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포기하지 않은 놈이 뒷발로 무언가를 꺼내 든다.
뾰족한 발가락이 붙잡은 물건은 보석으로 만들어진 권총이었다.
아직 놈과 그녀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원거리 공격 수단이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본래 천둥새의 깃털 색은 은색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몸이 검은색인 이유는 특전 때문이 아니라 어떤 갑주를 몸에 둘렀기 때문이다. 바로 볼텍스원, ‘고뇌의 고리’를 재료로 사용해 만든 갑주 말이다.
그녀의 날개 위로 볼텍스원의 팔을 연상시키는 검은 팔이 솟아났다. 그 팔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단창을 쥐고 있었다.
검은 팔이 적을 향해 단창을 던졌다.
뒤늦게 살만의 권총이 그녀의 머리를 겨냥했다.
쏘아진 화살처럼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제사장의 황금창.
그 창이 목표의 가슴팍에 박힌 순간, 발톱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컥?!」
「큭!」
고통이 배여 있는 사념파가 허공에 머물다 사라졌다. 사념을 흘린 주인 중 하나가 심연처럼 어두운 구름 속으로 추락했다.
잿불이 흩날리는 구름 위에 떠 있는 존재는 칠흑처럼 검은 새였다.
-
‘위험했어.’
눈가 위로 피가 흘러내린다. 동시에 강한 통증과 현기증이 느껴진다.
살만은 마지막까지 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다. 놈이 날린 공격이 머리 위를 스치면서 상처를 냈다.
‘창을 조금만 더 늦게 던졌으면 이쪽이 당했을 거야.’
형체가 없는 공격이라 확실하지 않지만, 출혈량과 통증을 보니 꽤 아슬아슬하게 피한 듯했다.
상당한 부상이었으나 하늘의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웬디고’의 ‘얼음의 악령’이나 ‘키메라’의 ‘대화염’처럼 천둥새에게도 고유 특성이 존재한다.
바로 ‘생명의 샘’이라는 특성이다.
천둥새의 피와 체액에는 상처 회복을 촉진시키는 성분이 있어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빠르게 회복된다. 체내에 피가 남아 있다면 언제든지 회복할 수 있다. 속도를 기반으로 근접전을 벌여야 하는 천둥새에게 어울리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독, 바이러스성 공격은 회복할 수 없다. 그리고 자연 치유력을 향상시켜 주는 특성이다 보니 부상 수준에 따라 회복 속도에 차이가 난다.
‘일단 피가 빠지는 것부터 막자.’
피가 밖으로 샐수록 부상의 회복이 느려진다.
그녀는 상처 부위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목 주변에서 작은 손이 나타나더니 머리의 상처를 덮었다.
이건 천둥새나 그녀의 능력이 아니다. 그녀가 착용한 ‘전신 슈트’의 효과다.
볼프 전용 장비 중 유일급에 해당하는 장비들은 기본적으로 형상 변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장비들은 몸이 수인에서 짐승으로 바뀌어도 그에 맞춰 변형된다. 지금 그녀의 전신이 검은색 금속으로 빚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유일급 장비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은 유일 갑옷의 이름은 ‘옵시디언 암즈’.
볼텍스원 ‘고뇌의 고리’를 재료로 사용해 만든 이 전신 슈트는 이름처럼 여러 개의 검은 팔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팔은 총 5개까지 생성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딱히 좋아 보이지 않지만, 슈트의 진가는 검은 팔에 있다.
해당 팔에 도구를 쥐어 주면 자동으로 슈트 내부에 수납한다. 수납된 도구는 다시 꺼내기 전까지는 어떠한 수단으로도 탐지가 불가능하고, 슈트 소유자가 아닌 타인은 꺼낼 수 없다.
부피가 크거나 모양이 특이한 물건을 수납할 경우, 슈트가 그에 맞춰 형태를 바꾼다. 그것으로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크면 수납이 불가능하다.
덕분에 옵시디언 암즈가 있다면 환수로 변신한 상태에서도 여러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날개에 제사장의 황금창을 숨겨놨다가 살만에게 던진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게임과 달리 검은 팔을 그녀가 직접 조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손을 만들어 상처를 지혈할 수 있었다. 복잡하고 세밀한 움직임이 가능하니 전투 말고 여러 용도에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팔이 더 늘어난 기분이네.’
에이모프와 이사벨이 느끼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살만이 추락한 장소로 내려갔다.
