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선생님. 아빠는요?”
“오늘은 못 오신대. 그러니까 누나랑 놀자.”
“오늘도?”
“■■도 알다시피 워낙 바쁘신 분이잖니.”
“응.”
“엄마?”
“우리 귀염둥이가 좋아하는 피자 사왔거든? 같이 먹을까?”
“응.”
“아, 카메라는 신경 쓰지 마렴. 별거 아니니까. 어휴, 이거 맛있겠다. 그치?”
“응.”
“그 방송, 도대체 언제 찍은 거야?”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너 미쳤어? 애 갖고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인데?”
“그러는 너는? 처음에만 관심 갖고 제대로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크흠, 나도 바쁜 몸이야. 매일같이 병원에 들락날락 거릴 수 없다고.”
“하긴 쥐꼬리만큼 버는 돈으로는 그러시겠지.”
“허. 그 쥐꼬리만한 돈도 못 벌어서 애 팔아먹는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누가 애를 팔아먹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내가 어떤 마음으로….”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그 날 아빠와 함께 차에 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이질적인 뭔가를 잡아냈다. 얕게 잠들어 있던 신체가 서서히 깨어났다. 몸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용암의 뜨거운 열기도 다시금 느껴졌다.
펄펄 끓어오르는 마그마 속에 오랜 시간 몸을 담그고 있어서 그런 걸까? 잠깐 잠든 사이 꿈을 꿨다.
‘재미없는 기억이지.’
나는 어렸을 때 사고를 당한 뒤, 오랜 기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몸의 절반 이상이 화상을 입은 바람에 여러 치료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용암 호수 속에서 잠이 들 줄이야.’
어른이 된 이후에는 좀 나아졌지만, 그 전까지는 사고의 트라우마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오죽하면 영화를 볼 때 라이터로 불을 키는 장면만 봐도 몸이 굳을 지경이었을까.
‘에이모프가 돼서 괜찮아진 거라면 확실히 장점이네.’
강인한 육체가 나의 정신적 아픔까지 치료해주니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입 안에서 파장이 날아왔다.
「큰애기야, 괜찮아?」
[즈즈(응?)]
「기분 안 좋아?」
중앙 머리의 입 안에 있는 26호가 보낸 파장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꿈을 꾸는 동안 나의 감정을 느꼈나 보다.
[즈즈즈 즈즈즈즈즈(지금은 괜찮아졌어)]
「진짜?」
「열」「기분」「안 좋아」
[즈즈즈 즈 즈즈 즈즈즈(걱정 마. 곧 나갈 거니까)]
걱정하는 애들을 안심시킨 나는 두 눈을 떴다.
호수에 뛰어든 때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지금은 완전히 엉망이 됐다.
불카록스들은 갈기갈기 찢긴 채 널브러져 있었고, 스토너들은 모두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호수 가장자리에서 꼬리만 내놓고 잠수해 있던 라바랩터들도 불카록스와 똑같은 신세였다.
그리고 호수를 학살의 현장으로 만든 장본인이 거기에 있다.
괴물의 키는 약 11m, 몸은 붉은색 비늘로 덮였다. 등에는 뾰족한 골판이 일렬로 나 있고, 견갑골 부위에는 길쭉한 팔 2개가 추가로 달렸다. 팔이 4개지만 체형 자체는 인간이나 유인원처럼 허리를 펴고 이족보행하는 형태였다.
마치 불에 타오르는 거인처럼 보이는 저 괴물이 바로 흉폭한 포식자, 파이로맨서다.
호수 중앙을 등지고 있는 놈은 4개의 팔로 라바랩터를 붙잡고 있었다.
“키, 키이익!”
라바랩터가 꼬리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놈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나기는커녕 4개의 팔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그러자 라바랩터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더니 반으로 갈라졌다.
“츠으으, 츠아아아.”
자기 몸의 절반 정도 되는 괴물을 찢어 죽인 파이로맨서가 기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승리에 취한 놈은 전리품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기회야.’
나는 용암 호수를 기면서 느릿느릿 놈에게 다가 갔다.
화산형 행성에 서식하는 생물 대부분이 그렇듯, 파이로맨서 또한 비늘이 매우 단단하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상처 입힐 수 없다.
‘게다가 놈에게는 성가신 능력이 있지.’
화염술사라는 이름에서 보이듯 파이로맨서는 불을 연상시키는 특수 능력을 두 가지 갖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아주 강력한 회복 능력.
