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술값은 자네가 나를 부른 거니 자네가 내게.”
자리에서 일어난 총독 대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밖에 나오니 강화 유리로 덮인 원통형, 혹은 직사각형 형태의 마천루들이 보였다. 전부 메가콥이 탄생하기 전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듣기로는 노블캐피탈이 거주하는 건물의 외형이 저것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현재 저 빌딩 대부분은 비어 있는 상태다. 오락물 제작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고위직들이 이용하는 몇몇 건물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만 들어와 있을 뿐이다.
덕분에 빌딩으로 둘러싸인 거리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물론 식민지의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총독 대리는 이런 기묘한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는 거리를 쭉 걷다가 어떤 빌딩 앞에 멈춰 섰다. 그가 타고 온 비행선이 이 건물 옥상에 주차되어 있다.
빌딩의 회전문을 통과하니 화사한 분위기의 로비가 나타났다. 총독 대리는 로비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다. 위치표시기에 있는 30이라는 숫자가 빠르게 낮아졌다.
‘다음 세트를 지을 때는 비행장 설치를 건의해볼까?’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니 상당히 귀찮았다.
그런 잡생각을 하며 위치표시기를 보고 있던 중, 문득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30층에서 내려오지?’
이 건물에 있는 자는 비행선에 있을 조종사와 경호원, 그리고 그, 이렇게 셋이다. 이 중 로비까지 내려온 자는 그뿐이다. 경호원과 조종사는 비행선을 지켜야 하니 당연히 옥상에 머무르고 있다.
어느새 숫자는 15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팔목에 찬 시계 형태의 단말기를 작동시켰다. 옥상에 있을 부하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통신기가 활성화되었다.
“누구 로비로 내려온 자가 있나?”
「예? 아뇨. 저희는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뭐?”
그 말을 듣는 순간, 총독 대리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위치표시기에 표시된 숫자는 이제 5. 예감이 몹시 좋지 않았다.
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그가 상상하지도 못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젠장!’
그는 로비 구석에 있는 비상구를 향해 달렸다. 비상구의 문을 열자마자 다급히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고용인이나 헐크 뮤턴트가 탈주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머리 안에 복종 장치와 신호칩이 이식되어 있어 돌발 행동이 불가능하다.
‘설마 세찬이?’
그가 데려온 졸개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이곳은 메가콥의 식민지 LV-06. 일개 해적 따위가 식민지의 총독 대리를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무슨 일입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단말기에서 경호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총독 대리님?」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쫓기고 있다.”
「예?」
“위기관리팀에, 헉헉, 연락해서 여기, 후우, 이 빌딩부터 봉쇄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다급한 총독 대리의 말에도 경호원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답했다.
통신을 종료한 총독 대리는 8층 부근에서 멈췄다. 술을 마신 상태로 갑자기 뛰어서 그런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더, 더 이상은 못 뛰겠어. 우욱!’
그는 비상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수십 개가 넘는 방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서둘러 문을 잠근 그는 벽에 기대 듯 쓰러졌다. 공포와 고통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슴팍을 쥐어짜듯 붙잡은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는 못 쫓, 쫓아오겠지….’
헐떡이는 그의 눈에 문의 반대편, 그러니까 건물의 외벽 쪽에 커다란 강화 유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유리를 통해 세트의 전경이 보였지만, 이를 즐기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그 후, 그가 방에서 숨을 고르기 시작한 지 십여 분이 흘렀다. 밖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기관리팀에 연락하라고 했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지?’
지금쯤이면 창밖으로 바쁘게 날아다니는 비행선들이 보여야 한다.
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데, 손목의 단말기에 불빛이 들어왔다. 경호원이 보낸 통신이었다.
