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08)

육군사관학교2

 1910년. 경술년(庚戌年)의 새해가 밝았다.

 첫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일본육사에 유학한 청의 생도들에게는 시험하면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름이 있었으니. 

 16기의 차이어(蔡鍔).

 쟁쟁한 일본 사관생도들 틈바구니에서 전체 3등으로 졸업한 수재.

 호사가들은 그가 몸이 선천적으로 약한 탓에 야전 실습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랬지, 몸만 멀쩡했다면 1등을 했을 거라고 떠들어댔다.

 과연 차이어는 돌아가자마자 전국각지에 초빙받으며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광시신군 참모처 총판 자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역사를 아는 나는 곧 있으면 그가 여단장 자리까지 꿰찰 걸 안다.

 차이어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독립 여단의 힘으로 반란을 일으켜 윈난성(雲南省, 운남성)의 군벌이 된다.

 중국 군벌 시대 초기, 천하를 움켜쥐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던 이가 군신(軍神) 차이어였다.

 차이어가 짧은 시간에 벼락출세를 할 수 있던 데는 그만큼 육사에서의 경력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좋아. 차이어의 루트를 탄다.

 나는 앞에 놓인 중간고사 시험지를 바라보다 차분히 연필을 들었다.

 ***

 석차표가 붙었다.

 전교생을 1등부터 꼴등까지 나열하는 잔인한 게시였다.

 다가가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쟤야?"

 "그럴걸."

 "지나인한테 수석을 내주다니 우리 기수의 수치야."

 "얘기 들어보니까 지나인도 아니라데."

 "뭔 소리야?"

 "조센징이래."

 무시하고 앞에서부터 내 이름을 찾았다.

 많이 갈 필요도 없었다.

 맨 첫 자리.

 1등. 한신.

 아무래도 나는 변태적인 취향이 있는 모양이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질시의 시선들.

 오히려 도파민이 차오른다.

 "빠가야로. 이제 시험 하나 친 거야. 더는 수석 자리 안 뺏겨."

 "저 새낀 보나 마나 책상물림이야. 실전은 다르지."

 "행군 같은 거 안 하나? 나가떨어지는 걸 보고 싶은데."

 "다음 수업 야외에서 하잖아. 그때 한번 조져주자."

 마구 떠들어대는 말들이 쏙쏙 들려왔다.

 이상하다. 내가 귀가 이리 밝았나.

 아니면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하는 얘긴가.

 놈들의 말대로 다음 수업은 교련.

 연병장에서 총검술을 배웠다.

 "하나!"

 전진 스텝과 찌르기.

 단순한 동작.

 "하나!"

 이게 쓸모가 있을까?

 물론 여전히 전투의 피날레는 백병전인 시대이고 기병대를 상대로 스스로를 지키려면 총검술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방식이 문제다.

 "하나!"

 수업 내내 하는 거라곤 일렬로 늘어선 부대가 전진 찌르기를 하는 것뿐이다.

 다닥다닥 붙어선 보병이 기다란 총검을 동시에 쭉 내뻗는 동작.

 기원전의 팔랑크스 방진으로부터 특별히 발전했다고도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미 20세기 현대전의 양상은 급격하게 변하여 전열 보병은 설 자리가 없다.

 하지만 일본군은 구시대의 총검술을 발전 없이 답습하고 있었다.

 아, 물론 잘하고 있어. 일본 친구들.

 너무 유능하면 곤란하지.

 너희들이 무능할수록 세계는 평화로워지니까.

 "그만! 모두 모여봐라."

 지시에 따라 생도들이 한데 모였다.

 교관의 옆에 몇 개의 나무 막대기들과 머리를 감싸는 보호구가 쌓여있었다.

 "천황 폐하께서 너희들의 교육 수준 향상을 위해 은덕을 내리셨다. 이건 목총(木銃)이다."

 교관이 목총을 들었다.

 소총의 외형을 얼핏 닮긴 했지만, 그보다는 그냥 기다란 나무 봉 같았다.

 "지금부터 이 교보재를 가지고 대련을 할 거다. 다만 수량이 충분치 않아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도전할 생도 있나?"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교관이 지목하기전에 한놈이 입을 열었다.

 "생도 하시모토 긴고로(橋本 欣五郎)! 질문 있습니다!"

 "해라."

 "대련 상대를 직접 지목해도 됩니까?"

 "뭐냐. 장난칠 생각이냐? 천황 폐하의 하사덕에 이루어지는 실습이 우스운가?"

 "아닙니다! 천황 폐하의 은덕 덕에 실제 전장을 가정하고 대련할 수 있으니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장난 따위는 생각한 적 없습니다. 상대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가짐으로 대련에 임할 겁니다!"