놈의 회복력은 죽음에 이를 만큼 큰 상처도 순식간에 치료할 정도다.
‘머리만 남아도 수 분 내로 재생시킬 수 있어.’
그 대가로 막대한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달리 보면 에너지만 있다면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놈도 그걸 알기에 계속 먹이를 먹어서 체내에 에너지를 비축한다. 마치 장작을 넣어 불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놈이다 보니 공략 방법은 정형화된 편이다.
아주 강력한 화력을 동원해 일격에 놈을 죽이거나, 아니면….
‘놈의 회복력을 틀어막거나.’
나는 전신을 마그마 속에 담근 채, 등에서 침식 촉수를 뽑았다. 두꺼운 배갑(背甲) 안에 숨겨져 있던 길고 굵은 촉수가 밖에 나와 놈에게 접근했다.
식사하는데 정신이 팔린 놈은 자기 뒤에 뭐가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촉수 끝에 달린 뾰족한 부속지가 놈의 뒤통수를 막 움켜쥐려는 찰나, 놈이 움직임을 멈췄다.
“츠, 츠츠츠?”
‘들켰어!’
코를 킁킁 거리던 놈이 앞으로 엎어지듯 튀어 나갔다. 거의 동시에 침식 촉수의 부속지가 놈의 뒷목을 살짝 스쳤다. 비늘 일부가 뜯겨 나가고 놈의 피가 허공에 튀었다.
“츠아아아악!”
정면에서 마주한 놈의 얼굴은 털 대신 비늘이 덮인 주머니사자처럼 생겼다. 청각을 담당하는 기관은 퇴화해 사라졌고, 그 대신 고도로 발달된 눈, 코, 그리고 혀로 사물을 감지한다.
‘귀가 없고, 몸이 비늘로 덮인 주머니사자라.’
흉측한 외모의 괴물이 나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효한다.
[즈즈 즈즈(모두 나와)]
세 개의 입을 열자 안에 있던 애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미리 작전이라도 짠 것처럼 먼저 26호의 사이킥 파워가 놈을 붙들었다. 뒤이어 몸에 ‘레드아머’를 두른 아드하이가 굳어 있는 파이로맨서를 들이받았다.
“츠아아아!”
아드하이의 돌진을 맞고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놈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이사벨이 뱀처럼 움직여서 반토막이 난 적의 상체를 휘감았다. 수십 개에 달하는 손은 놈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갤러곤의 발톱이 달린 꼬리로 놈의 머리를 찌르려 했다.
“츠츠츠츠.”
하지만 파이로맨서의 재생력은 녀석의 움직임보다 훨씬 빨랐다. 놈의 등에 달린 골판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게 무슨 신호인지 아는 이사벨이 재빨리 몸을 풀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견갑골에 달린 놈의 팔 끝이 이사벨을 향하는 걸 본 나는 중앙의 머리로 놈을 들이받았다.
놈의 몸이 공중에 붕 뜬다. 그와 함께 골판을 물들인 하얀빛이 견갑골에 달린 2개의 팔로 옮겨 가는 것이 보인다.
놈이 나와 부딪친 충격으로 날아가기 직전, 하얗게 변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피할 수 없다. 놈의 손끝이 닿은 오른쪽 뿔이 반쯤 잘렸다.
「고통 경감 발동!」
「큰어른!」
내 뿔을 망가트린 놈은 뒤로 날아가 화산재가 뒤덮인 땅 위에 처박혔다.
그것만 봐서는 놈이 더 피해가 큰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쪽은 뿔을 다쳤지만 저쪽은 아무런 상처도 없을 테니까.
나는 놈이 처박힌 곳을 향해 침식 촉수를 날렸다. 촉수 끝에 달린 부속지가 놈의 어깨에 박혔다.
“츠츠츠츠.”
놈은 짜증난다는 울음을 내며 하얗게 변한 팔로 촉수를 후려쳤다.
「고통 경감 발동!」
또다시 뜨는 고통 경감 메시지. 지금의 일격 때문에 부속지가 달린 촉수의 끝부분이 하마터면 완전히 잘릴 뻔했다. 나는 재빨리 촉수를 뒤로 뺐다.
‘성가시긴.’
경이로운 재생력이 끝없이 타오르는 불을 상징한다면, 저 하얀 팔은 불의 열기를 상징한다.
