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한상극
신주쿠의 느지막한 오후.
골목에 쪼그려 앉아 사쿠라(櫻花) 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싼 맛에 피우는 담배였다.
생활은 순조로웠다.
이대로면 육사 출신의 전도유망한 엘리트가 되어 청에 돌아가자마자 스카우트 세례를 받겠지.
이 시대 청의 군부는 복마전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군벌로 성장할 야심가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당연히 어떻게든 뛰어난 인재를 채용하려 안간힘을 쓸 터.
퉤.
나도 모르게 침을 뱉었다.
장제스와 오래 지내다 보니 닮는 건가.
아니야.
그보다 사쿠라의 쓴맛 때문이다.
역시 싸구려는 끝맛이 안 좋아.
순조로운 생활과는 반대로 나는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천치메이와의 마작에서 왕창 딴 이후부터였다.
없을 땐 모른다고.
관비로 나오는 25엔. 그중 학비와 기타 생활비로 23엔을 빼고, 남은 2엔으로 잘도 생활해 왔었는데.
단번에 40엔이 넘는 돈을 따니 이걸로 뭘 할지 자꾸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뭘 해도 애매했다.
단순 군것질거리로 써버리기에는 많은 돈.
그렇다고 사업을 벌이기에는 또 너무 적었다.
자연스레 시대를 한탄하게 됐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곤 해도 여전히 20세기 초의 자본주의는 어린애들 소꿉장난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짧은 시간에 돈을 불릴 만한 방안이 생각만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이 미국 월스트리트라면 또 모르겠지만 도쿄의 증권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뗐을 뿐이었다.
러일전쟁 승전 이후 주가가 치솟았었으나 지금은 안정세에 접어든 지 오래였다.
기업에 가치투자를 하려 해도 일본의 조금이라도 유망한 기업은 죄다 미래에 전범기업이 될 운명.
이게 맞나 의구심이 든다.
자연히 눈이 뒷길로 빠졌다.
자꾸만 도박장을 출입하게 되었다.
평일에는 학업에 충실하다 주말이 되면 신주쿠의 거리로 출근하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다.
아쉽게도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마작이 대중화되기는 이전이나 그것 말고도 돈을 벌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주사위를 굴리거나 화투 등을 쳤는데 마작만큼은 아니어도 소소하게 벌 정도는 되었다.
가끔 투견에도 걸어보았으나 역시 내 손으로 하는 게 아닌 도박은 승률이 그저 그랬다.
꽁초를 비벼끄고 일어섰다.
쪼그려 앉았던 다리가 저렸다.
"왜 이리 안 와."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땅콩이나 좀 사오겠다던 장제스였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다음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담배나 바꿔볼까.
사쿠라 말고 시키시마로.
가게에 가까워가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낮게 으름장 놓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야. 너 요즘 얘기 존나 많이 나와. 알어?"
"예."
"안다고? 아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거냐?"
"아, 아니. 모릅니다."
"몰라? 세 살 먹은 애새끼도 아는 예의와 법도를 너는 그 나이 처먹고도 몰라?"
빼꼼 들여다보니 장제스가 몇 명의 사내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장제스 점마 왜 저리 저자세지. 그 성깔에 어지간해서는 순순히 당해줄 놈이 아닌데.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사내들 중앙에 덩치 큰 돼지가 한 마리 서 있었으니.
아이신기오로 시치아(愛新覺羅 熙洽).
8기의 상급생이자 만조의 방계 황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무 팔기파의 대가리였다.
"외출은 혼자 나왔냐?"
"···예."
"지랄. 니랑 맨날 같이 다니는 놈 있잖아. 어딨냐? 솔직히 불어라."
"저 혼자입니다."
"말 안 듣네 이 새끼."
제스형···.
날 위해서···?
아쉽게도 눈물은 나지 않네. 그까짓 내 행방 따위 밝혀도 상관없는데.
"장중정. 너 바오딩무비학당(保定武備學堂) 출신이라며? 그럼 대충 돌아가는 꼴도 알텐데. 졸업하고 임관할 때 불이익받기 싫으면 생각 잘해라. 장성 라인에 내가 아는 분들이 쫙 깔려있으니까."
