의 환영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건 사슴뿔 컬트로부터 얻을 수 있는 특성, ‘울트라 컨트롤’ 뿐이다.
‘다만 문제가 있어.’
첫 번째 융합식을 해금한 시점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강력한 에이펙스 생물 ‘고르곤 스웜’을 잡으러 다닐 때 얻었던 ‘무기물 소화’가 키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신경을 꺼두고 있었는가? 그 이유는 여러 재료 중 하나, ‘수확자의 아가리’를 다시 얻기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육체 관련 융합 특성 수확자의 아가리는 에이모프 준성체, 또는 특수한 아웃스페이서만이 지니고 있는 ‘정수수확자의 턱’을 합성해서 만든다. 만약 수확자의 아가리를 재료로 써버리면 머리만 섭취해서 유전자 정수를 얻는 능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융합식을 열었을 당시만 해도 준성체였으니까 고려할 여지가 없었지.’
다른 재료인 ‘무기물 소화’나 ‘뼈 야수’도 구하기 쉬운 특성은 아니다. 우주요새 ‘케샤 아르마’에서 대량의 유전자 정수를 수집할 때도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하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한데 지금은 여건이 달라졌어.’
성체가 된 나는 일부러 다른 생물의 머리만 노리기 힘들 정도로 몸이 거대해졌다. 지금의 나보다 거대한 생물은 그리 많지 않다. 어지간한 생물은 한입에 삼키거나 짧은 시간 안에 먹어 치울 수 있다.
따라서 적을 통째로 먹어야 한다는 리스크가 줄어들었다고 봐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생각을 살짝 바꾸면 또 그렇지가 않다.
‘볼텍스원 같은 놈들과 싸울 때도 신체 전부를 먹어 치워야 하면 번거롭지.’
수확자의 아가리가 없으면 전투 중 포식을 통해 특성을 획득하는 것이 까다로워진다. 한입에 삼켜지는 적이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덩치가 있는 생물이라도 일일이 고기를 다 섭취해야만 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도 어려워지겠지.’
나는 오순도순 먹이를 나눠 먹는 26호와 아드하이를 바라봤다. 녀석들은 게임이었다면 절대 먹을 리 없는 먹이를 포식했다. 그 덕분에 둘 다 새로운 힘을 얻었고.
녀석들 말고 쌍둥이 자매, 하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강해지려면 에이펙스 생물의 육신이 필요하다.
내가 전부 다 먹어 버리면 모두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된다.
‘예전이었으면 이런 생각은 전혀 안 했을 텐데.’
게임에서든, 게임 밖 현실에서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스페이스 서바이벌 속에서는 모든 존재를 먹잇감으로 봤다. 현실에서는 그 누구와도 깊게 교류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저 작은 괴물들에게 정을 느끼고 양보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많이 변한 듯싶다.
‘…뭐, 이 방법이 생존에 더 유리하니까.’
일단 첫 번째 융합식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봉인해야겠다. 어차피 이 행성에서는 울트라 컨트롤도 구하기 쉽지 않을 터.
아스카44에 오기로 마음먹었던 것처럼 두 번째 융합식에 집중하자.
‘여태껏 융합식 재료 중에 중복된 경우는 없었어.’
두 번째 융합식의 확인되지 않은 재료들 중 지옥의 환영은 빼야겠다. 마그마사우르는 기생충에 감염된 연구원들이 부지런히 찾고 있으니 시간이 더 걸릴 거고.
‘이 다음 노릴 만한 적이….’
먹을 가치가 있는 생물, 몇 종류가 떠오른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계속 생각했다.
-
“뭐? 지진으로 드래드송의 서식지가 파괴되었다고?”
탐사대로부터 날아온 통신에 살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산 활동이 활발한 아스카44에서 지진은 그리 특별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가 머무는 건물에 중력 조절 장치에 설치된 것도 지진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살만도 그 사실을 알지만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교활한 것으로 악명 높은 드래드송이다. 놈들은 절대 지진이 일어나는 곳을 서식지로 삼지 않아.’
설령 영역 싸움에서 패배해 어쩔 수 없이 지진이 잦은 곳에 산다고 쳐도 문제다. 놈들은 땅 속에 살기에 지진을 누구보다 빠르게 예측한다. 지진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면 미리 안전한 지역으로 피한다.
‘하나 그런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드래드송이 영역을 옮겼다면 행성 전역에 깔린 그의 눈들이 보지 못했을 리 없다.
‘…불카록스, 놈이 그랬지. 알 수 없는 거대 생물이 드래드송 영역 근처에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온갖 흉악한 야수들을 포식하고 그들의 힘을 취하는 존재 말이다. ‘그놈’이 이곳에 왔다면 필시 드래드송부터 찾으러 다닐 것이다.
‘설마?’
살만은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고 명령을 내렸다.
“현재까지 확인된 드래드송의 영역을 모두 확인해라. 만약 수상한 생물과 조우할 시, 즉시 보고하라.”
「알겠습니다.」
통신을 종료한 그는 바로 서랍을 열었다.
‘만약 놈이 이곳에 있다면….’
아직 놈이 진짜 이곳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놈의 악명을 생각한다면 살만 혼자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여기서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