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08)

사관유학

 증기선이 파도를 헤치며 달린다.

 우렁차게 뿜어내는 연기에 하늘이 시커메졌다.

 배에는 나 말고도 중원 각지에서 뽑힌 유학생들이 함께였다.

 다들 각 지역에서는 한가락씩 하는 엘리트들.

 은근히 서로 행색을 훑으며 눈치를 본다.

 이 나이대 남자애들이 처음 모이면 하는 짓거리야 뻔하지 뭐.

 "야! 너 동이족(東夷族)이라며?"

 웬 덩치 큰 놈이 내 어깨를 툭 쳤다.

 난 배에 탄 이후 입도 뻥끗 한 적 없는데.

 어째서 이런 사정은 단톡이라도 있는 것처럼 빠르게 퍼지는 것이지.

 "청나라 국민도 아니면서 무슨 관비 유학이냐?"

 "꼬우면 홍콩 총독님한테 따져."

 "홍콩 놈이었냐? 홍콩 총독은 보나 마나 양이놈이겠지? 그놈이 뭘 안다고 청국의 내정에 간섭해?"

 "내정간섭은 개뿔."

 "뭐?"

 "홍콩 총독께서 가련한 조선인 소년의 사정을 굽어살피어 양광 총독님과의 협의 끝에 중화를 위해 언제든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전도유망한 애새끼 하나 유학 보내주는 게 내정 간섭이냐?"

 다투는 소리를 들은 다른 유학생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주변을 에워쌌다.

 내 쪽에는 안 서고 시비 거는 놈의 편에만 주르륵 서는 걸 보니 자기들끼리는 아는 사이인 모양.

 벌써 얼마간 편이 짜인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나는 짐짓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디 사람이냐?"

 "베이징이다."

 "한족?"

 "당연하지."

 놈의 뒤로 찰랑거리는 꽁지머리가 보였다.

 변발한 한족이라.

 놀려주기 어렵지 않지.

 "위대한 대명(大明)제국의 후손이셨구나."

 "그래. 이 가오리방쯔야."

 "근데 그 꼴사나운 변발은 뭐냐. 쯧쯔. 영락제(永樂帝)께서 지하에서 통곡하시겠다."

 "뭐? 금전서미(金錢鼠尾)는 마땅한 국가의 법도인데 감히 동이 주제에 법도를 모욕해?"

 "멍청한 새끼. 네가 모시는 만주족도 동이인 건 모르냐? 아이고 폐하. 당당한 대명의 후예가 돼지 꼬리를 자랑스러워합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놈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이 빵즈가!"

 불끈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털 나고 두 발로 걸어 다닐 때부터 홍콩의 뒷거리에서 허구한 날 싸움판을 벌였던 나에게는 익숙하디익숙한 상황.

 그 나날들에서 나는 절대적인 싸움의 법칙을 배웠다.

 선빵 필승.

 놈이 주먹을 뻗기 전에 먼저 휘둘렀다.

 "컥!"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녀석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이러한 조절도 나름의 숙련된 솜씨였다.

 뒤로 넘어졌다가 뒤통수가 깨지면 골치 아프니까.

 "뭐야?"

 "빵즈가 미쳤나."

 "이 새끼 주먹 쓰는 거 봐라."

 한족 놈들이 위협적으로 주위를 빙 둘러쌌다.

 하나, 둘, 셋, 넷···, 아홉인가.

 어려서부터 이방인의 삶을 살며 배운 건 결코 약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아홉 명한테 다구리를 당하면 존나게 처맞겠지만 또 그거 이상으로 죽어라 패주면 된다.

 그럼 다음부터는 감히 덤비지 못한다.

 두 주먹을 꽉 쥐고 결전을 준비하는데.

 "아냐. 자빠진 놈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 조선인은 정당방위였어."

 웬 놈이 건들건들 다가와 내 편을 들었다.

 콧물을 삼키며 갑판에 가래침을 뱉는 꼴이 양아치 같았다.

 "뭔 개소리야? 빵즈가 때리는 걸 내가 봤는데."

 "개소리는 멀쩡한 머리카락을 돼지 꼬리처럼 자르라는 법도가 개소리고. 야, 너희 다 화북(華北) 출신이지? 시발. 배알도 없냐? 한족이 뭐가 아쉬워서 만주족 흉내를 내고 다니냐?"

 오···.

 내가 얼굴까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새로 나타난 양아치의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서구식으로 깎은 머리에 잘생긴 외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훗날 국민당 정부의 수장이 되어 군벌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효웅.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였다.

 "너는 청나라 국민 아니야? 변발은 국가의 법도인데 오히려 지키는 사람을 매도하다니!"

 "청나라 국민이 아니라면?"

 "뭐?"

