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이름에 전율하는가?
신주쿠의 이자카야.
승리를 만끽하며 삼합회의 조직원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 일은 잘해주었다. 다들 수고 많았어."
"별거 아니었습니다. 젖내가 풀풀 나는 놈들 쥐어패 준 건데요. 뭘."
"만만하게 볼 놈들은 아니야.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 후보생들이다. 유리한 진형에서 기습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피해 꽤나 봤을 거야."
"에이 설마요."
조직원이 손사래 쳤다.
"아니. 사실이다. 우리가 숫자도 밀리지않느냐. 하시모토 패거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총검 방진만 짰더라도 이리 수월하게 이길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습니까? 그저 우왕좌왕하는 게 오합지졸 같았는데."
"그게 포위와 기습의 묘라는 거지. 게다가 연장을 들고 싸워본 집단난투의 경험 차이도 영향을 끼쳤을 거고."
"오랜만에 몸을 풀어서 좋았습니다. 도박장에서 서빙 알바 따위나 하는데 좀이 쑤셔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내가 육사에서 자리 잡는 동안 부하 녀석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법 고군분투한 모양이었다.
"그간 조사한 정보나 들어보자."
"예. 말씀하신 대로 핀볼 기기 제조 업체부터 알아보았습니다. 여기 명단입니다."
"좋아. 그럼 인허가 관련해서는?"
"그것이···, 외국인은 아무래도 허가를 잘 내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이미 생각한 바다.
해결하려면 일본인 바지사장을 내세우든지 아니면 동업자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
"나와바리는 어때?"
"신주쿠는 공문회(工門會)라는 놈들이 잡고 있습니다. 주로 도박장 관리로 수입을 얻고 사채업도 하는 모양입니다."
"놈들 세력은?"
"우리 회에 비하면 대단치 않습니다. 기껏해야 오십명 안팎이라더군요."
"우린 여덟이잖아."
"뭐 어떻습니까. 오늘처럼 쓸어버리면 되지요."
"안돼."
일본 수도의 한복판에서 야쿠자와 항쟁을 벌이는 건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수단이다.
우선적으로는 공문회 놈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업을 시작하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한다.
"네가 알바한다는 신주쿠의 도박장이 공문회 소유냐?"
"예."
"거기 지키는 야쿠자들 죄다 우락부락하던데. 무턱대고 사업 제의를 하러 찾아갔다가는 결말이 좋지 않을 거 같군."
"어쩌실 겁니까?"
"도움을 받아야지."
"아는 분이 있습니까?"
있지.
내키진 않지만.
***
중국 동맹회의 본부.
2층의 조용한 사무실에 천치메이와 마주 앉았다.
"한신. 오랜만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도쿄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한번 만나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특별히 할 말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왜 없겠나. 아주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간 일본육사의 중국장교 중 최고라 불리던 차이어를 뛰어넘는 생도가 나왔다고 말이야."
"과분하군요."
"아냐, 아냐. 아주 훌륭해. 차이어 그 재수 없는 자식은 쑨원 선생님께서도 몇번이나 입회 제의를 했지만 죄다 거절했었지. 그리곤 입헌파에 붙어서 만조에 나라 팔아먹는 짓을 방관하고 있단 말야. 그런 자식의 타이틀을 뺏어온 건 아주 잘한 일이야."
천치메이가 침을 튀기며 강변했다.
"그동안 입헌파 새끼들이 차이어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영 거슬렸는데 이제 더 볼일 없다고 생각하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군."
"···."
"헌데 어쩐 일인가?"
"실은 부탁할 일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동맹회의 천치메이.
암흑가에 수많은 커넥션이 있는 자다.
당연히 야쿠자와도 연줄이 있겠지.
"공문회를 아십니까?"
뜻밖이라는 듯 안경알 너머 천치메이의 동공이 커졌다.
그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가는 속도가 들리는 듯 했다.
"거긴 왜?"
"사업을 해볼까 합니다."
"무슨 사업?"
"단순한 유흥 사업입니다."
"무슨 유흥? 자세히 말해보게."
잠시 고민하다 파칭코 사업 계획의 전반을 설명하였다.
천치메이는 눈을 치켜뜨고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박수를 쳐댔다.
