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와 연결된 감각으로 주변을 관찰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26호와 아드하이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심심한가 보네.’
공원에 착륙하고 나서 세찬과 하늘의 어머니, MPS-05가 밖으로 나갔다. 세찬이 아는 인맥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다. 저 빌딩의 숲 안에 통신 수단이 있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돌아올 거다.
‘그때까지 이곳에 대한 얘기나 좀 들려줄까?’
어쩌면 26호는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녀석이 인간의 언어나 문화에 관해 호기심이 표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혼자서 사이킥 파워로 작동하는 단말기로 영상을 시청하며 공부하는 걸 몇 번이나 봤다.
‘녀석에게는 시청이라기보다는 피부로 느끼는 것에 가깝겠지만.’
반면 아드하이는 26호만큼이나 지성체들의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무관심한 것은 아닌데 관심사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다.
‘사냥에 도움이 될 만한 분야만 좋아하지.’
인간의 약점과 강점, 무기와 방어 체계 같은 것 말이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갤러곤답다. 사실 녀석보다는 같은 에이펙스 생물이면서 인간 문화에 관심을 갖는 26호가 특이 케이스다.
[즈즈 즈 즈즈즈즈즈(아직 더 기다려야 해)]
“이제 막 통신이 끝났다고 하니 돌아오는데 32분 소요될 예정입니다.”
[즈즈즈 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그동안 이 도시에 관해 얘기를 해줄게)]
「나 도시가 뭔지 알아! 사람들이 사는 둥지를 도시라고 한대!」
「난쟁이」「둥지」「정보?」
26호는 흥미로워했고, 아드하이는 심심하니 일단 들어 보겠다는 태도였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이곳은 영화를 만드는 곳이야)]
「영화?」「무슨 뜻?」
「영화가 뭐야?」
“메인 컨트롤러가 공부할 때 사용하는 단말기에서 출력되는 영상물이 영화입니다.”
「공부」「별로」「재미」「없어」
역시나 아드하이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공부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관심이 식은 녀석은 몸을 둥글게 말고 날개의 비늘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와! 그러면 여기서 영화 구할 수 있어?」
“메인 컨트롤러가 사용하려면 일정 부분 수정해야겠지만, 가능합니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괜찮은 것이 있으면 한 번 찾아볼게)]
나와 PS-111의 말에 26호가 몸을 빛내며 기분이 좋다는 표시를 했다. 그걸 지켜보던 이사벨이 신기한지 입을 열었다.
“26호는 확실히 많이 똑똑한 것 같네.”
「응! 맞아! 나 똑똑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벨도 26호의 지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딱히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데. 먹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이사벨은 ‘만상의 천안’을 사용했지만, 나오는 게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또한 전에 26호를 ‘통찰’ 특성으로 확인해 본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자연적인 거겠지.’
돌이켜 보면 이미 녀석과 비슷한 사례가 몇 번 있었다. 미래를 예지하는 블랙 갤러곤이라든가, 압도적인 크기로 성장한 마운틴크롤러라든가 등등. 녀석의 특출난 지능도 다른 사례들처럼 일종의 돌연변이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드하이도 특별한 개체지.’
게임에서 수많은 갤러곤들을 포식했지만, 녀석처럼 화이트 갤러곤과 레드 갤러곤의 특징이 뒤섞여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내 시선을 느낀 아드하이가 비늘을 다듬다가 나를 쳐다봤다.
「큰어른」「나」「비늘」「다듬었어」「어때?」
[즈즈 즈즈 즈즈즈(언제 봐도 예쁘네)]
솔직히 말하니 녀석이 비스듬히 누운 채로 꼬리 끝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 칭찬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각자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30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연락을 끝마친 세찬과 하늘의 어머니, MPS-05가 배로 돌아왔다.
“만날 약속을 정했습니다. 오늘밤 11시에 만나서 술자리를 가질 예정입니다.”
“오늘?”
세찬을 보낼 때 상대를 적당한 시간에 불러내라고 말해 뒀다. 그런데 당장 오늘이 될 줄은 몰랐다.
내 의문을 풀어 준 상대는 놈이 아니라 하늘의 어머니였다.
