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이 충만할 때
진무학교의 졸업식을 마치자 잠깐의 해방감이 밀려들어 왔다.
곧장 짐을 쌌다. 집에 갈 거야!
일본의 학제에서 진무는 육군유년학교에 해당했다.
일반적인 일본의 장교 후보생은 유년 학교를 졸업한 뒤 6개월가량의 부대배속 교육을 받았다.
병으로 근무하며 경험을 쌓으면 지휘관이 되었을 때 도움이 되리라 여겼던 것이다.
반면 청의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로 임관하지는 않을 터이니 부대배속의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8기 생도들은 일본군 부대에 자원하여 들어갔다.
육사에 입학한 후 부대배속 교육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에 따라 대우가 많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깟 차등, 차별.
내게는 매일 먹는 쌀밥처럼 익숙하다.
오히려 하루라도 조용히 지나가면 허전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으니.
좆까고 홍콩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
뿌우웅.
입항을 알리는 경적소리. 가슴이 설렜다.
익숙한 항구도시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고향이었다.
도쿄에서 보낸 1년.
키가 1센치 컸고 일본어가 유창해졌다.
스무 권가량의 고전을 독파했으며 팔뚝이 제법 굵어졌다.
그리고 두둑한 주머니가 생겼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홍콩은행에서 코묻은 검은 돈을 환전했다.
깔끔하게 세탁된 돈주머니를 들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홈 스윗 홈···. 이라기엔 당장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이다.
문을 열자 경첩이 비명을 내질렀다.
"어머니! 저 왔어요!"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며 어머니가 뛰어오셨다.
"신아!"
포옹.
단번에 포근한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아이고.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어차피 오는 길인데. 우편에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예. 아무 일 없어요. 예비 학교를 졸업하고 휴식기가 있어서 온 거에요. 가을에는 다시 일본에 가 육사에 들어갈 거예요."
"장하다. 장해."
어머니가 내 등짝을 짝짝 내리쳤다.
왜 이렇게 약하게 느껴지지.
고작 1년 만에 부쩍 나이가 드신 것 같다.
"아버지는 항구에 계세요?"
"응. 서시도 같이 있을 거야."
"걔가 왜 항구에?"
"아빠 따라 일한다고. 난리야 아주."
한서시(韓西施).
내 하나뿐인 동생이다.
"아버지 뵈러 갔다가 저녁 거리 사 올게요. 같이 먹어요."
"그래. 신이 너 못 본 사이 너무 말랐어. 맛있는 것 좀 많이 사 오려무나."
근육이 잔뜩 붙었는데 말랐다니.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른다.
일본식의 간소한 식사는 내게는 많이 부족했다.
나는 내가 생선을 좋아한다 생각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음식은 오로지 육지 짐승의 고기였던 것이다.
홍콩 침사추이의 거리는 여전했다.
계획 없이 덕지덕지 이어 붙인 건물이 난잡하게 불어나고 있었으며 마차와 인력거가 요란하게 거리를 오갔다.
영국인들은 거만하게 대로로 걷고 중국인들이 그 옆을 구부정하게 피해 가는 풍경도 그대로였다.
항만에 다가갈수록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진해졌다.
술 취한 백인들이 양팔에 여자를 끼고 건들거렸다.
아무 데서나 오줌을 갈기며 끊임없이 럼주를 마시고 토했다.
저녁 노역이 끝나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했다.
나는 가까운 빅토리아풍 선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 차이니즈."
날 제지하는 종업원에게 팁을 생각보다도 더 많이 건네야 했다.
선술집은 한산했다. 대부분은 영국인들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가게를 탐색했다.
찾았다.
구석에 정갈하게 핀볼 기계가 놓여있었다.
기껏해야 녹슨 못 몇 개 박아놓고 그 위를 볼이 굴러다니는 거지만 나름대로 외형은 갖춘듯했다.
곧바로 볼을 투입해보았다.
이 느낌. 오랜만이다.
스마트폰이든 PC든 못 다뤄본 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오락기이니 나도 모르게 몰두하게 되었다.
단순한데 존나 재밌었다.
한참 동안 구슬을 날렸다.
부대배속 교육을 때려치우고 홍콩에 돌아온 이유.
파칭코 장사를 할 작정이었다.
훗날 일본의 국민도박이 될 파칭코 시장을 선점할 수만 있으면 재벌도 꿈은 아니겠지?