"대단한 발상이야! 도박장에서 주먹구구로 제비뽑기 따위가 돌아간다는 건 알지만, 그 파칭코라는 기기를 활용하면 공장처럼 자금을 수급할 수 있겠군."
"성공한다면 그렇지요. 그전에 지역의 야쿠자와 협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걱정 말아라. 실은 내가 비밀리에 굴리는 조직이 있는데 이미 많은 조직원이 공문회에 몰래 잠입해있지. 공문회는 절반쯤은 내 조직이나 다름없다."
언제 그런 수를?
그럼 공문회의 비선실세가 천치메이인건가.
"잘됐군요. 사업이 순조롭겠습니다."
"물론이다. 최근 혁명 자금 수급이 불안하였는데 이번 사업이 성공한다면 큰 도움이 되겠어."
"혁명 자금 말입니까?"
"그래. 근래에 광저우에서 일대 봉기를 준비 중이지. 헌데 포섭할 금품이 모자라. 닥치는 대로 자금을 끌어다 써야 할 판이야."
이럴 거 같긴 했는데.
누구 맘대로 혁명자금이래. 이래서 이자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으려 했던 거다.
천치메이가 생각을 끝낸 듯 말했다.
"너는 일단 육사로 돌아가라."
"무슨 말입니까?"
"네가 말한 대로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다. 기계도 필요하고 사업장 위치와 인허가 문제도 있지. 아직 어리고 육사생도 신분인 너로서는 제약이 많을 거다. 하지만 걱정 마라.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직접 파칭코 사업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천치메이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누가 하든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혁명자금으로 쓰일 건 똑같은데.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게 중요하다."
"제가 구상한 사업입니다만."
"그래. 좋은 계획안을 들고 와 주어 고맙다. 파칭코 사업이 잘된다면 쑨원 선생님께 말씀드려 네 노고를 치하하지."
나는 말없이 천치메이를 노려보았다.
천치메이는 내 눈빛에 전혀 거리끼는 기색 없이 똑바로 마주 보아왔다.
"왜 그렇게 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나?"
"애먼 사람에게 부탁한 제 잘못이군요."
"무슨 말인가?"
"됐습니다. 다른 곳을 알아보지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쿄 근지의 도박장은 공문회가 꽉 잡고 있지. 네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거다."
쳇.
내 사업을 강탈하겠다고? 해볼 테면 해보라지.
파칭코 기계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것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던 천치메이 루트도 막혀버렸으니 이제 어쩌지?
자기 부하들이 공문회를 잠식했다는 천치메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쿄에서 사업을 벌이는 건 어렵다.
아니면 강행하고 전쟁을 벌이는 건데···.
지금 일본에 들어온 내 부하들만으로는 턱도 없고.
그렇다고 홍콩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침소봉대(針小棒大)의 느낌이다.
아니면 사업을 포기해야하나?
2층의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타난 남자는 한쪽 눈이 의안(義眼)이었다. 대뜸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시오?"
"안녕하십니까."
"잠시 얘기 좀 나누겠소?"
"뉘신 지?"
"나는 기타 데루지로(北輝次郞)라는 사람이오. 중국 동맹회원이니 경계할 필요 없소."
투박하게 박힌 의안을 보았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자는 유명한 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다.
파천황적인 혁명을 주장하며 일본 개조의 야망을 품은 사나이. 세간에는 마왕으로 불린다지.
내게 무슨 볼일이?
기타를 따라 근처의 찻집으로 향했다.
고고한 인텔리의 느낌이 풍겨오는 자였다.
"실은 사과부터 해야겠소. 어쩌다 보니 귀하의 대화를 엿들었소이다."
"대화라면, 천치메이 과장과의 대화 말인지요."
"그렇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귀하가 제안한 그 파칭코라는 기기 사업에 관심이 있소."
"사업을 운영하고 싶으신 겁니까?"
기타가 낮게 웃었다.
"좀 전에 귀하의 대화가 잘 풀리지 않은 건 알고 있소. 천치메이는 악랄한 자이지. 혁명을 위한다는 핑계로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다니오."
"천 과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나 봅니다."
