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08)

진무의 선지자

 진무학교의 수업은 일본의 여타 구제 중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어와 한문, 과학과 수학, 역사와 지리 등을 주로 배웠다.

 반면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군사학 수업은 별것 없었다.

 기껏해야 일본인 무관 교관이 들어와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읊으며 사상적으로 주입하려고 떠드는 식이었다.

 청에서 온 유학생도들을 위한 학교이다 보니 역시 가장 주가 되는 것은 일본어 수업.

 생전 다른 나라의 외국어를 배우는데 취미가 없던 유학생들은 생고생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영국령 홍콩의 자유항에서 온갖 나라의 상인들과 부대끼며 외국어 실력을 길러온 내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표준 중국어와 광둥어, 영어가 홍콩인의 기본이라면.

 조선어는 당연하고 육사 입학을 염두에 두어 특히 일본어도 열심히 공부해온바.

 그 외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의 언어도 기초적인 회화는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론 일어는 유학생도 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고비일 뿐. 진짜 관문은 따로 있었다.

 자연과학이나 기하, 대수 등의 수업은 장제스도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대는 거냐고 한탄할 만큼 이질적이었다.

 평생 학당에서 팔고문이나 시첩시 따위를 지어오던 유학생도들로서는 경험과 증명에 의거한 합리적 사고 자체가 낯설 터.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생도들이 그나마 할만해 하는 과목이 한문이었다.

 중국인 교사가 들어와 고서를 가르쳤는데 그 방식이 아주 전통적이었다.

 비록 진무학교가 일본에 자리하고 있다고는 해도 청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덕분에 청의 한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와 선생 노릇을 하며 옛 서당교육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학당에서 공부했던 놈들은 자기들이 잘할 수 있는 수업이니 좋아라 했으나 나로서는 지루할 따름이었다.

 한문 시간에는 항상 작문을 시켰는데 그 주제가 하나같이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운종룡풍종호론(雲從龍風從虎論,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는 논리)이나.

 파교풍설중려자상론(灞橋風雪中驢子上論, 파교 위를 걸어가는 당나귀 위에서 시를 읊는 논리) 따위의 글귀를 가지고 장문의 글을 써 내려가야 하는 지루한 수업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한문 시간.

 작문 주제를 내건 교사가 잠시 나간 사이, 장제스가 여느 때처럼 투정을 부렸다.

 “씨발. 언제까지 이런 엿 같은 옛날 옛적 고사나 붙잡고 있어야 돼. 당나귀 위에서 시를 읊는 거에 무슨 대단한 이치가 있다고 아무거나 죄다 론(論)을 갖다 붙이냐고!”

 “장중정. 저 새끼 또 투덜댄다.”

 “투덜댈만 안 하냐? 이 시간에 서양의 신식 학문을 한 글자라도 더 공부하는 게 낫지.”

 “지랄. 그런 새끼가 쉬는 시간마다 마작을 쳐대고 온종일 여자 얘기밖에 안 하냐?”

 “야 씨. 쉬는 시간에 쉬는 게 잘못이야?”

 일전에 여객선 위에서 다투었던, 베이징에서 온 변발족이 장제스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1급반과 3급반이 같이 듣는 과목이라 무슨 말만 하면 3급반을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푸하하 새끼. 언제는 중국의 미래니 뭐니 늘어놓더니 요즘 조용하더라? 야, 그냥 솔직해져라. 네 작문 실력이 형편없고 수업도 제대로 못 따라가겠으니까 허구한 날 하는 게 불평인 거잖아?”

 “뭐? 뒤질래?”

 “쳐보든가. 학교에서 폭력을 휘둘렀다가 어떻게 될 줄 알고? 3급반이 1급반을 쳤다가 뒷감당 가능하겠어?”

 “이, 이 새끼가···!”

 장제스는 당장 달려들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었으나 덤벼들진 못하였다.

 상대는 상급생들과 학교의 비호를 받는 팔기파 소속이었다.

 이전 여객선에서와 같이 마구잡이로 주먹을 올려붙일 수가 없었다.

