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살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래편에서 굉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그의 속은 바싹 타들어 갔다. 구름에 가려진 지상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반물질 폭탄이 터진 자리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두 불청객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한 명은 환수(幻獸) 그리폰으로 변신한 볼프, 다른 하나는 스크리머를 닮은 기괴한 괴물이었다.
그리폰 랭커에 관해서는 여제에게 이미 들었다. 엿 같은 모프박이가 데리고 다니는 노예라고.
함께 온 스크리머 괴물도 아마 에이모프의 노예일 것이 뻔했다.
아무튼 가장 위험한 적, 에이모프 본인은 그곳에 없었다. 그를 잡는 대신 마그마사우르를 치는 걸 선택한 것이리라.
현재 그는 사이오니움 덕분에 시무르그 강신 모드에 들어간 상황. 그뿐만 아니라 착용한 장비도 수준급이다.
반면 상대는 기껏해야 신격화 상급 언저리에 있는 볼프, 비행 능력이 없는 괴상한 괴물에 불과하다. 볼프의 경우 그와 마찬가지로 랭커일 테니 성가시긴 하겠으나 힘의 차이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가 틀렸다.
에이모프가 보낸 노예들은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때, 먹구름 사이에서 검은빛이 번뜩였다.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살만은 바짝 긴장했다. 에메랄드와 라피스라즐리 색깔로 빛나는 그의 날개가 빛을 뿌리며 에너지를 축적했다.
본래 시무르그는 에너지 조작에 특화된 환수다. 에이펙스 생물인 스카이웨일처럼 주변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흡수, 축적해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특히 강신 상태에서 쏘는 혼합 에너지 대포는 높은 위력을 자랑한다.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음에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눈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사방을 감시했다.
「!」
또다시 번뜩이는 흑색의 빛. 이에 살만의 날개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날개에 모인 에너지가 구체 형태로 방출되어 빛이 반짝인 방향으로 날아갔다. 천둥과 비슷한 소리가 나며 구름이 갈라졌다.
‘뭣?!’
하나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살만은 재빨리 이동했다.
움직이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로 검은 번개가 날아들었다. 꼬리 깃털 끝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미리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늦었다. 번개가 휘두른 예리한 발톱이 그의 보호막을 할퀸 것이다.
‘젠장!’
에너지 조작 능력으로 만든 보호막,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갑주가 그를 지켜 주고 있으나 마냥 안심할 수 없다.
이미 상대는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기에.
‘어디로 갔지?’
놈은 어느새 모습을 감췄다. 주변을 둘러봐도 구름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문 살만은 맹금류의 뒷다리를 활용해 갑주에 들어 있는 은색 구체를 꺼냈다.
구체의 정체는 홀로그램 드론. 전자기장으로 특정 이미지를 구현해 적을 현혹시키는 무기다.
활성화된 홀로그램 드론은 곧 살만과 동일한 외형으로 변했다. 마치 구름 속에 그가 둘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끼를 만든 그는 날개에 에너지를 축적하면서 다른 드론들을 차례차례 꺼냈다.
일반적으로 소형 드론은 전투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 통설이나, 그가 꺼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드론 안에 위협적인 무기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드론들을 전부 활성화한 그는 마지막으로 매우 이질적인 형태의 물건을 꺼냈다.
그건 보석으로 만들어진 수발식 권총이었다. 무기라기보다는 장식품에 가까운 물건이었으나 그는 위험한 폭탄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다뤘다.
권총을 쥔 뒷다리를 숨기려는 순간, 적이 미끼를 급습했다. 전자기장으로 구현된 시무르그의 목이 검은 발톱에 의해 찢어졌다.
적이 미끼를 물었다. 살만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충전된 에너지를 발산했다. 에너지로 인해 구름이 백광으로 물들고, 검은 짐승의 모습도 함께 드러났다.
그것은 강신 모드에 들어간 살만만큼이나 거대한 덩치를 지닌 날짐승이었다.
몸과 날개는 금속으로 빚은 것처럼 단단하고 예리한 깃털로 덮여 있고, 목과 머리의 외형은 익룡을 닮았다. 전신을 덮은 깃털들이 하나같이 검은색인데, 눈만은 밝은 호박색이어서 마치 어둠 속에 비치는 화등잔처럼 보였다.
홀로그램 드론을 파괴한 그 존재는 누가 봐도 그리폰이 아니었다.
익룡과 맹금류가 뒤섞인 형태를 가진 저 괴물의 이름은 ‘천둥새’. 싸우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리폰이었던 놈이 지금은 다른 환수가 되어 살만을 노리고 있다.
‘다른 환수로 변신할 수 있는 힘이라니!’
외형이 일반적인 천둥새와 약간 다르긴 했지만, 그건 방어구를 걸친 상태로 변신했기 때문일 것일 터.