「방금 위기관리팀이 봉쇄를 완료했습니다.」
“뭐?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총독 대리님의 안전을 위해 은밀히 움직여서 그렇습니다.」
경호원의 말에 그는 벽면의 유리에 다가갔다. 유리 밖을 살펴봐도 위기관리팀이 도착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지금 총독 대리님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 중입니다. 도착하면 문을 두드릴 테니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문 쪽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창밖을 살펴보고 있던 그는 문가에 다가갔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던 찰나,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경호원한테 위치도 얘기했었나?’
이 건물에는 곳곳에 카메라가 있으므로 그가 어디 숨었는지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찾아오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도착했으니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밖에 있는 것은 그의 경호원이 아니다.
“안에 계십니까? 총독 대리님?”
쿵쿵
“총독 대리님? 총독 대리님? 총독 대리님?”
쿵쿵쿵
일정하게 반복되는 노크 소리에 총독 대리는 뒷걸음질 치다가 실수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소음을 낸 순간,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뚝 멈췄다.
“역시 안에 있잖아.”
나지막하게 들리는 목소리.
문을 부수고 들어온 ‘그것’이 그를 덮쳤다.
-
‘오랜만에 혼자 움직였네.’
이번 총독 대리 포획 작전에서는 단독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메가콥의 식민지는 고용인들 통제로 인해 감시가 삼엄한 편이다. 곳곳에 카메라가 깔려 있으므로 애들과 함께 움직이면 걸릴 확률이 높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홀로 적진에 잠입해서 목표물을 사냥하는 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 나의 조건은 게임에서 잠입할 때보다 훨씬 좋다. 바로 ‘영리한 약자’가 있으니까.
‘악몽의 지평선’을 해제한 뒤 나는 영리한 약자로 변신했다.
수많은 털들이 전신의 갑각과 외피 위를 뒤덮었고, 체형은 켄타우로스처럼 4개의 다리로 보행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체형의 변화와 더불어 마천루를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몸 크기도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 내 몸의 길이는 꼬리까지 합쳐 5m를 넘지 않는다.
잠입과 은신에 최적화된 형태로 변한 나는 세찬이 접선하기로 한 장소 근처에 몰래 숨어들었다. 영리한 약자의 특전 ‘미지생물의 털가죽’ 덕분에 내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총독 대리가 세찬을 만나러 간 사이에 비행선에 있는 인원들을 정리했다. 그는 자기 부하가 내 뱃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즐겁게 위스키를 들이켰다.
‘뭐 내 습격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겠지만.’
나는 방금 제압한 총독 대리를 내려다봤다. 가볍게 휘두른 앞발에 맞은 놈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어디 그러면….’
단단한 외피 위에 털가죽으로 감싸진 팔 안쪽에서 귀여운 아이가 꿈틀거린다. 장어처럼 생긴 기생충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히, 히익?!”
기생충을 본 놈이 짧게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려 한다. 나는 길고 튼튼해진 가슴쪽 팔로 그를 꽉 붙잡았다.
“기, 기다…쿠헉?!”
놈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기생충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이물질을 토해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헛된 행동이었다.
몇 초만 지나면 그는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될 거다.
‘어디 얼마나 아는지 볼….’
그 순간, 갑자기 뒷목 부분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붙들려 있던 총독 대리의 몸이 축 늘어졌다.
‘뭐야?’
방금 들었던 섬뜩한 느낌은 기생충이 죽었을 때 전해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급히 날개 팔로 총독 대리의 두개골을 붙잡고 힘을 줬다. 단단한 뼈를 부수니 완전히 익어버린 기생충이 보였다.
기생충이 먹다 남긴 살점 속에는 복종 장치와 유사하게 생긴 기계 칩이 있었다.
나는 총독 대리의 머리에서 나온 칩을 살펴봤다.
외형은 고용인들에게 심는 복종 장치와 유사했다. 표면이 매우 뜨거운 것으로 보아 이 작은 장치가 기생충과 총독 대리를 죽인 원흉인 게 분명했다.
‘왜 이 자의 머리에 이런 물건이 있지?’