핀볼 기계의 제조업체 이름을 까먹지 않게 적은 후 거리로 나왔다.
시장에 가서 고기를 샀더니 금방 어둑해졌다.
항만 입구에서 기다리자 곧 노역을 마친 선원들이 축 처진 몸으로 줄줄이 쏟아져나왔다.
익숙한 얼굴이 보여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
"응. 왔느냐."
재미없게 별반 놀라지도 않는다.
워낙 젊은 시절부터 험한 꼴을 많이 겪으셔서 그런 걸까.
아버지가 놀라워하는 모습이 기억 자체에 없다.
"오빠!"
대신 환영해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서시가 달려와 날 껴안았다.
우리 서시. 항상 애교 많은 귀염둥이 내 동생.
"오빠! 육사는 졸업한 거야?"
"아니···. 그렇게 빠르겠냐고."
"에이 뭐야. 오빠는 똑똑하니까 초고속으로 졸업하고 온 줄 알았지."
"나 정도면 지금 충분히 초고속으로 학업을 밟고 있는 거야."
서시는 방과 후에 항구에 가서 경리 일을 하며 아버지를 돕는다고 했다.
때와 땀에 찌든 선원들 틈에서 십 대 중반의 소녀가 일하겠다고 나서는 게 기특하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한창 꾸미고 싶을 나이.
하지만 항만노동자의 허름한 옷차림에 온종일 격무에 시달렸는지 눈에는 피로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신이 나 조잘댈 때는 특유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가 넘쳤다.
아버지가 오바하며 붙인 서시(춘추시대의 미인. 중국 미인의 대명사)라는 이름이 전혀 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빠, 들고 있는 건 뭐야?"
"저녁거리."
"고. 기? 고기! 고기다! 맨날 비린내 나는 생선만 먹었었는데 너무 좋아!"
역시 내 동생.
생선 따윈 고기로 취급할 수 없지. 암.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 간의 정이었다.
동시에 느슨해졌던 긴장의 끈을 다잡는 계기도 되었다.
이 행복.
지켜내려면 더 잘해야 한다.
앞으로 수십년간 대륙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이니.
내가.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잘 해내야 한다.
***
홍콩 삼합회에서는 날 찐하게 반겨주었다.
행동대장 두징쯔가 내 등짝을 짝짝 쳤다.
존나게 아팠다.
"신아. 너 없으니까 빈자리가 너무 체감되더라. 요즘 사업 진짜 잘되는데. 어떠냐, 지금이라도 유학 때려치우고 같이 일이나 하는 게? 이제는 너도 머리가 굵었으니 제법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것이고."
"무슨 사업이 그리 잘되는데요?"
"뻔하지 자식아. 아편 말고 있냐."
아편 밀매는 큰돈을 벌 수 있지만 그야말로 악마와의 거래나 다름없다.
인간을 좀먹고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암세포가 바로 아편이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멀리해야 한다.
물론 도박 사업도 정직하진 않지만, 아편의 해악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형. 언제까지 아편만 팔 거예요. 우리 좀 신선한 공기 마시면서 일해요."
"무슨 말이냐?"
"제가 괜찮은 사업 아이템 하나 가져왔거든요."
두징쯔에게 파칭코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나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요란한 신고식이 끝나고 그날부터 핀볼 제조 업체에 달려가 업자와 함께 끙끙대며 몇날며칠 밤을 새웠다.
얼마 후.
어설프지만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다.
스타팅 스프링의 미세한 조절.
못의 각도를 이용한 다양한 경로.
울퉁불퉁한 범퍼를 통한 어트랙션.
모든 난관을 뚫고 마지막 구멍에 구슬이 도착하면, 축하를 위한 잭팟까지.
기본적인 파칭코의 요소는 모두 갖춘 셈이었다.
두징쯔에게서 연락이 왔다.
삼합회의 드래곤헤드가 날 만나고 싶어 한다고?
10년간 삼합회에서 일하면서 얼굴 한번 못 본 자가 용두(龍頭)였다.
내 지위가 최말단이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정체를 꼭꼭 숨기는 자였다.
그런 자가 직접 만나자고 하는 걸 보면.
내 제안. 제법 매력적일지도?
"마스터. 저 왔습니다."
"들어와."
두징쯔와 함께 들어갔다.
삼합회의 용두는 의외로 젊은 남자였다.