 분에 차 책상을 내리치는 장제스를 보는 돼지 꼬리들이 무리 지어 깔깔 비웃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중정의 작문 실력이 병신인 건 맞지.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주제가 병신인 것도 맞다.”

 돼지 꼬리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빵즈는 닥쳐라. 니가 주역(周易)을 알아?"

 “내가 주역을 모른다면, 나보다 한 번도 성적이 잘 나온 적이 없었던 네 점수는 뭐냐?”

 “그, 그건 니가 저번 시험에 운이 좋았던 거다! 다시 시험을 치면 내가 질 리가 있냐!”

 “그러시겠지.”

 “젠장! 중국의 역사도 제대로 모르는 조선놈이 주역의 고사를 모욕하다니.”

 “아무렴 뭘 골라도 호랑이 똥구멍을 따라가는 바람보다야 낫지 않겠냐.”

 벌컥.

 문이 열리고 교사가 들어왔다.

 “왜 이리 시끄럽느냐.”

 “선생님! 한신이 작문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답니다!”

 “뭐라? 정기위물유혼위변론(精氣爲物遊魂爲變論, 정기는 물질이 되고, 떠돌아다니는 혼은 변화의 근본이 된다는 논리)은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원리를 축약한 이치일진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리냐?”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아무 주제를 골라도 훨씬 좋은 작문 주제를 발제할 수 있답니다!”

 “그런 오만한···! 한신, 저 말이 사실이냐?”

 학급 생도들과 교사의 눈이 내게 쏠렸다.

 한문 교사는 진무학교에서도 특히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한학자였다.

 게다가 청의 주일공사(駐日公使)와도 연줄이 있어 잘못 보이면 자칫 유학 생활이 크게 꼬일 수 있었다.

 장제스가 날 보며 작게 도리질했다.

 나는 그런 장제스를 무시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네.”

 장제스를 포함하여 변발족도 눈이 동그래졌다.

 되는대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어 날 모함할 작정이었는데 설마 내가 인정할 줄은 몰랐겠지.

 “고얀 녀석. 지난번 작문이 훌륭하여 내가 그토록 칭찬했건만! 역시 오랑캐의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반항하는 건 아니었다.

 정반대. 나의 우수함을 각인시킬 작정이었다.

 신해혁명 이전까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려면 일반적인 코스로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문제였다.

 첫 단계에 불과한 진무학교 조차도 수업연한이 3년이었으니.

 여기서 특별히 배우는 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구몬수학 따위에 내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3년의 기한을 최소 반 이하로 줄인다.

 목표는 진무의 조기졸업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험성적을 잘 받는 따위의 수동적인 행동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대신 한신이라는 홍콩에서 온 이방인이 얼마나 똘똘한 놈인지.

 얼마나 반짝반짝 빛이 나는 놈인지 증명해야만 했다.

 그래야 진무라는 똥통에서 최대한 빨리 건져내 줄 테니까.

 "오랑캐 핏줄이라니요. 그럼 지금 오랑캐의 나라에 건너와 임시 교사직을 맡고 계신 선생님은 뭘 하시는 겁니까?"

 "뭐라?"

 "오랑캐의 밑에서 월급을 받아서 깨끗한 옷도 사 입고 비싼 시키시마(敷島) 담배도 피우시잖습니까. 설마 아직도 천조의 나라에서 시혜를 베푸느니 뭐니 하는 장광설을 늘어놓진 않으시겠지요. 전통적인 중화의 논리대로라면 이젠 청이 오랑캐가 되어버린 꼴이니까요."

 교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한신···. 네놈 정신이 나갔느냐?"

 "양무운동이 일어난 지 벌써 반세기가 다 되어가지만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이유를 아십니까? 여전히 판에 박힌 구시대적 교육 때문입니다. 중체서용(中體西用). 뜻은 좋습니다, 중국의 체제를 지키며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니요. 하지만 선생님. 세계는 그리 물렁하지 않습니다. 국체(國體)를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어요."

 한문 교사가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얼굴의 주름이 가늘게 떨렸다.

