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모프.’
메가콥의 영토이자 여왕이 죽은 장소, N-51 성계에서는 전투가 한창이다. 지배파의 수장 아키라가 주관한 토벌대가 악명 높은 에이모프 랭커와 싸우고 있다.
‘그래도 원하는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군.’
에이모프는 여왕에만 신경을 쓰느라 정작 아키라가 준비한 함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키라의 함정은 그나 에이모프처럼 유전자 정수를 이용하는 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그가 보유한 특전을 이용해 어렵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배파의 멤버들이 N-51에 지원 병력을 계속해서 투입하고 있다. 놈이라 해도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동맹은 여기까지다. 아키라.’
그가 지원한 병력은 에이모프와의 싸움에서 거의 다 죽었다. 추가로 더 많은 부하를 투입할 수도 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에이모프 때문에 잠시 협력한 것이지, 지배파와 함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놈들 또한 에이모프와 마찬가지로 정리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놈들이 다른 데 시선을 파는 사이, 태양계에 밑작업을….’
에이모프에 관한 생각을 그만둔 그는 다음 계획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그때 바닥에 놓인 통신용 비석이 그의 사고를 방해했다.
「메시지 도착함.」
‘음?’
그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점막이 활성화된 비석을 감지했다.
현재 그에게 연락을 취할 만한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연인이자 귀환파의 아웃스페이서 동료.
‘행성 확장 때문에 바쁠 텐데?’
한동안 연락을 못할 것 같다고 울먹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의외였다. 물론 그렇다고 연인의 메시지가 반갑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비석과 연결된 컴퓨터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응?’
예상과 달리 그에게 연락을 보낸 자는 연인이 아니었다. 그는 점막 위에 촉수를 만들어서 메시지를 입력했다.
「범호? 네가 웬일이지?」
「메시지 도착함.」
적자마자 바로 날아온 답장에 여제는 깜짝 놀랐다.
‘에이모프 토벌대에 숨어 있는 중이라고?’
계획대로라면 범호는 다른 동포가 인도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그 손님은 귀환파의 대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 계획을 세운 장본인인 범호도 늘 강조했던 사항이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계획을 변경했다.
귀환파의 수장은 지금, 전쟁이 한창은 N-51 성계에 있다.
-
고도로 응집된 에너지들이 내 몸을 때린다.
몸에 두른 갑피와 갑각이 조금씩 깨지고, 피와 살점이 조금씩 우주로 새어 나간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회복되어야 할 상처들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에이, 모프! 랭커, 의 특전, 이야!」
전함이 발사하는 에너지 열선이 오가는 와중, 이사벨이 내게 사념파를 보냈다. 만상의 천안으로 내 몸에 발생한 이상 현상을 확인한 거다.
[즈즈(특전?)]
「유전자, 정수를 오염, 시키는 유, 전자를 만드, 는 특전이야. 그 유전자가 회복, 방해하고 있어.」
에이모프는 준성체가 될 때 독과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특성을 얻는다. 이 면역 능력이 있기에 온갖 종류의 세균, 바이러스, 기생물 등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독소가 뱃속에 들어와도 그저 소화되는 걸로 끝날 뿐, 어떠한 피해를 줄 수 없다.
‘다만 독이 아니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사벨은 내게 발생한 문제의 원인이 유전자 정수를 오염시키는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마 그림자를 잡아먹을 때 함께 획득된 것일 터.
‘포식 효과가 떴을 때 별다른 메시지는 없었어.’
에이모프가 포식에 성공했을 때는 항상 텍스트박스에 관련 사항이 출력된다. 내가 그림자로부터 강탈한 유전자 정수는 ‘울트라 컨트롤’ 뿐이다.
하나 텍스트박스에 뜨지 않는다고 해서 섭취한 먹이의 유전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의태 기관, 기생 군체, 인면충 숙주 같은 기관들이 일부를 보관하기 때문이다.
해당 기관들은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 사람이 손발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간이나 쓸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일단 먹으면 걸릴 수밖에 없는 함정.’
그림자들의 주인은 정확히 나를 저격했다.