파이로맨서는 몸에 저장한 에너지를 등에 달린 골판을 이용해 열로 전환할 수 있다. 골판이 하얗게 변하면 저장된 열을 견갑골의 팔로 보낼 준비가 완료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열기를 머금은 팔은 그 무엇도 벨 수 있는 명검이 된다. 그 위력은 내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인 머리갑각과 흉부 갑각도 쉽게 파괴할 수 있을 정도다.
이상적인 공격 수단과 방어 수단을 갖춘 포식자. 그것이 파이로맨서의 특징이다.
‘지옥의 환영 덕분에 안 잘리고 끝났지.’
원래라면 뿔과 침식 촉수 둘 다 잃었어야 정상이다. 방열 효과를 주는 ‘지옥의 환영’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안 잘린 거다.
「큰어른」「괜찮아?」
「나쁜 인간! 나쁜 인간!」
“저 엿 같은 특성은 여전하네.”
애들도 뒤로 물러난 채 나를 걱정했다. 적이 무서운 공격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거다.
“츠츠츠츠.”
놈이 혀를 날름거린다. 그 모습은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은 촉수 하나, 뿔 하나에 피해를 입었는데, 놈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인다. 내가 놈의 입장이라도 당연히 저런 반응을 보이겠지.
‘하지만….’
이쪽도 바보가 아니다.
내 침식 촉수에는 이사벨과 파이로맨서가 모르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내가 보유한 유일 특성 중에 촉수 끝에 달린 부속지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있다.
그 특성 효과가 작용하려면 시간이 약간 필요하다.
‘앞으로 3분, 길어봐야 5분 정도 걸리려나.’
놈의 덩치를 생각하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다. 여기서 침식 촉수의 공격을 추가로 당한다면 더 짧아질 거고.
나는 심한 상처를 입은 촉수를 회수하고 다른 촉수를 밖으로 뺐다. 내 움직임에 맞춰 애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26호가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 무형의 사이킥 파워가 요동치자 파이로맨서가 즉각 반응했다.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야생의 감으로 인지한 거다.
놈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26호가 펼친 속박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하나 녀석은 당황하지 않고 다음 공격을 바로 이어갔다.
검은 잿더미 아래에 숨어 있는 녀석의 촉수와 이어진 보라색 보호막이 놈의 발아래에서 튀어나왔다. 보호막에 닿은 놈의 종아리 아랫부분이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놈이 다리를 잃고 잠시 허공에 뜬 사이, 이사벨이 놈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놈을 휘감은 이사벨.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의 팔들이 파이로맨서의 골판을 붙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벨의 팔에서 금속음이 나자 골판에 금이 가며 강렬한 스팀이 뿜어져 나왔다. 에너지를 열로 전환하는 기관이 손상되자 놈의 팔에서 흰 색채가 즉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드하이가 레드아머를 두른 상태로 놈에게 날아들었다. 피처럼 붉게 물든 녀석의 앞발이 노리는 목표는 바로 적의 머리.
이사벨에게 묶인 탓에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놈은 과격한 방법을 취했다. 바로 머리와 상체 일부를 뜯어내는 것.
「뭐임?」
“츠아악!”
놈은 상체 일부를 뜯어내 아드하이를 향해 던졌다. 날아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육신 일부를 재생시킨 놈이 녀석 위에 올라탔다.
「너」「역겨워!」
아드하이가 놈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비트는 사이, 만들어지다 만 놈의 팔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때 놈의 몸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밀려 땅 위에 나뒹굴었다.
「작은애기 괴롭히면 안 돼!」
“츠악!”
짧게 분노를 표출한 파이로맨서는 바로 등을 돌려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먹이로 에너지를 보충하려는 거다.
‘어딜.’
나는 두 다리에 힘을 강하게 주고 땅을 박찼다. 날개를 펼치지 않았는데도 내 몸이 높이 떠올랐다.
“츠아아악!”
달려가는 놈이 머리 위에 깔리는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이대로 놈을 깔아뭉개려 했으나 놈은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해냈다.
나는 착지하자마자 놈에게 바로 꼬리를 날렸다. 근처에 있던 시체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던 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두 갈래의 꼬리를 보고 즉시 대응했다.
하얀색 팔이 집게가 달린 내 꼬리와 충돌한다. 여태껏 내 갑각을 무 자르듯 베어 넘긴 놈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내 덩치를 생각하면 집게의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제아무리 놈의 팔이라 해도 단번에 잘라 내는 것은 무리다.
집게가 희생해서 놈을 옥죄고 있는 동안, 침식 촉수가 놈을 노렸다. 아까 다른 촉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놈의 어깨에 날카로운 부속지가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