 억눌린 음성이 들려왔다.

 "국체를 포기한다고? 네놈은 중국의 정신을 부정할 셈이냐?"

 "중국의 역사는 언제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생각하십시오. 그들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하였습니까? 중국이 언제부터 비대한 몸뚱아리에 집착하며 분열을 겁냈습니까? 중국에 진정 국체가 있다면 그건 고지식한 옛 말씀 따위가 아닌 거리낌 없이 신세계에 발걸음을 내딛는 도전정신일 겁니다."

 "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구나! 네놈이 말하는 개혁은 보나 마나 천륜을 저버리는 양이놈들의 방식이겠지. 그 말은 곧 성현의 도를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얘기렷다!"

 "안될 것 없지요."

 교사는 날 노려보다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난폭하게 끌고 가 교단 위에 세웠다.

 "그럼 거기서 네가 가르쳐보아라! 모두 집중해! 위대한 조선의 선지자께서 우매한 중국인들을 계몽하러 납시었으니!"

 많은 학생 앞에 다짜고짜 세우면 내가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 할 거라 생각하나?

 하지만 이를 어쩐다.

 이 상황이야말로 바라 마지않던 그림인데.

 나는 망설임 없이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 섰다.

 영문과 한문을 혼용하여 큼지막하게 썼다.

「Clausewitz論(클라우제비츠론)」

 다음엔 작은 글씨로 각론을 적었다.

 전쟁의 본질.

 1. 전쟁은 자국의 의지를 적에게 관철하기 위한 폭력 행동이다.

 2. 전쟁은 정치성, 개연성, 폭력성의 삼중성을 띤다.

 3.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며 따라서 정치의 연속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서유럽에 나폴레옹이라고 하는 희대의 군략천재가 나타났다. <전쟁론>은 그러한 나폴레옹의 전법을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가 학문적으로 일반화한 논리다.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전쟁과 현실전쟁을 구분하면서 정치와 연관하여 전쟁의 본질을 설명하였다. 폭력성을 강하게 띨수록 절대전쟁에 가까우며 개연성을 띨수록 현실전쟁에 가깝다. 그가 정의한 전쟁의 이치에 관해 각론을 참고하여 추측하고 논해라."

 짧은 강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연필을 들었다.

 바로 필기하여 들어가는데.

 학생들이 모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우리는 지금 배우는 위치. 지식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생각하는 논리를 솔직하게 작성하면 된다."

 장제스가 연필을 들었다.

 무작정 써 내려가는 모습이 기특했다.

 장제스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끄적거리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삽시간에 서걱거리는 필기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그 한복판에서 한학 교사만이 얼이 빠진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한문 수업을 시작으로 몇 개의 수업에서 더 날뛰었다.

 일어 시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두고 일본인 문학교사와 비평 대결을 벌여 승리하였다.

 어떻게든 고양이의 내레이션에서 교훈적인 내용을 찾아내려는 교사의 시도를 하나하나 모두 분쇄해버리자 점점 얼굴이 시뻘게지던 그는 종래에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이 털짐승은 그저 비열하고 뻔뻔하게 생을 이어 나갈 뿐이야···! 더럽고 불결한 주제에 자기 좋을 대로 자유만을 탐하는 빌어먹을 칙쇼란 말이야···!"

 라고 폭주하고 말았다.

 과학 시간에는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모호하게 사용되던 몇 가지 용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였다.

 다 좋았는데 과학 교사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자꾸 질척거리는 게 영 불편했다.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초과학이 중요한 법.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아는 교수가 있는데 자네 같은 실력 있는 인재를 애타게 찾고 있다네.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 언제 같이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떤가?"

 아 대학원 안 가요.

 이어진 수학 시간. 일본 학제의 진도를 3년을 뛰어넘어 미적분을 선보였다.

 누구에게, 어디서, 어떻게 예습했냐는 교사의 질문에 쿨하게 답해주었다.

 "그냥 되던데요."

 진무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10기의 3급반에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저 초한지의 한신이 조선인으로 현신해 중국의 대장군이 되려 한다는 괴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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