 "청은 시발. 난 태어났을 때부터 만주의 윗대가리 새끼들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 그런 반역적인 언동을! 인솔관님께 이를 거야!"

 "븅신. 그 나이 처먹고 우쮀쮀 이를 거야 이 지랄. 꼬우면 덤비던가."

 혼자인 주제에 아홉을 도발하는 꼴이 용맹하다 해야 할지.

 만용을 부린다 해야 할지.

 기백만큼은 바로 그 장제스가 맞았다.

 변발을 한 화북 출신 한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외쳤다.

 "야! 조져!"

 한꺼번에 여러 개의 꽁지머리가 흩날리며 평범한 체구의 장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제스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호기롭게 외쳤다.

 “아예 겁쟁이들은 아니었구나. 자, 조선인! 가보자구!”

 우리 같은 편인 거야?

 자연스레 장제스의 편이 된 내게도 변발족이 주먹을 뻗어왔다.

 까짓거 보여주지.

 홍콩 삼합회 조직원의 박투 실력을.

 ***

 "부당합니다! 저희의 싸움은 정당방위였습니다!"

 독방에 갇히고도 장제스의 텐션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치지도 않는지 방문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오히려 머릿수로 비겁하게 집단구타를 가한 건 화북 놈들이란 말입니다!"

 한동안 떠들어대도 반응이 없자 장제스는 터벅터벅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씨익 웃었다.

 "주먹 좀 쓰던데. 이름이 뭐냐?"

 "한신."

 "군신의 이름이군! 조선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거냐?"

 "우리 부모님이. 나는 홍콩에서 태어났고."

 "어허허. 사연 꽤나 있었겠어. 나는 장중정(蔣中正)이다. 저장성(浙江省, 절강성)에서 왔다."

 널리 알려진 장제스라는 이름은 그의 자(字).

 본명은 장중정이었다.

 "어어. 반갑네."

 "아까는 말을 참 잘해주었어. 만주 떼놈들의 풍습을 지킬 필요는 없으니까."

 "뭐, 그야 그렇지."

 만주족의 풍습이 차라리 귀두컷이었으면 흐린 눈으로 따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변발은 에바잖아.

 "이 나라는 틀려먹었어. 관료들은 부패했고 백성들은 노예근성에 젖었다고."

 "그래도 너나 나나 어떻게든 뭐라도 해보려고 외국으로 유학까지 가는 거잖아?"

 "허! 저 화북놈의 새끼들은 그런 의식 같은 건 전혀 없을걸. 요즘 조정에서 한창 신군(新軍)을 창설하는 중이잖아. 저놈들은 그저 외국에서 대충 놀다 돌아가서 만조(滿朝)에 아첨해 신군에 장교 자리 하나 꿰찰 생각밖에 없다고."

 그 자리 나도 하나 먹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아첨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문득 장제스가 문 쪽을 힐끔거렸다.

 밖이 조용한 것을 확인한 장제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좋아. 너는 믿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돼."

 "뭔 얘기를 하려고?"

 "중국의 미래가 걸린 일."

 "해봐."

 "청조는 위태위태하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굳건하며 황실의 군대는 비록 이빨 빠진 호랑이일지라도 그 세는 무시할만한 것이 못돼. 반면 고통받는 백성들의 산발적인 반항은 오래가지 못하고 진압되어 버리지."

 "서론이 왜 이리 기냐."

 "그런데 그런 청조를 직접적으로 무너뜨리려는 비밀 세력이 있다면 믿겠냐? 그들의 목적은 현의 곳간을 턴다거나 관리를 암살하는 따위가 아니야. 청조의 멸망을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실현할 힘을 지닌 무장혁명세력이라고!"

 뭐야.

 난 또 뭔 얘기를 그리 장황하게 하나 했네.

 "그 비밀 결사의 본부가 우리가 가고 있는 도쿄에 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중국 동맹회."

 "어?"

 장제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있었냐?"

 "응."

 "어떻게?"

 "거기 회원이거든."

 장제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동맹회원이라고?"

 "그래. 홍콩은 청의 감시가 덜해 동맹회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거든. 랴오중카이 선생님 앞에서 직접 인장을 찍었지."

 "말로만 듣던 혁명의 열사를 직접 마주하다니!"

 장제스가 흥분하여 부들거렸다.

 "그럼 그 이름 높으신 쑨원 선생님도 뵌 적이 있냐?"

 "아니. 그분은 홍콩에 오신 적은 없어서."

 나보다 세 살 위인 장제스는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동맹회의 행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 역시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일개 회원일 뿐이었지만 동맹회가 벌인 각종 봉기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장제스의 눈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똘망똘망해졌다.

 여객선의 독방에 갇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동시에 이 장제스란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 편으로 둔다?

 충동적이며 야망에 찬 자였다.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위해서라면 어떤 잔악한 과정이든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된 자.