구름을 뚫고 강하한 그녀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산이었다. 야산 크기의 거대 마운틴크롤러가 몸을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그 앞에는 거미와 전갈이 뒤섞인 것처럼 생긴 뮤턴트 스크리머, PS-111이 가만히 서 있었다.
뭔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위기였다.
‘왜 안 싸우고 있지?’
살만은 제사장의 황금창이 가슴에 꽂힌 채 추락했다. 놈 또한 그녀처럼 상위 방어구를 입고 있었기에 즉사하지는 않았을 거다. 물론 치명상은 피할 수 없겠지만.
따라서 저 마운틴크롤러에게 내린 명령도 유효할 터.
‘그러고 보니 놈은 어디 갔지?’
“중간애기. ‘마운틴크롤러’ 관리자의 신체에서 이상 반응이 검출됩니다.”
PS-111은 말과 함께 갈고리 손톱으로 마운틴크롤러의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 황금색 단창이 꽂힌 살만이 있었다.
「그, 그그극! 으그그그기기긱?!」
날개가 부러진 상태로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놈. 빈사 상태라 보기에는 상태가 이상했다.
“사이오니움 계열의 각성제 복용 증상으로 추정. 세포 붕괴와 변이 동시 진행 중. 신체에 대한 통제력 상실….”
“■■■■■■■■■■■■!”
그때 살만이 괴성을 내질렀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이 잔불로 가득한 대지 위에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살만의 몸에서 에너지탄이 쏟아졌다. 엎드려서 주인을 보호하던 마운틴크롤러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위험 대상입니다. 배제해야 합니다.”
「…이런 젠장.」
쓰러진 마운틴크롤러 옆으로 살만, 아니 기괴하게 변이된 시무르그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
「쿠르르르르」
마그마사우르가 여섯 개의 눈을 부릅뜬 채 으르렁거린다.
놈도 내가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인지했다. 놈은 화산형 행성의 왕. 여태껏 나처럼 강한 적은 만나 본 적 없을 터.
지금까지는 적당히 상대했지만, 이제 전력을 다해 싸울 거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우월적 향상성’ 덕분에 내 몸은 완벽히 회복되었다. 게다가 사냥의 표상까지 써서 전신에 힘이 넘치는 상태다.
게다가 전투 모드에 들어간 26호, 이사벨이 내 머리 위를 부유하며 놈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승부를 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놈뿐만이 아니다.
「쿠르르르르르릉!」
「■■■■!」
「■■■■!」
「■■■■!」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놈이 포효했다. 나와 양쪽 머리들도 물러서지 않고 그에 맞서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놈과 나의 포효에 맞춰 멀리서 화산이 또 한 번 폭발했다. 화염과 재로 이루어진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폭발로 인해 솟구친 지각 파편들이 땅으로 추락했다.
쏟아지는 불꽃 비 아래에서 화산의 악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m 크기의 괴수가 4개의 다리를 뻗을 때마다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달려오는 놈에게 맞서 나 또한 날개 팔을 쭉 폈다.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처럼 날개의 피막이 활짝 펼쳐졌다. 그 상태로 땅을 박차 공중 위에 몸을 띄웠다.
사냥의 표상 상태라 덩치가 두 배인데도 불구하고, 아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낮게 활강하는 나와 이쪽을 향해 질주하는 마그마사우르. 우리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놈과 부딪친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놈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 내 날개를 감싸는 공기가 충격파로 인해 크게 떨렸다.
충돌로 인해 이쪽도 타격이 꽤 있었지만, 저쪽만큼은 아니었다. 활강하던 내가 두 다리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으니까.
「쿠르르르르!」
놈은 다리에 얻어맞은 것이 꽤 얼얼한지 낮게 신음했다. 그사이 내 양쪽에 있는 머리들이 재빨리 움직여 놈의 등을 깨물었다.
입 안쪽에 숨겨져 있던 이중 턱이 튀어나와 적의 용암 외피에 박혔다. 워낙 두껍다 보니 피는 튀기지 않았다.
그래도 상당히 고통스러웠는지 놈이 몸을 크게 떨었다. 강한 힘을 품은 꼬리가 나를 때리기 위해 사납게 움직였다.
공기를 베는 흉흉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적의 꼬리. 이를 막기 위해 움직인 것은 내 등에 숨겨져 있던 6개의 침식 촉수였다. 각각의 촉수가 뾰족한 부속지를 펼친 채 날아드는 꼬리를 붙잡았다.
「쿠르르?」
강한 힘이 촉수들을 압박해 왔지만, 견딜 만했다. 아까와 달라진 결과에 놈이 당황해한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나는 양쪽의 목과 촉수를 당겨 놈의 등 위에 가까이 붙었다.