"···."
"좀 고분고분하게 굴라 이거야. 고개를 숙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네 선조도 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뭐 그렇게 고집을 피우냐. 역사를 봐라 인마. 한족의 민족성은 순응하는 거란 말이야."
이크.
저건 장제스의 발작 버튼인데.
가만히 듣고 있던 장제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멀리서도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이 전해져왔다.
"그 말 취소하시오."
"뭐?"
"한족은 순응하지 않소."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만족의 부정한 압제는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을 거요."
시치아를 비롯한 8기생들이 서로 고개를 돌아보았다.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곧 시작될 집단구타를 예고하는 듯했다.
더 숨어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내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시치아가 활기차게 소리쳤다.
"왔네. 네 친구 왔다. 어이! 어서오라구!"
"날 아쇼?"
시치아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지 그럼. 한신. 맞지?"
"맞지."
"하, 이 조선놈은 싸가지를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네. 일본에 팔아먹었나."
8기생 무리가 낄낄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넌 누군데?"
"나 몰라?"
"몰라."
"날 모른다고?"
"어."
시치아의 입가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이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확실하다. 빡이 돈 것이다.
"그래서 경례도 안 하는 거냐?"
"누군지 알려줘야 예를 차리든 하지."
"좋아. 내 인내심을 시험해보자구. 난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다. 진무학교의 8기 생도고."
"선배님이셨네."
"알았으면 경례해라."
나는 뜸을 들이며 팔을 들어 올릴 것처럼 기지개를 켜다 슬쩍 내려버렸다.
"에이, 선배님. 여긴 학교도 아니고 밖인데 뭘 여기서까지 경례하래."
"경례."
"안 해."
"경례!"
"시른데."
시치아는 그때까지도 잡고 있던 장제스를 홱 밀쳤다.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처음 진무에 방쯔하나가 들어왔다고 했을 때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 그냥 별별 인간을 다 받는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었어."
"별별 인간이라니 어감이 좀 그렇네."
"그런데 자꾸 이상한 얘기가 떠돌더군. 한신이 어쩌고저쩌고···, 네가 전략의 천재라고? 감히 가오리방쯔 따위가 국사무쌍의 명장 한신의 이름을 사칭하다니!"
"사칭 아냐.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야."
"너는 오늘 뒈졌다."
시치아가 솥뚜껑만한 주먹을 들고 달려왔다.
패거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놈들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골목에 들어올 때 보아둔 각목을 집어 들었다.
바로 시치아의 대가리를 후려쳤다.
빡!
맨질맨질한것이 타격감이 아주 좋았다.
"악!"
이마를 감싸 쥐고 시치아가 쓰러졌다.
뒤이어 난투가 벌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난투라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후려갈기는 형태의 싸움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긴 사거리의 각목은 거진 무적의 병기였다.
붕붕 휘두르기만 해도 가까이 다가오질 못했다.
"한신 네가 그러고도 학교에 돌아가서 무사할 것 같으냐?"
"뭘? 싸움 건 쪽은 너넨데."
"이렇게 선배한테 개기는 놈이 어디 있냐고!"
"애초에 진무는 사관학교도 아니야. 선후배를 나눠 경례하는 것 따위 똥군기일 뿐이다."
한참 드잡이질을 하던 8기생들은 얼마 안있어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올라왔다.
끝내 욕지거리를 하며 도망가는 꼴이 고소하였다.
8기생들이 사라진 골목.
장제스가 다가왔다.
"이야. 싸움 잘하는 건 알았는데. 이건 뭐냐. 너 어디 조폭 출신이라도 되는 거냐?"
어. 조폭 맞아.
라고 대답하기는 좀 그랬다.
"너야말로 무슨 관우가 환생한 줄. '저 혼자입니다.' 이러네. 의리남이야 아주."
"관우는 너지. 나는 각목이 그리 센 줄 처음 알았다. 이 각목, 학교에 들고 가서 청룡언월도로 만들어야겠어."
"그래라."