 시대를 타고나기에 따라 자유의 등대가 될 수도, 철과 피를 숭상하는 학살자가 될 수도 있는 자가 장제스였다.

 그렇다면 적으로 둔다?

 적이라면 간단하지.

 성장하기 전에 처리한다.

 열정적으로 중국의 미래를 논변하는 스물 한살의 장제스를 보며.

 나는 도착할 때까지 생각에 잠겼다.

 ***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아시아의 희망으로 떠오른 이후.

 청에서 일로 향하는 사관(士官) 유학은 눈에 띄게 급증했다.

 하지만 선발시험까지 쳐서 뽑힌 인재라 해도 무작정 일본육사에 진학했다가는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

 예비 학습이 필수적이었다.

 몰려드는 청의 유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도쿄진무학교(東京振武學校).

 일본의 학제에서 육군유년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을 배우는 학교였다.

 육사 진학을 위해서는 먼저 진무의 졸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쿄 신주쿠의 진무학교.

 간소한 입학식을 마치고 진무의 건물에 발을 디딜 때까지만 해도 본격적인 시작인 것 같아 두근거렸으나.

 그 기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진무는 상상 이상의 똥통이었다.

 영국의 학제를 따르는 홍콩의 중학교도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진무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선녀에 양반이었다.

 위치가 일본에 있고 이것저것 서양 과목들을 누더기처럼 땜질한 커리큘럼이 다를 뿐.

 학교의 기본적인 골자는 중국의 학당을 그대로 옳겨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일본인 학교장은 이름만 걸쳐둔 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중국인 학생감이 학교의 모든 행사를 주재했는데 아주 제멋대로였다.

 입학 날짜에 따른 기수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쳐도 동기간 반 배정에까지 계급이 나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로는 수준별 학습을 위해 반을 나눈다 했지만 돌아가는 방식이 중국식 관료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이 한신? 너는 3급반이다.”

 “왜 3급입니까? 유학생 선발시험 성적은 양광(兩廣)에서도 상위권이었다고 아는데요.”

 “선발시험 성적으로 반이 나뉘는 게 아니야.”

 “그럼 뭐로 나뉩니까?”

 “말이 많느냐! 3급반이라면 3급반이라고 알아들어라!”

 저장성에서 15등을 했다는 장제스도 3급반으로 쫓겨 들어왔다.

 반면 여객선에서 내게 시비를 걸던 한족들은 1급이나 2급반에 배정되었다.

 유학생도들의 반배정이 끝나자 그 기준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1급반의 생도들은 팔기군(八旗軍) 출신의 만주족이 대부분이었다.

 팔기군은 만주족 직계의 군정 조직. 청조가 흔들리는 중에도 황실에 충성하는 군대였다.

 2급반은 화북에서 온 생도들이 많았는데 신식육군, 즉 북양군(北洋軍) 군부 출신의 한족들이었다.

 팔기군의 배후에 청 황실이 있다면 북양군의 배후에는 청의 군권을 틀어쥔 위안스카이가 있으니 2급반 놈들이 기세등등 활개 치며 다니는 것도 당연했다.

 3급반은 나와 장제스를 포함하여 대체로 화남 출신이었지만 그보다는 1급반과 2급반에 들지 못한 떨거지들을 몰아넣은 성격이 강했다.

 대단한 재력이 있는 것도, 뒤를 봐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진무학교에서도 3급반은 찬밥신세였다.

 반의 급수 차이는 모든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관비에서 학비를 제하고 용돈이 나왔는데, 그 액수부터 달랐으며.

 숙소의 책상과 의자 개수, 침상 너비까지 무엇하나 차등이 없는 곳이 없었다.

 아침점호가 끝나면 1급반부터 순차적으로 배식에 들어갔는데 3급반의 차례가 올 때쯤이면 맛난 반찬들은 죄다 털려 새똥 같은 고기 조각을 놓고 전투적으로 쟁취해야 했다.

 이 중국놈들은 소유의식 자체가 희미한지 식판에 반찬을 담는다고 내 것이 되는 게 아니었다.

 조금만 주의를 딴 데 기울이면 서슴없이 젓가락이 건너와 내 고기 조각을 강탈해가곤 했다.

 자연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집단에서의 생존을 우선시하게 되었다.

 공공연한 차별.

 자연스레 파벌이 나뉘었다.

 만족을 중심으로 팔기파가 학교의 패권을 쥐고 그걸 북양파가 견제하는 모양새였다.

 반면 떨거지들이 모인 3급반은 지리멸렬하여 파벌이라 부르기도 민망하였다. 서로 다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번잡스러운 진무의 초반 학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은 별다른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있었으나.

 슬슬 진무라는 아사리판에서 두각을 나타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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