 하시모토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교관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상대를 정해라."

 하시모토는 곧바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알 수 있었다.

 좀 전에 복도에서 날 조져주겠다며 떠들어대던 놈이 하시모토 긴고로였다.

 "한신 생도와 붙고 싶습니다."

 "한신 생도. 나와라."

 뜻밖이다.

 무언가 좀 더 비열한 짓을 해올 거라 생각했는데.

 몰래 암습할 생각이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만인 앞에서 대놓고 결투 신청을 하면 너무 정정당당하잖아.

 아니면 정말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무슨 무슨 검도 유파의 전승자라던가.

 보호구를 착용하고 목총을 든 채 하시모토와 마주 섰다.

 일반적인 소총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이걸로 연습이 될지 모르겠다. 총검술 대련이라기보다는 검도 대련 같았다.

 "하시모토다. 너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이렇게라도 안면을 틀 수 있어서 좋구나."

 "한신이다. 그래, 친하게 지내자고."

 "하지만 교관님 말씀대로 대련은 실전처럼 해야 한다. 알지?"

 "당연."

 "원망하지 마라."

 보호구의 창살 너머 이글거리는 하시모토의 눈이 보였다. 전혀 거리끼거나 망설이는 빛이 없었다.

 뭐야, 정말 검도의 고수인 건가?

 "핫!"

 하시모토가 경호성을 내지르며 목총을 뻗어왔다.

 스텝을 밟으며 찔러오는 품새가 충실히 교육을 수행한 모양이었다.

 가히 교과서적인 동작.

 나는 내식대로 막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식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 육군에서 배운 야매식이지만.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서며 하시모토의 목총을 쳐낸다.

 다음엔 바로 목총을 회전하여 두꺼운 쪽으로 돌려친다.

 "컥."

 개머리판에 가슴을 얻어맞은 하시모토가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놓치지 않고 원위치한 목총의 검 끝으로 하시모토의 이마를 찔렀다.

 보호구가 벗겨지며 하시모토가 발라당 넘어졌다.

 별거 없잖아.

 휴. 괜히 쫄았네.

 "반칙이야! 반칙을 했다!"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하시모토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무슨 반칙을 했는데?"

 "옆으로 걸어서 찌르기를 피했잖아! 그런 스텝은 배운 적 없다!"

 "옆으로 걷는 것도 배워야 아는 거냐? 찌르기가 들어오면 옆으로 피하는 게 당연하잖아."

 "닥쳐! 빠가야로. 군인은 철저히 정해진 양식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총검술 훈련을 하는 거다! 그러니 총검술의 제식에 어긋나는 행동은 반칙이다!"

 "야. 언제는 실전처럼 하자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다른 생도들도 몰려들어 한마디씩 했다.

 "그래! 저건 반칙이다!"

 "하시모토 말이 맞다!"

 "저놈은 무사도를 어겼다!"

 싸움이라도 일어날 것 같자 교관이 소리쳤다.

 "조용!"

 생도들의 시선이 교관에 쏠렸다.

 "대련은 하시모토 긴고로 생도의 승리다."

 하시모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보내왔다.

 교관이 날 지목했다.

 "한신 생도."

 "예."

 "총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진이다. 대열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 부대는 이미 죽은 목숨인 거다."

 "···."

 "다른 생도들은 옆으로 걸을 줄 몰라서 안 걷는 것이 아니다. 실제 전장에서 너는 방진의 한가운데 있게 될 텐데 옆으로 피할 수 있겠나? 자기 한목숨 살겠다고 옆에 있는 동료를 밀쳐 대열을 어그러뜨릴 셈이냐? 네 사소한 행동 하나로 부대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거다. "

 끝내주는 헛소리를 지엄하게도 하네.

 이미 19세기식 총검방진은 전장에 설 자리가 없다.

 화기의 발달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총검을 빼 들고 백병전을 벌일 자리는 드넓은 평야가 아니라 비좁은 참호속이다.

 각개격투의 시대.

 그야말로 개싸움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군을 계몽할 필요야 없지.

 나는 그저 간단히 대답했다.

 "예."

 내가 순순히 순응하자 교관은 다른 생도를 지목하여 목총 대련을 시켰다.

 가만히 대련을 지켜보는데, 뒤에서 또 하시모토 패거리들이 떠들었다.

 "흐흐. 잘난 척 하더니 꼴좋다."

 "저놈이 왜 저렇게 행동했는지 알겠다. 지나에는 규칙같은 것도 없으니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습관이 돼서 제식에 어긋났던 거야."

 "네 말이 맞네. 그러니 전쟁에 졌지. 흐흐."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흘러가듯 한마디 했다.