도회적인 양복 차림이 홍콩과 마카오를 석권한 범죄조직의 수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형은 나가 봐."
"예. 마스터."
고개를 꾸벅 숙인 두징쯔가 나가고 나와 용두만이 남았다.
"회에 오래 있었어?"
"아홉 살 때 직접 찾아가서 받아달라며 떼를 썼습니다. 정식으로 입회식을 치른 지는 5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고."
"예."
"네가 말하는 파친코라는 게 그거야?"
용두가 내가 가지고 온 기계를 가리켰다.
"예. 기본 원형은 영국식 핀볼인데 도박적인 요소를 가미하고 볼이 소모되는 회전율을 높였습니다."
"그래봤자 어린애들 장난감 같은데."
"맞습니다. 어린애들 장난감이지요. 그리고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결국 가장 재밌는 건 어린애들 장난감이라는걸 드래곤헤드께서도 아시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편하게 마스터라 불러."
용두에게 핀볼 게임 방식을 설명하였다.
몇 번 볼을 쏴본 용두가 피식대며 웃었다.
"재밌긴 하네. 홍콩에 얼마나 있을 거라 했지?"
"이번 가을까지는 있을까 합니다."
"페리 터미널 근처에 자리 하나 줄 테니까. 해봐."
"네. 마스터."
다시 업체를 찾아가 본격적인 계약을 맺고 생산을 시작했다.
2월의 서늘한 날.
마침내 침사추이의 골목에 조촐한 게임센터가 문을 열었다.
「가능성(可能性)」이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나 같은 도박꾼은 저 '가능성' 세 글자만 봐도 가슴이 뛰었으니 남들도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명명한 간판이었다.
특별한 유흥거리가 없던 항만의 노동자들에게 파칭코는 대히트를 쳤다.
싼 가격에 오랜 기간 즐길 수 있으며 구슬을 조종하는 맛도 있는 곳이 가능성이었다.
무섭게 손님이 모여들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중국인뿐만 아니라 영국인들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더럽고 냄새나는 노동자들과 같이 구슬을 치는 것을 꺼리는 영국인들이 게임 공간의 분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홍콩 경찰에 따지는 자도 생겨났다.
영국의 법제를 따르는 탓에 공식적으로는 도박이 불법인 홍콩이었다.
파칭코는 도박이 아니라 오락이라 주장하며 법망을 피해 갔지만, 분쟁이 계속된다면 경찰에서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그때쯤 삼합회의 용두가 날 먼저 호출하였다.
"마카오 카지노에 자리가 비었어."
"예?"
"잘해보라고."
자연스레 구획이 나뉘었다.
홍콩에 있는 게임센터가 중국인들의 공간이었다면.
파칭코를 즐기고 싶은 영국인들은 페리를 타고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놀았다.
도박의 천국인 마카오에서는 무얼 해도 허용되었다.
사욕을 채운답시고 파칭코 기계 옆에서 마작 코너를 운용했는데 그것마저 잘 되었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 지속되었다.
수익의 대다수는 삼합회로 흘러 들어갔으나 그걸 제하고 떨어지는 떡고물만으로도 주머니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용두도 조직의 수익이 급격하게 불어나는데 내가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곤 그만한 대우를 해주었다.
나이 열아홉에 나는 이미 삼합회의 중간보스까지 승진해 있었다.
1909년이 끝나가는 겨울.
다시 용두를 찾았다.
"인수인계는 두징쯔에게 모두 마쳤으니 무리 없이 돌아갈 겁니다."
"벌써 갈 때가 되었나. 그간 수고 많았어."
"아직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에는 이릅니다."
"무슨 말이야?"
"「가능성」의 2호점을 도쿄에 내고 싶습니다."
용두는 처음 핀볼에서 구슬을 쳤을 때처럼 웃었다.
"해봐."
***
"신아! 공부 열심히 해!"
"오빠! 빨리 졸업하고 돌아와야 해!"
가족들이 배 바로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그동안 열심히 먹인 덕인지 다들 살이 오르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내가 없어도 두징쯔에게 부탁해 놓았으니 앞으로도 가족이 돈 걱정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배에 오르자 일단의 사내들이 다가와 날 감쌌다.
"따거,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냥 편하게 대해. 일본에서 우린 다 친구인 거야."
"예. 친구님."
"아 쫌."
여객선이 출항했다.
도쿄로 가는 길.
삼합회의 조직원 일곱을 대동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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