잠시 침을 삼킨 장제스가 말했다.
"근데 우리 이제 어떡하냐?"
"뭘?"
"학교에 돌아가서 이제 어쩔 거냐고."
시치아를 비롯한 8기생들을 두들겨 팬 것까진 좋았지만, 학생감이 커버쳐주는 데도 한계가 있을 터.
대뜸 팔기파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면 학교생활이 매우 많이 고달파질 것은 틀림없다.
"생각이 있어."
"뭔데."
나는 장제스에게 청룡언월도를 건넸다.
"일단 관우는 너 해라. 나는 제갈량 할 테니."
"엉?"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아니 진무삼분지계(振武三分之計)다. 팔기파와 북양파가 다투는 진무에 새로운 파벌을 만드는 거야. 일명 혁명파다."
"조, 좋아! 근데 어떻게?"
"혁명 의식을 고취시켜야지. 일단 종이랑 붓이 필요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제스가 빨빨거리며 가게로 뛰어갔다.
***
언제부턴가 진무에 괴문서가 떠돌았다.
이름하여 <멸한책략(滅漢策略)>.
처음 문서를 받아든 시치아는 열성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이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수소문해보아도 문서를 쓴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족했다. 마음에 꼭 들었다.
자신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느낌이었기에.
발췌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근래에 신정의 시행이 불가피해 학교를 만들어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의 일을 했다. 하지만 유학생의 절대다수는 한족이며 그들은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정부에 적대한다··· 중략 ···유학생들의 지식이 진보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그들의 활동을 엄금해야 한다. 특히 관비 유학생의 경우는 비밀경찰을 붙여 은밀히 감시하되 불온한 언동이 발각될 시에는 즉시 귀국시켜 처벌해야 한다. 나아가 장교 후보생은 오직 8기군 출신에 국한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치아는 <멸한책략>을 품속에 넣어서 항상 가지고 다녔다.
똥 싸면서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녀석이 <멸한책략>을 들고 오는 걸 보았다.
"야, 너 그 책 어디서 났냐?"
"주웠어."
"어디서?"
"변소에 떨어져 있던데. 나는 네가 똥 싸다가 잃어버린 줄 알았지."
자신의 것은 멀쩡했다.
새로운 판본이 나타난 것이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새로 주운 놈도 팔기파였기에.
하지만 <멸한책략>의 판본은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지 점점 늘어갔다.
하나둘씩 팔기파 말고도 읽는 놈들이 늘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가장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놈의 손에 <멸한책략>이 들어갔으니.
"저 악랄한 만주족이 하는 짓을 봐라! 이런 꼴을 당하고도 한족이 참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냐!"
장제스.
그 망할 자식은 선동의 귀재였다.
민족의식의 고취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장제스의 주위로 한족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그리곤 곧 세력화했다.
"혁명파라고? 미쳤나 10기 새끼들이."
"10기뿐만이 아니야. 9기와 8기에도 합류한 애들이 있다. 쪽수가 너무 많아. 여론도 안 좋고."
"여론은 싸발. 다 족치면 돼."
"어떻게? 북양파 새끼들도 혁명파에 마음이 동하는 거 같던데. 이대로는 우리가 족치게 생겼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시치아는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멸한책략>도 꼴 보기 싫어졌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이 손뼉 치며 호응했던 <멸한책략>의 책략이 다시 읽어보니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한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신.
전략의 천재라더니.
이 일의 배후에 놈이 있는 것은 아닐까.
곱씹는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이 앞선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별수 없이 시치아의 팔기파는 잔뜩 웅크렸다.
팔기파는 <멸한책략>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간 진무에서 누리던 특권을 얼마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다른 파벌에 타진했다.
먹혀들어 갔는지 다행히 한족 중심으로 일던 소요가 진정되었다.
진무학교는 팔기파와 북양파, 혁명파의 세 파벌이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으로 안정되어갔다.
빠르게 계절이 지났다.
어느덧 진무학교의 졸업식이 성큼 다가왔다.
8기 생도들. 그리고 한 명의 10기생이 포함된 졸업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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