「저쪽이 갑자기 총독 대리로 승진해서 바쁘다고 하네.」
“총독 대리? 원래는 유전자 디자인팀 소속이었잖아?”
「우리가 도착하기 10일 전쯤에 총독하고 고위층이 싹 바뀌었다더라.」
그녀의 말에 나는 세찬을 내려다 봤다.
“그걸 왜 이제 와서 들어야 하지?”
“그, 그게, 제가 고객S와 거래할 때는 다른 고객들과는 연락하지 않습니다. 저, 저쪽에서 호, 혹시 모를 정보 유출이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못 들었다고 말하려는 건가?”
“그, 그건…끄으윽?!”
머리 안에 든 기생충이 나의 의지를 듣고 활동을 개시한다. 뇌를 쥐어짜는 고통에 세찬은 입에 거품을 문 상태로 몸을 떨었다.
나는 잠시 놈을 지켜보다가 기생충에게 그만하라고 지시했다. 몸의 통제권을 상실한 채 고통을 느끼던 세찬은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 다시는 이런 실수는….”
“그만.”
“…….”
“교체된 새 총독의 이름은 뭐지? 마찬가지로 자오 가문인가?”
“예, 옙! 프라임캐피탈의 일원, 리 자오입니다!”
“리 자오?”
‘리 자오’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흔한 이름이긴 한데.’
분명 중요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흐릿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는데, PS-111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LV-06의 신임 총독 리 자오가 이곳에 오기 전, 수성의 무기연구기지에서 근무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해당 정보는 사실입니까?”
“저, 저도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에 수성에서 가르멜다 가문과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세찬의 말을 들은 PS-111은 입을 다물었다. 금속 피부로 덮인 얼굴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했지만, 그 속에서 미미한 감정이 느껴졌다.
녀석은 지금 동요하고 있다. 쌍둥이 언니가 묘한 반응을 보이자 이사벨이 녀석에게 다가갔다.
“언니? 왜 그래?”
“에이모프. 리 자오라는 이름,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응?”
녀석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과거 얼음형 행성에서 PS-111과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언급했다.
가르멜다 가문의 가주 클로에 가르멜다.
그리고….
“자오 가문의 리 자오 수석연구원.”
「잠깐만. 여기 총독이 PS-111을 만든 자란 말이야?」
하늘의 어머니 말대로다. PS-111의 원형인 뮤턴트 스크리머 모델 제작에 참여했던 놈이 이제 총독이 된 거다.
“예. 저의 유전자를 조작했던 자는 클로에 가르멜다 연구책임자, 리 자오 수석연구원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스타유니언의 대수령까지.”
내 말에 PS-111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 자오가 여기 있나?”
“예? 아뇨. 총독 대리 말로는 부임한 뒤 이틀 후에 식민지를 떠났다고 합니다.”
“어디로?”
“그, 그건 저도 잘…다, 다만 명령만 하신다면 어떻게든 알아 오겠습니다!”
나는 벌벌 떠는 세찬에게 관심을 끊고 생각했다.
‘리 자오도 플레이어일 확률이 높아.’
PS-111은 콜드블러드 랭커 페넬로페의 복제인간을 재료로 사용해서 만든 존재다. 뮤턴트 스크리머 개발에 참여한 핵심인사들은 전부 랭커 출신이라 봐도 좋을 터.
‘나는 LV-06에 플레이어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왔어.’
물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최대한 조심하긴 했으나, 적이 플레이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의 침입은 물론이고, 나와 메탈릭 그렘린 사이의 관계도 어느 정도 유추해 낼 확률이 높다.
‘일단 본인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야.’
적은 아직 나의 침입을 모른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총독 대리와 어디서 만나지?”
원래 이곳에 와서 하려고 했던 일.
-
클래식한 디자인의 흑단색 탁자가 인상적인 어느 바.
테이블 이상으로 옛것의 느낌이 풀풀 나는 음악이 가게에 흐르는 가운데, 한 남자가 탁자 앞에 앉았다.
“가니메데산 위스키 두 잔. 방식은 늘 먹던 대로.”
“알겠습니다.”