‘게다가 용의 심장에도 문제가 생겼어.’
아까부터 흉부 안쪽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있었다. 용의 심장도 함정의 대상에 포함된 것이 틀림없다.
‘에너지 공급 상태도 엉망이야.’
대략 효과가 거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회복이 안 되는 건 그렇다 쳐도 에너지 공급이 막힌 것은 치명적이다. 내가 가진 공격 특성이나 초광속 항해는 전부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의 심장으로 유지되던 밸런스가 깨지는 바람에 ‘굶주림’ 특성의 페널티도 다시 활성화되었다. 무턱대고 힘을 막 썼다간 정신을 잃고 광기에 빠지고 말리라.
‘적을 직접 먹는 걸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긴 하지만….
저 전함들의 승무원들에게도 그림자처럼 함정을 심어 놓았을지 모른다. 함선을 먹다가 실수할 수도 있기에 섣불리 포식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한, 시간 동안, 회복, 특성 사용, 할 수 없, 으니 조심해.」
시간제한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60분 동안 회복 수단이 봉인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반면 적의 지원군은 끊임없이 이곳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 전투가 시작된 시점보다 더 많은 함선이 나를 향해 화력을 쏟아 붓는 중이다.
아직은 부상이 크지 않아 괜찮지만,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결국 이쪽이다.
그 순간, 멀리서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됐다. 일반 전함에 비해 훨씬 크고 화력도 강한 작스알파급 전함의 주포가 쏜 열선이다.
나는 생각하던 것을 멈추고 급히 몸을 피했다. 내 몸 굵기만큼이나 큰 열선이 간발의 차로 빗나갔다.
이어서 다른 전함들의 공격이 쇄도했다. 녹색 섬광이 촘촘한 화망을 이룬다. 에너지의 그물이 나를 옭아매기 위해 바짝 따라붙는다.
지금 저 속에 갇히면 큰일이다. 나는 가속해서 놈들의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났다.
그런 내 뒤로 하늘의 어머니와 ‘오른쪽 머리’가 따라왔다.
「에이모프? 그 상처는?」
깨진 갑각으로부터 피가 흩날리는 걸 본 하늘의 어머니가 물었다.
[즈즈즈 즈 즈즈즈 즈즈즈(랭커가 깐 함정에 당했어)]
「뭐?」
[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60분 동안 재생 불가. 그리고 에너지도 충전도 안 돼)]
「…….」
그녀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던 중,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사냥의 표상의 지속 시간이 다 된 거다.
크게 확대된 몸이 줄어들고, 체형과 여러 신체 부위들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을 떠보니 하늘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가진 수단을 전부 활용해서 이 흐름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와 죽음뿐이다.
‘일단 애들부터 모으자.’
뒤로 빠진 이후 적들의 공격이 뜸해졌다. 성계에 새로 진입한 함대와 함께 전열을 정리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이 틈을 타 애들과 함께 26호와 아드하이가 싸우던 곳으로 날아갔다.
아드하이와 ‘왼쪽 머리’가 상대하고 있던 초계함과 함재기들은 이미 정리된 지 오래였다. 둘은 26호를 도와 스크리머를 상대 중이었다.
제이슨을 기반으로 만든 사이킥 특화 스크리머들은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놈들은 나까지 접근하자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도망치지 마!」
26호의 촉수가 나의 침식 촉수처럼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도망치던 스크리머 2마리를 휘감았다. 그리고 붙잡은 적을 끌고 와 몸 안으로 삼켜 버렸다.
그걸 본 아드하이가 입가에 달린 촉수다발을 파르르 털었다.
「그거」「맛」「없던데」
「그르르」
「어? 큰애기 왔다!」
열심히 싸우던 녀석들이 나를 보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그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 몸이 상처투성인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큰어른?」「몸」「다쳤어?」
「나쁜애들이 큰애기 괴롭혔어!」
나를 걱정한 아드하이가 불안과 걱정이 담긴 사념파를 흘렸다. 26호도 분홍색 몸을 어둡게 물들인 채 분노했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부탁할 게 있어. 녀석들을 불러줘)]
나는 먼저 26호에게 메탈릭 그렘린을 불러달라고 했다. 초광속 항해를 방해하는 아웃스페이서가 사라졌으니 녀석들도 언제든 이곳으로 도약해 올 수 있다.