사냥의 표상이 되면 내 몸에 날카로운 뼈 낫이 돋은 팔 2개가 추가된다. 뼈 낫의 강도는 내 머리갑각만큼 단단하고, 그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롭다.
나는 허리 아랫부분에서 자라난 새 무기로 놈의 배갑(背甲)을 내리찍었다. 무지막지한 두께를 가진 놈의 갑각도 이번에는 버티지 못했다. 길쭉한 뼈 낫은 물론이고 팔 끝부분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쿠, 쿠르르르르르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을 고통에 놈이 괴성을 지른다. 분노에 가득 찬 마그마사우르가 몸을 비틀다 못해 나를 매단 채 그대로 엎어지려고 한다. 나를 깔아뭉갤 속셈이다.
당연히 그대로 당해 줄 생각은 없다. 나는 날개를 펼쳐서 위로 날아올랐다. 뼈 낫 팔이 뽑히며 마그마를 닮은 피가 솟구치고, 내 입이 물고 있던 암석 가죽이 뜯겨졌다.
하지만 놈은 기다렸다는 듯 길쭉한 목을 뻗어 내 발목을 깨물었다.
발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낄 겨를 없이 내 몸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막대한 힘으로 나를 내리꽂은 놈은 앞발로 내 흉부를 짓밟으려 했다.
그 순간, 놈의 다리가 그대로 멈췄다. 허공에서 무수히 많은 보라색 실이 튀어나와 놈의 다리를 얽어매고 있었다. 같은 에이펙스 생물, 씨 데몬 26호가 사이킥 파워로 놈을 속박한 거다.
무형의 힘에 묶여 꼼짝 못하는 놈 뒤로 크롬색 뱀이 접근하는 게 느껴졌다. 이사벨은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다가가 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 앞에 아까 내가 만들어 놓은 상처가 있었다. 녀석은 수많은 팔들을 이용해 상처를 벌리더니 안에 머리를 드밀었다.
「쿠르르륵!」
갑자기 상처에 뭔가가 파고들자 마그마사우르가 짧은 비명을 내지른다.
사이킥 파워에 묶인 다리가 파르르 떨린다. 곧이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초능력의 그물이 찢어졌다. 상대의 육체적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26호도 속박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놈의 앞다리가 내 오른쪽 목에 꽂힌다. 바닥에 울리는 진동을 보니 저 공격을 맞았으면 내 목이 그대로 절단났을 거다.
「쿠릉?」
하지만 놈이 밟은 곳에 내 오른쪽 목은 없었다.
26호가 시간을 버는 동안, 내 몸에서 이미 떨어져 나갔으니까.
나로부터 분열된 ‘오른쪽 머리’가 전투용 팔로 놈을 후려쳤다.
「그르르르!」
「?!」
또 다른 나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놈이 크게 휘청거린다. 그 틈을 노려 세 번째 ‘나’인 ‘왼쪽 머리’가 놈에게 뛰어든다.
두꺼운 다리로 땅을 박차며 달려든 녀석이 날개 팔과 전투용 팔로 상대를 강하게 밀었다. 수백m 크기의 거구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크, 크르륵?」
놈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내 동료들 때문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르르르르」
「그르륵!」
‘히드라 분열’ 덕분에 새 육신을 얻은 나의 두 머리들. 그들이 놈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마그마사우르가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쪽보다 신체 스펙이 더 우월하다는 것도.
그래서 숫자를 늘리기로 했다.
‘적이 늘어났으니 당황스럽겠지.’
나와 26호만 해도 벅찬데 나와 비슷한 급의 적이 둘이나 더 늘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에이펙스답게 놈은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놈이 몸을 일으키면서 입을 크게 벌리려 한다.
「쿠르르르…극?」
오른쪽 머리와 왼쪽 머리가 놈이 포효할 타이밍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른쪽 머리는 놈의 등 위에 올라타 전투용 팔로 위턱을 붙잡았다. 왼쪽 머리는 놈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앞다리를 누르며 동시에 아래턱을 꽉 쥐었다.
그 상태로 두 녀석들이 적의 아가리를 찢어 버리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극!」
「그르르르르!」
「그르르!」
두 마리의 ‘나’에게 깔린 놈이 발버둥친다. 나는 뼈 낫 팔로 놈의 복부를 찌르고 마구 흔들었다. 배 부위를 보호하는 암석 가죽이 떨어져 나가고, 그 안에서 내장 파편과 피가 줄줄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