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의 선지자2
"에이. 엿 같은···."
진무의 학생감 양쭝샹(楊宗祥)은 입맛이 썼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욕이 나왔다.
양쭝샹은 야심이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총장이 목표였다.
목표를 위해 베이징의 정치판에서 굴렀다.
조정의 권력자들과 매일 같이 술자리를 벌이며 뇌물을 바쳤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가능할 줄 알았다.
그래서 머나먼 타국으로의 발령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가서 몇 년만 고생하면 총장 자리가 주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진무의 학생감으로 재직한 지 벌써 6년.
술자리에서 어깨동무하고 호형호제하던 대신들이 연락이 뜸하다.
얼마나 더 있으라는 얘기도 없다.
기약 없이 기다릴 뿐이다.
양쭝샹은 자신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괜히 고관들이 어떻게든 베이징에 붙어있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진 순간부터 자신의 자리는 벌써 다른 놈이 꿰차고 있는 것이다.
비정한 중국 관료사회의 참맛을 일본에 와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쩌다가 내려오는 지령은 항상 같았다.
유학생들이 타국에서 공부하며 자칫 서양의 자유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감시라하라는 내용.
혹은 만주족 유학생 중 누가 누구의 자손이니 잘 대접하라는 식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자연히 학생감의 업무 따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그래도 자신은 양반이라 생각하는 양쭝샹이었다.
일본인 학교장은 일주일에 한 번이나 출근하면 다행이었으니.
교관들의 불평불만이 심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찌됐건 학교는 굴러가니까.
그런데 근래 들어 10기생 중 한 명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가 교관들 사이에서 자꾸 터져나왔다.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지만 황족 생도들까지 다이렉트로 불만을 고하니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양쭝샹은 놈을 호출하였다.
기다리는 동안 대충 신상 명세를 훑었다.
문이 열리고 놈이 들어왔다.
간단한 경례.
앉으라는 말도 안 했는데 소파에 털썩 자리를 잡는 것이 고까웠다.
"한신?"
"예."
예상과는 조금 다른 용모였다.
들리는 얘기만 놓고 보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시위 한복판에 서 있을 혁명의 투사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 나타난 놈은 그냥 한량 같았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조선 민족의 혈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서양식으로 짧게 깎은 머리가 거슬렸다.
특별히 건들거리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여유로운 분위기가 뭔가 보고 있으면 열받는 느낌이었다.
"요즘 네 이야기가 자주 들리더군."
"···."
"선생들이고 학생들이고 죄다 한신이란 놈이 어쩌고저쩌고···, 귀찮아 죽겠구나."
"···."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데도 조용히 있으니까 더 열받는 느낌이었다.
"1890년 홍콩 침사추이 출생···. 조선인이 무슨 수로 관비 유학을 온 거지? 그것도 육사의 예비학교인 진무에 입학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유학을 온건 네놈인데 무슨 남 얘기하듯 말하고 있느냐."
"학감님이야말로 입학을 허락하신 장본인인데 무슨 남 얘기하듯이 말씀하십니까."
과연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놈이었다.
"확실히 조선인은 건방지구나. 왜 불려왔는지는 아느냐?"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네 죄목을 고해봐라. 듣고서 합당한 벌을 내릴 테니."
"벌이라니요. 뭔가 착오가 있는데요."
"무슨 착오?"
"저는 벌이 아니라 상을 짐작하고 왔습니다."
양쭝샹은 일시에 판단이 되지 않아 멍해졌다.
이 가오리방쯔가 뭐라는 거야?
"상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간 진무에서 수학하며 학업을 열심히 증진하였으니 마땅히 상을 받으리라 짐작하고 왔지요."
"허허. 이놈이 정신이 나갔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이놈의 성적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실은 그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10기 중에는 압도적 1등이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명문학당을 졸업한 양쭝샹으로서는 이깟 똥통 학교에서 1등을 하든 말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조정에서 내려온 지침대로 사상이 문란한 생도를 걸러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직 총장 자리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않은 양쭝샹이었다.
조정의 지침을 이행하다 보면 보답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으니.
진무의 임기가 언제 끝날지는 기약 없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여기 쌓인 건의서를 봐라. 죄다 네놈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너는 벌을 받을 거야.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여 경우에 따라 퇴학 처분을 내릴 수도 있음이야."
"어떤 사안이 있는지요."
이놈은 퇴학 운운해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양쭝샹은 수북이 쌓인 아무 종이나 집어 보였다.
"자, 봐라. 이건 량(梁) 선생의 건의서로군. 한문 시간에 수업을 거부하고 혼란스러운 말로 학급을 어지럽혔다. 주역에 적힌 선현의 고사를 부정하며 중국의 국체를 부정하였다라···. 이게 정말이냐?"
"예."
"뭐? 국체를 부정했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을 선생이 멋대로 모함하는 경우는 흔했다.
따라서 건의란 것도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했다.
정말이냐는 물음도 단순한 치레였을 뿐 정말로 예라는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 말이 진실이라면 본국으로 송환할 수밖에 없다. 네 잘난 유학 생활도 끝이겠지."
"청으로의 송환 말입니까?"