남자, 총독 대리의 말에 배리어 건너편에 있던 바텐더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바텐더는 배리어 안쪽에서 젤리 형태의 위스키를 꺼내 녹이는 작업을 시작했다.
주문을 마친 총독 대리는 가게 내부를 한 차례 훑었다. 그가 찾아온 바는 과거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을 위해 만들어진 세트다.
‘다음 촬영이 끝나면 없앤다고 하니 아쉽군.’
그때 가게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상대는 총독 대리도 잘 아는 자였다.
“여기일세.”
“오랜만입니다.”
바위를 연상시키는 딱딱한 피부를 가진 남성, 세찬이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여태 자네가 거래를 파토낸 적이 없는데 웬일이지?”
“그렇게 됐습니다.”
오랜만에 본 세찬은 총독 대리가 알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꾀죄죄한 복장이야 해적이니 그렇다 쳐도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다. 눈빛도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흐릿했다.
마치 헐크 뮤턴트 개조 수술을 받기 직전인 고용인의 모습처럼 세찬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주문하신 가니메데산 위스키 두 잔 나왔습니다.”
“쯧, 일단 시켰으니 받게.”
“감사합니다.”
총독 대리는 바텐더가 건넨 잔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반면 세찬은 퀭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뭘 구매할 생각이지? 전처럼 고용인들을 빼돌리면 되나?”
“이번에는 유전자 샘플이 필요합니다.”
위스키의 달달한 향기를 즐기고 있던 총독 대리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유전자 샘플? 갑자기 왜?”
“전에 거래하던 고객과 거래가 끊겼습니다. 새 루트를 마련해야 하는데 생각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더군요.”
“흐음.”
“가능하겠습니까?”
총독 대리는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유전자 샘플을 산다고?’
메가콥에서 유전자 샘플 거래는 엄격히 규제된다. 일곱 가문의 인가를 받은 자만이 샘플을 거래할 수 있다. 당연히 일개 해적 집단의 우두머리에 불과한 세찬은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규칙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법.
많은 이들이 샘플을 몰래 빼돌려서 팔아먹는다는 사실을 총독 대리는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유전자 디자인팀에 있을 시절에 그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샘플이라면 어떤 걸 원하나?”
“전체 소장 목록을 구해주실 수 있습니까? 직접 보고….”
“개소리 집어치우게. 해적 나부랭이에게 목록을 유출시켰다가 걸리고 싶지 않으니.”
“…….”
“내가 구할 수 있는 것은 4등급 이하 생물의 샘플들뿐이야. 5등급부터는 기록을 지우기 번거로워서 안 돼.”
사실 무리한다면 6등급의 희귀 생물도 가능하다. 그런데도 굳이 강하게 얘기한 이유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4등급 샘플로 하죠.”
하지만 세찬은 협상은커녕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응? 4등급을 사겠다고? 이익이 안 날 텐데?”
“상관없습니다.”
상대의 재미없는 반응에 총독 대리는 작게 혀를 찼다. 리 자오가 돌아오기 전 제대로 한몫 챙길 생각이었다. 4등급만으로는 위험 부담에 비해 수익이 적었다.
“…쯧, 5등급도 넘길 수 있을지 한 번 확인해 보지.”
“감사합니다.”
“대신 대가는 넉넉히 지불해야 할 거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부르시는 대로 입금하겠습니다.”
총독 대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세찬과 거래하면서 이렇게까지 상대가 저자세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업이 제대로 꼬였나 보군.’
지금의 그는 매우 절박해 보였다. 유전자 개조 시술을 받은 자가 저렇게 상태가 나빠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전자 개조 인간은 일반인에 비해 우월한 신체를 가졌다. 심각한 중상을 입었거나 정신이 극한에 몰렸을 때나 보통 저런 식으로 살이 빠진다.
‘저쪽 상황이 좋지 않으면 나야 좋지.’
“좋아. 이틀 뒤에 판매할 수 있는 샘플들을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그럼 거래가 성사된 기념으로.”
총독 대리는 술잔을 들었다. 세찬도 잔을 들어 건배에 응했다.
‘이 기회에 아주 제대로 털어야겠군.’
해적으로부터 얼마나 크래딧을 뽑아먹을 수 있을지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위스키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난 먼저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