"물론이오. 그자는 암 덩어리 같은 자이니. 얼마나 많은 혁명자금이 그에게 흘러갔는지 모르오. 하지만 그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소."
"청에서 봉기는 계속 일으키는 것 같던데요."
"하지만 죄다 실패했지. 그깟 수단으로는 혁명은 불가하오."
역시 카리스마가 있다.
기타가 천치메이를 강하게 성토하는 모습은 호재였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직 질문에 답을 안 하셨습니다. 파칭코 사업체를 운영하고 싶으신 겁니까?"
"사업체는 관심 없소. 내가 귀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오."
"그럼 뭐 때문입니까?"
"공문회의 궤멸."
궤멸? 과연 막 나가는 분일세.
기타가 평온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공문회는 이미 천가의 사적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요. 놈의 이익에 따라 도쿄를 오염시키고 있지. 천가 놈은 혁명이라는 대의에 충성하지 않소. 오로지 쑨원 개인에만 충성한다오. 그런 놈이 혁명의 최일선에서 마차를 몬다면 우리 모두를 절벽으로 떨어뜨리고 말 거요. 물론 쑨원과 천가 놈은 그전에 자기들끼리 탈출해 떠들어대겠지. 저 비열한 청 정부가 마차를 절벽에 처박았다고 말이요."
"좋습니다. 기타 선생님은 제게 뭘 바라십니까?"
"귀하의 목표는 도쿄에 사업체를 세우는 것. 그 목표는 공문회가 건재하는 한 이루어질 수 없을 거요. 내가 공문회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겠소."
말은 고마운데.
"어떻게 말입니까?"
"귀하는 육사 소속 생도로 알고 있소. 맞소?"
"아시는군요."
"육사 출신 중에 아는 사람이 몇 있소. 군병의 도움을 받아 천가 놈이 부리는 야쿠자를 싹 쓸어버리는 거요."
미친 발상!
이게 기타 잇키인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어디까지 폭주할지 짐작도 안 간다.
"군병이라니. 도쿄 시내에서 군인들이 야쿠자를 습격했다가는···."
"별일 있겠소? 사회정화 명목으로 깡패들을 때려잡는 것이니 혹여나 경찰이 눈치챈다 해도 가벼운 문책 수준에서 징계는 끝날 거요."
"아니,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기타 잇키는 문제적 인물이지만 그만큼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뿌리는 자다.
기타가 유력한 고위 관리에게 편지 몇통만 쓰면 파칭코 영업 허가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터.
기타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영업을 시작하면 공문회에서도 함부로 건드리기는 어려울 거다.
내 설명을 듣자 기타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요. 나는 공문회의 궤멸을 바라는 것이지 그깟 핀볼이나 치려는 게 아니오."
"종래에는 선생님이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
"왜 그렇소?"
"고백하건대 제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중국에서의 혁명을 넘어 일본에서도 혁명을 꿈꾸고 있지요. 이 모든 사업은 그 꿈의 일환입니다."
기타는 처음으로 당황한 것 같았다.
"일본에서의 혁명···, 말이오?
"예. 혁명입니다. 저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존황양이(尊皇攘夷)를 입에 담으며 개혁을 주장했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막부가 몰락한 자리에 특권계층으로 똘똘 뭉친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을 뿐입니다. 일본인이신 기타 선생님께서 제 말을 어떻게 들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 역시 일본인으로 중국의 혁명 투쟁에 참여해있으시니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그, 그래서 귀하가 말하는 혁명이란 것의 방안이 뭐요?"
"도쿄의 암흑가를 장악하여 세력을 키웁니다. 우월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주요 인사를 포섭하고 도쿄에 혁명 의식을 고취시킵니다. 때가 되면 궐기하여 천황의 신변을 확보하고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여 메이지 헌법을 중지시킵니다. 다음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들로 의회를 구성하여 신일본(新日本)을 건국하는 겁니다."
갑자기 기타가 격동에 찬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괜찮으십니까?"
툭.
오른쪽 의안이 빠져나왔다. 떨어진 눈알이 바닥을 굴렀다.
"내 지난 세월 동안 품었던 큰 뜻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는데, 오늘 우연히 만난 귀하로부터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답을 들었소."
당연하지.
내가 한 말은 미래의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협력하겠소. 무슨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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