 "발라당."

 하시모토가 대뜸 내 어깨를 잡았다.

 "야. 뭐라 했냐?"

 "뭐가?"

 "방금 뭐라 했냐고."

 "그래도 쪽팔린 건 아나 보네. 발라당."

 하시모토가 숨을 씩씩거렸다.

 교관의 눈치를 보고는 놈이 입을 열었다.

 "저녁에 학교 뒤편으로 나와라."

 "까까라도 주게?"

 "닥치고 나와. 안 나오면 안 좋을 테니까."

 "발라당의 굴욕을 설욕하고 싶은가 봐."

 "···그래. 이 조센징아. 넌 뒤졌어."

 나는 하시모토의 옆에서 대화를 귀 쫑긋 세우고 듣고있는 패거리들을 힐끗했다.

 "일대일? 아니면 저놈들도 오는 거냐."

 "오긴 올 거지만 구경만 할 거야."

 "야, 내가 병신도 아니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것보다 좋은 생각이 있다."

 "뭐?"

 "이왕 붙을 거면 제대로 붙어야지."

 "뭘 어떻게 제대로 붙겠다는 건데."

 "너랑 나랑 그냥 싸워봤자 제대로 된 설욕이 되겠어? 이 불화의 시작은 총검술 대련이었다. 그러니 총검술 방진 대결을 하자고."

 하시모토 패거리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돌아보았다.

 "뭔 소리를 하는 거냐, 너."

 "내일은 주말이잖냐. 시험도 끝났으니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겠지. 도쿄항 쪽에 인적도 드물고 자재도 많이 쌓여있어 대결하기에 적합한 곳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니까."

 "무슨 말을 하긴 임마. 네 친구건 엄마건 할아버지건 다 데려오라 이거야. 요새 맨날 전술 수업에 배우는 거 있잖냐. 총력전으로 한번 붙어보자고."

 하시모토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켰다.

 하긴 대뜸 패싸움을 제안하는 게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겠지.

 하지만 달리 보면 이 시대 흔하디흔한 것이 패싸움이었다.

 이긴 쪽은 승자가 되어 당당히 학교를 활보하고.

 진 쪽은 쭈그리가 되어 숨는다.

 인류사에 영원히 뒤바뀌지 않을 약육강식의 법칙이었다.

 "진심이냐?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어."

 "너 친구는 있냐?"

 "아마도."

 놈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다음 말을 알 것 같다.

 "그래, 붙어보자. 이건 전쟁이야."

 ***

 다음날. 

 도쿄항의 부두.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한참 전이라 파도소리 말고는 고요하다.

 어둑어둑해질 때쯤 저 멀리서 하시모토의 얼굴이 보였다.

 스무 명가량의 생도들이 함께였다. 다들 손에 각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왔냐. 발라당."

 "닥쳐. 네 친구들은?"

 "올 거야."

 "흐흐. 겁나서 안 오는 거 아냐? 누가 결말이 뻔한 전쟁에 참전하고 싶겠어."

 "올 거라니까 그러네."

 하시모토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징그럽게 웃었다.

 "네 지나 친구들은 한 명도 안 올걸."

 "뭔소리래?"

 "시치아란 놈이랑 얘기가 잘 되었거든. 네가 기다리는 청의 생도는 한명도 오지 않을 거다. 지금쯤이면 신주쿠의 유곽에서 질펀하게 즐기고 있을 테지."

 헛짓거리 참 잘하는 친구네.

 언제 또 시치아를 섭외했대.

 "시치아고 뭐고 부른 적도 없다."

 "그럼 이제 네가 처맞는 일만 남았구나. 확실한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이곳에서의 싸움은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 이를 어길시 할복하는 거야. 여기 모두가 증인이다."

 "할복은 좀 그렇고. 도쿄항에 발라당 빠져 죽는 걸로 하자고."

 "씹쌔끼. 죽여주마."

 하시모토를 따라 스무 명가량의 일본 생도들이 살기등등하게 다가왔다.

 "방진은 안 짜냐?"

 "닥쳐! 야! 가자! 족치자!!!"

 "여긴 개활지니까 대열을 유지하는 게 좋을 텐데···."

 놈들의 고함에 내 목소리는 파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마구잡이로 뛰어올 뿐이었다.

 거리가 적당히 가까워진 순간.

 갑자기 건물 사이사이에서 묵직한 나무배트를 든 건장한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시모토가 놀란듯 주춤했다.

 "뭐, 뭐야?"

 "나도 친구 있어 개새끼야!"

 내 신호와 함께 삼합회의 조직원들이 하시모토 패거리를 개 패듯이 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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