주의해야 할 점은 천둥새의 속도다. 놈은 볼프가 변신할 수 있는 환수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빠르다.
살만은 에너지 대포로 견제 사격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홀로그램 드론을 파괴한 상대는 그를 따라왔다.
천둥새는 공중에서의 도그파이팅에 최적화된 짐승이다. 기본 속도부터 시무르그를 압도하고, 초광속 항해도 메탈릭 그렘린급으로 빠르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놈과 비등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사이오니움으로 얻은 힘 덕분이다. 강신 상태가 되면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므로 천둥새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 말은 사이오니움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는 것.
‘아직 더 남아 있긴 하지만….’
가슴팍에 강화 사이오니움 앰플이 몇 개 더 있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다.
사이오니움은 사용할 때마다 지속시간이 줄어든다. 에이모프에게 도망칠 때를 위해 남겨둬야 하므로 여기서 쓸 수는 없다.
‘한 발! 한 발만 맞추면 끝난다.’
천둥새는 번개와 같이 빠르다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시무르그의 에너지 대포라면 일격으로도 놈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게다가 그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뒷다리로 잡고 있는 권총. 콜드블러드 플레이어가 볼텍스원과 계약해 만든 무기다. 예전에 귀환파의 동료가 그에게 전해줬다.
동료의 말에 따르면, 이 물건은 콜드블러드가 아닌 자도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된 상태다. 볼텍스원에게 받은 무기는 개조가 불가능하다. 아마 그가 모르는 자가 특전으로 무기를 바꾼 것일 터.
아무튼 중요한 건 그 권총이 대량의 에너지를 제물로 바친다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적은 그 사실을 모른다.
살만은 뒤따라오는 적을 흘낏 쳐다 봤다. 공기를 가르며 날고 있는 검은 천둥새는 그와 빠르게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같은 플레이어는 죽이지 않는 게 방침이지만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군.’
‘같은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 살짝 걸리긴 했으나 어차피 상대는 에이모프의 노예다. 쓰레기들만 득실거리는 지배파 족속들과 똑같은 존재다.
파벌을 위해서라도, 그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위험 요소는 미리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만은 권총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
최서아가 눈을 뜨고 처음 마주한 그곳은 야생의 세계였다.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인외의 야수들, 혹독한 환경. 그밖에 수많은 요소가 생존을 위협한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는 인간보다 강한 육체를 지닌 그녀도 가혹하다고 느낄 정도로 험난한 곳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곳이 좋았다.
여기서는 밖에 나갈 때마다 천식 흡입기나 약통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타인의 따돌림과 조롱 때문에 상처받을 일도 없다.
새 육신, 새 가족, 그리고 새 이름.
최서아가 아닌 ‘하늘의 어머니’의 삶은 행복했다.
과거의 인연 때문에 가족을 전부 잃기 전까지 말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결심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빛이 번뜩였다. 뒤늦게 따라오는 공기의 진동. 마치 번개가 내리쳤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저 빛이 진짜 번개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하늘의 어머니는 잘 알고 있다.
빛무리의 정체는 바로 에너지탄. 구름 속에 숨은 적이 에너지탄을 발사하고 있다.
그녀는 재빨리 날개 한쪽을 접었다. 검은색 광택으로 빛나는 몸이 한쪽으로 확 쏠렸다.
공기와 바람을 결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그녀 뒤로 적의 포화가 이어졌다. 쏟아지는 에너지탄 중 극히 일부만이 그녀의 깃털 끝에 겨우 닿았고, 나머지는 전부 빗나갔다.
「칫!」
싸우고 있는 적, 볼프 랭커 살만이 남긴 사념파가 느껴진다.
상대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하늘의 어머니는 게임에서 뛰어난 조종사로도 유명했다. 전투기 조종 실력으로만 순위를 매긴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에이모프가 그녀에게 아드하이에게 비행술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실력을 보여 줄 기회가 별로 없어서 아드하이나 에이모프를 보조하는데 그쳤지만, 오늘은 아니다.
‘사냥신의 둔갑껍데기’로 변신할 수 있는 세 번째 환수 ‘천둥새’는 공중에서의 속도전에 특화된 짐승이다. 덕분에 ‘하늘의 어머니’라는 이름에 걸맞은 비행 실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잿불과 빛이 뒤섞인 폭풍 속에서 그녀는 질주하듯 날았다.
그녀의 비행은 아드하이나 갤러곤처럼 우아하거나, 에이모프처럼 거대한 크기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유리한 위치를 선점, 상대를 빠르게 압박해가는 것이 특기였다. 지금도 날아오는 에너지탄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 적과의 거리를 차근차근 좁혀가고 있었다.