뇌가 녹아버린 이 시체는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식민지 최고 권력자의 대리인이었다. 고용인이 아닌데 머리에 폭탄을 넣고 다니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자발적으로 한 게 아냐.’
메가콥의 프라임캐피탈이자 LV-06의 총독, 리 자오. 그자가 자기 대리인의 머리에 폭탄을 박았다.
이 세계에서 지성체의 뇌를 장악해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요인(要人)을 감염시켜서 적진을 교란시키는 전략을 즐겨 쓰는 존재는 오직 한 명뿐이다.
‘나를 노렸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적들이 설치한 함정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영리한 약자’를 해제했다. 내 몸이 급격히 성장하며 주변의 벽들을 깨부쉈다. 무너져가는 건물 속에서 나는 날개 팔을 활짝 펴고 위로 날아올랐다.
공중에 떠서 아래를 보니 여러 개의 빌딩들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도로도 갈라지고 있는 것을 보아 지반 자체가 붕괴하는 중이었다.
저건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재래식 무기에 특화된 스타유니언에는 슈퍼무기급 폭탄이 존재한다. 그 위력은 행성 전체를 파괴할 정도로 막강하다.
정식 명칭은 ‘PMB(Particle Manipulation Bomb)’. 정식 명칭보다는 ‘알파보이’라는 별명으로 주로 불리는 폭탄이다.
이 폭탄은 게임에 존재하는 모든 설치형 폭탄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한다.
게임에서도 스타유니언과 싸울 때 여러 번 겪어봤다. 그래서 폭탄이 활성화될 시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지 잘 안다.
땅 속으로 꺼지고 있는 저 도시, PMB가 만든 결과물이다.
‘총독 대리의 머리 안에 있는 칩이 활성화될 때 작동하게 만들었어.’
메가콥 상류층의 머리에 폭탄을 심은 것, 적대 관계인 스타유니언의 슈퍼무기를 식민지에 숨겨둔 것.
‘그리고 나 하나 잡겠다고 행성 전체를 함정으로 만든 것.’
모두 플레이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짓거리들이다.
리 자오와 플레이어들이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함정을 팠다.
‘…PMB라면 빨리 피해야 해.’
폭탄이 발산하는 에너지에 타격을 받은 지표는 이미 파괴가 한창 진행 중이다.
하늘 위는 아직 나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정상은 아니다. 에너지로 행성 대기가 뒤틀린 탓에 알록달록한 오로라가 곳곳에 나타나 있으니.
여기서 더 지나면 나도 끝장이니, 서둘러 폭탄의 영향권에 벗어나야 한다.
온갖 색깔로 뒤덮인 무지갯빛 하늘 위를 날아가다 보니, 저 멀리 커다란 분홍색 해파리가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전투 모드에 들어간 26호였다. 녀석은 지느러미로 다른 애들을 꼭 껴안은 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 위에 ‘레드아머’를 몸에 두른 아드하이가 뱅뱅 도는 모습이 보였다. 만능에 가까운 방어 능력 덕분인지 녀석은 그나마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전신을 완전히 다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녀석도 위험해진다. 나는 괴물의 촉수를 움직여 무형의 파장을 쏘아 보냈다.
[■즈 즈■즈(■들 괜■아?)]
「■어■!」
[■즈 즈■즈■ 즈(■두 이■으■ 와)]
폭탄이 만든 에너지가 방해한 걸까? 이상하게도 파장이 끊긴다. 아드하이의 사념파도 평소와 다르게 노이즈가 낀 것처럼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머리가 좋은 녀석은 내 뜻을 즉각 이해하고 날아왔다. 내 왼쪽 머리가 입을 벌리자 녀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큰어른」「작은어른」「빨리」「도와줘」
걱정 안 해도 그럴 참이다. 아드하이를 먼저 태운 나는 26호에게 접근했다.
폭탄이 뿜어내는 에너지 파장 탓에 녀석의 외피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상당히 고통스러울 텐데도 녀석은 꾹 참고 다른 애들을 지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