"그래. 네 사상을 의심하는 선생들이 즐비하다. 같은 생도들 사이에서도 계속 말이 나오고 있어. 그중에는 황족까지 있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베이징으로 압송될 수도 있다."
잔뜩 겁을 주었다.
과연 놈이 도리질 쳤다.
그런데 잘못을 비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놈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베이징에 갈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따로 있지요."
"생도들 간의 싸움이냐? 아서라. 다른 생도를 모함한다 해도 먹히지 않을 테니."
"다른 생도를 말함이 아닙니다."
"그럼 선생을 모함할 생각이냐? 됐다. 그냥 조용히 처분을 받아들이는 게 이로울 거다."
"선생님을 말함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누굴 말하는 거냐?"
"학감님입니다."
"나?"
"예."
나라고?
양쭝샹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이놈이 미쳤나.
더 두고 볼 것 없이 놈을 쫓아내려는데.
"학감님은 베이징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를 노리신다고 압니다."
"···어디서 들었느냐?"
"진무 생도라면 모를 수가 없지요. 소문이 파다합니다."
뜻밖의 말에 양쭝샹은 당황했다.
이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베이징에 갈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학감님이 가셔야지요. 그리고 저는 어떻게 하면 학감님이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에 오를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네가 안다고?"
"예."
술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꼭 취한 것만 같았다.
양쭝샹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놈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저 베이징의 돼지 새끼들, 어떻습니까?"
"뭐?"
"해가 뜨면 대가리에 면도칼부터 들이미는 돼지 꼬리들 말입니다. 종일 하는 거라곤 양이의 문물이 들어와 지배력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것뿐이지요. 민권이 자라나는 새싹을 뿌리째 뽑으려고 온 중원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덤입니다."
"네, 네놈. 지금 황실을 모욕하는 거냐···?"
놈은 들은 채도 안 하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농사도 지어보지 않은 돼지 꼬리들이 넓디넓은 중원 땅에서 새싹을 제대로 골라낼 수나 있겠습니까? 이미 중국은 격동하고 있습니다. 혁명이 머지않았습니다."
"혁명이라니! 네녀석, 반청 혁명분자였구나. 어떻게 관비 유학생들 사이에 잠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당한 징벌을 받을 것이야."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면 청은 붕괴할 겁니다. 기존의 지배 세력은 완전히 물갈이 될 테고 필요한 고급 관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겠지요. 예를 들면 경사대학당의 총장 자리같은···."
"···닥쳐라! 이 혁명분자야···!"
"학감님. 줄을 잘 타십시오. 만조의 동아줄은 썩은 동아줄입니다. 돼지 꼬리들이 줄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놈은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다.
단지 처음과 같이 가만히 앉아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양쭝샹은 마치 흔들리는 격랑의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평생을 보수적인 중국 관료사회 속에서 자란 그였다.
일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놈의 말은 단박에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가슴속에서는 의구심이 커져만갔다.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외쳤다.
"그, 그 보장이 어딨느냐?"
"보장이요?"
"그래! 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붕괴한다는 보장이 어딨느냔 말이다. 저 반세기 전의 봉기 때도 온 나라에 태평천국기가 나부꼈지만 결국 철저하게 패망하였느니라."
"그 보장을 보여드리지요."
"네가 무슨 수로?"
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3년이 필요합니다. 그럼 혁명을 보실 수 있을겁니다."
"네가 혁명을 일으키기라도 한단 말이냐?"
"혁명은 개인이 일으키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흐름을 예측하고 응당 걸맞은 준비를 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진무에서도 몇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흥. 무슨 준비?"
"3년의 기한 중 진무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습니다. 속성과정을 밟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가까스로 조금 진정이 된 양쭝샹은 머리를 굴렸다.
썩어들어가는 줄 대신 새 줄을 붙잡으라는 진언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양쭝샹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평생을 황실에 굽실거려 왔는데 조금 전 놈의 말은 전혀 불경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얼마간 통쾌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어찌 됐든 학감님은 손해 볼 것 없으니 말입니다. 3년의 기한 동안 학감님은 그저 평소와 같이 조정과 연락을 취하시면 됩니다. 대신 원하신다면 물밑에서 중국 동맹회와 교류할 수 있는 연줄을 만들어드리지요."
중국 동맹회는 양쭝샹도 아는 이름이었다.
이 시대 가장 유명한 반청인사 쑨원이 만든 혁명단체가 동맹회였으니.
정말 손해볼 것 없지 않은가.
앞에서는 만조에 충성하는 척하고.
뒤에서는 혁명 세력에 이름을 올려놓는다.
이후 혁명이 터지면 신정부에 참여하여 고위직을 차지하고.
혁명이 터지지 않으면 매몰차게 손절하면 된다.
워낙 성적이 좋은 놈이니 이례적이긴 하지만 조기졸업을 시킨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계산을 마친 양쭝샹은 고개를 들어 한신을 보았다.
무채색의 까만 눈동자.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밤하늘처럼 깊게 보였다.
눈동자 안에서 반짝이는 별빛을 본 것 같기도 하였다.
양쭝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허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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