상대도 에너지탄 세례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다른 공격 수단을 꺼내 들었다. 빛무리보다 작은 물체들이 컴컴한 구름을 뚫고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1m를 넘기지 못하는 작은 크기, 그리고 발사된 탄환만큼이나 빠른 움직임. 소형 전투용 드론이다. 대(對) 함선 드론에 비하면 전투력이 한참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놈은 이미 한 차례 홀로그램 드론으로 그녀를 속이려 했다. 저 드론에도 분명 수작을 부려놨을 터.
예상대로 드론 중 하나가 작은 입자로 이루어진 가루들을 뭉텅이로 살포했다. 야광 모래처럼 보이는 그 가루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실제로 저것은 모래가 아니라 모래 알갱이만큼 작은 생물 무리다. 이름은 ‘이끼파리’. 메가콥에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만든 생물병기다.
이끼파리 무리가 목표에게 달라붙으면 상대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드는 곰팡이를 생성한다. 더불어 이끼파리들은 스스로 발광(發光)하는 성질을 지녔기에, 놈들에게 당한 적은 훌륭한 표적이 된다.
날아다니는 야광 구름, 아니 이끼파리 무리를 따라 드론들이 하늘의 어머니에게 다가왔다.
적도 여기서 결착을 내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리라.
‘역시 시간이 없다, 이거지?’
시무르그로 변신한 살만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놈의 스펙은 이사벨로부터 들은 정보를 토대로 추측했던 것보다 아득히 높았다. 강신(降神) 상태에 돌입할 수 있다는 건 엔딩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니까.
강신 시무르그가 발사한 에너지탄이면 에이모프에게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녀라면 한 번만 맞아도 빈사 상태가 될 거고.
그런 스펙의 적이 여태까지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개량된 사이오니움을 썼겠지.’
놈은 귀환파의 장비를 관리하는 자. 지배파로부터 빼앗은 사이오니움이거나, 아니면 모종의 수법으로 얻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놈에게 남은 시간은 별로 없을 거야.’
싸움이 시작된 지 이미 5분 이상 지났다. 효과가 끝났는데 에이모프가 오면 큰일이니 서둘러 벗어나고 싶을 터.
‘좋아.’
현재 지상에서는 PS-111이 초거대 마운틴크롤러를 상대로 시간을 버는 중이다. 위험하면 물러나라고 말해 두긴 했지만, 녀석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다.
‘여기서 끝을 보자.’
도망치던 그녀는 한쪽 날개를 빠르게 접었다. 공기의 저항, 가속도로 인해 그녀의 몸이 날개를 접은 방향으로 확 쏠렸다. 급격히 방향을 튼 덕분에 그녀의 뾰족힌 부리 끝이 드론과 이끼파리 무리를 향했다.
그 상태로 그녀는 적들을 향해 가속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몇몇 드론들이 작은 거미 형태의 기계를 토해냈다. 스타유니언의 유일급 병기 ‘블러드 리버’였다.
그것들 뒤에 있는 구름에서 빛이 반짝인다. 시무르그의 날개가 에너지를 충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끼파리나 블러드 리버로 약화시킨 뒤, 저격하려는 거다.
날아오는 이끼파리와 블러드 리버들과 남은 거리는 불과 수m. 몇 초만 지나면 그녀는 완벽히 무력해진다.
하지만 그 어떤 위협도 그녀의 집중력을 흔들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간다. 이끼파리에 닿기 직전, 그녀의 몸이 급강하한다. 날개를 접고, 목과 다리를 쭉 펴서 공기 저항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강하해서 이끼파리 무리를 넘긴 그녀를 기계 흡혈귀, 블러드 리버가 가로막는다.
블러드 리버의 금속 발톱이 깃털과 몸을 움켜쥐기 직전, 그녀는 양 날개의 각도를 조절했다. 그러자 바람을 타고 있던 몸이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이때 발생한 풍압 때문에 기계로 만들어진 흡혈귀들은 그녀를 붙잡는데 실패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몸을 회전시킬 때 뒷다리를 사용해 블러드 리버를 거꾸로 낚아챘다. 그리고 그걸 날아오는 다른 드론을 향해 던졌다. 폭음과 함께 드론 안에 들어 있던 각종 유해 물질이나 무기들이 튀어나왔다.
하늘의 어머니는 검은색 날개를 반쯤 펴서 강하게 공기를 밀어냈다. 그녀의 육신이 번개처럼 가속하며 폭발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순식간에 적들의 공세를 돌파한 그녀는 검은 구름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뭣?!」
숨어서 에너지를 축적 중이던 살만은 그녀를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이 그의 상식에서 명백하게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비, 빌어먹을! 이건 사기야!」
적의 날개에서 광탄이 발사된다. 빛의 비 앞에서 그녀는 날개 끝을 뒤로 향하고 몸을 일자로 폈다. 피격 면적을 최소화한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에너지탄의 세례를 피해냈다.
이제 상대의 얼굴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개과 짐승의 머리에 금색 갑주를 쓴 놈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그 눈 안에 담긴 감정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였다. 다른 하나는….
「죽어어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