메탈릭 그렘린은 함대전에 특화된 종족이다. 메가콥과 스타유니언의 혼성함대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터.
‘랭커만 없었다면 어렵지 않게 이겼겠지.’
적들이 랭커의 지휘를 받는 중인 것은 거의 확실한 상황이다. 랭커라면 메탈릭 그렘린을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터. 처음에는 어느 정도 피해를 입겠지만, 금방 대응할 거다.
다만 내가 녀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전투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여기서 적이 모르는 변수를 투입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어.’
난데없이 메탈릭 그렘린 무리가 나타나면 당연히 적들의 시선도 분산될 수밖에 없다. 녀석들이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이쪽은 전황을 뒤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령 랭커를 제거한다든가, 적 함대의 지휘선을 무력화시킨다든가 말이다.
그리고 26호를 따르는 무리에는 워프보이가 여러 마리 남아 있다.
현재 나는 체내에 저장된 에너지를 아껴야 하는 상황. 만에 하나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녀석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게임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녀석들과 대화가 가능한 26호가 있으니, 인접 성계로 이동시켜달라는 것 정도는 부탁할 수 있겠지.
「응! 반짝이들 부를게.」
내 부탁을 들은 26호가 은색 촉수를 꺼냈다.
촉수 끝에 달린 구체에서 작은 빛이 방출되었다. 메탈릭 그렘린을 부르는 파장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계 밖을 향해 날아갔다.
‘좋아. 그리고….’
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열었다.
수많은 특성들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중 가장 먼저 얻었던 ‘강적의 증표’,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를 바라봤다.
‘여기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뒤에는 내가 특별한 장비를 포식하고 얻은 능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공허의 주사위.’
전에 시현 유진이 갖고 있던 장비를 포식해서 얻은 힘.
이 능력을 사용하면 3분간 모든 특성을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굉장히 파격적인 힘이지만, 쿨타임이 66일이나 되는 바람에 여태껏 딱 한 번밖에 못 써봤다. 지난번 마그마사우르와 싸울 때 발동된 ‘레버넌트 기관’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쓸 수 없는 상태였겠지.
‘이 힘에 대해서는 적들도 몰라.’
적들은 내가 크게 약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도 그렇고.
‘주사위를 던지기 좋은 시점이지.’
「반짝이들 왔어!」
그때, 26호의 파장과 함께 내 뒤쪽으로 푸른색 빛무리가 모여 들었다. 녀석의 연락을 받은 악명 높은 은빛 약탈자들이 보낸 신호다.
멀리 있는 적들도 낯선 이의 침입을 감지하고 견제하려 한다. 전함들이 포격을 개시하기 전, 나는 재빨리 ‘복잡화 분광체’를 사용했다.
내 정면에 여러 종류의 빛을 머금은 투명 거울이 형성되었다. 잠시 후, 전함들이 발사한 열선이 원형 프리즘을 향해 날아왔다. 거대한 투명 쟁반은 열선에 맞아 깨지기는커녕 날아온 공격을 죄다 반사해냈다.
그렇게 내가 시간을 버는 사이, 메탈릭 그렘린 무리가 무사히 도약을 마쳤다.
「■■■」
「■■?」
「응응! 나쁜애들 해치우자!」
「말」「이상해」「이해」「불가」
전함들의 공격이 멈춘다. 갑자기 나타난 적에 당황한 것이리라.
이제 이쪽에서 반격할 차례다.
메탈릭 그렘린의 키는 그리 크지 않다. 나름 큰 개체가 약 80cm에 육박하니 대부분이 어린이 정도의 크기라 보면 된다.
하지만 크기가 작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
금속 피부를 가진 이 작은 악마들은 함선들의 천적. ‘우주의 약탈자’란 별명은 결코 허명이 아니다.
우주라는 이름의 바다를 떠도는 공포의 존재들이 전진한다.
26호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녀석들은 알아서 적 함대를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