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08)

육사 공방전

 긴 주말을 보내고 육사로 귀환했다.

 "하시모토 생도, 왜 말을 못 하나! 어디서 얻어맞고 온 건가!"

 "그냥 넘어졌습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카디들에게 습격당했나?"

 "그, 그것이···."

 월요일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1중대 2구대의 모범 학생 무다구치가 하시모토 긴고로를 닦달하는 중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생도들이 밤탱이가 되어 들어왔으니 2구대를 책임지는 상급생으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아닙니다. 어쩌다 길거리 싸움을 벌였는데 조금 판이 커졌습니다. 앞으로는 육사의 품격에 누가 되지 않도록 행실을 똑바로 처신하겠습니다."

 "으음. 아무래도 수상해. 정말 카디놈들과 싸운 게 아니냐?"

 "···예."

 "지켜보겠다."

 무다구치가 다른 데를 쳐다보는 사이 하시모토가 은밀히 날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저 악독하게 쏘아보다가 나가버렸다.

 고자질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제법 깡은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한은 본인이 직접 갚겠다는 마음인 것일지.

 한동안은 학교에서도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발견한 무다구치가 다가왔다.

 "한신 생도. 이번 시험 성적이 좋다더군."

 "운이 좋았습니다."

 "흥."

 주변을 살핀 무다구치가 예전처럼 얼굴을 들이밀고 귓속말을 했다.

 "너무 날뛰진 말아라. 다치는 수가 있으니."

 자기 말만 하고 가버리는 무다구치 렌야.

 22기는 좀 있으면 졸업이다. 우습지도 않았다.

 ***

 육군사관학교가 떠들썩했다.

 시찰단이 온다고 했다. 시찰단의 우두머리는.

 "누구라고? 야마가타 원수? 그자가 왜?"

 "늘그막에 할 일이 없나 보지."

 다른 유학생도와 잡담을 나누며 연병장에 들어섰다.

 꽉꽉 차서 디딜 틈도 없었다.

 강연이 이어졌다.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육군 원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일본제국 최고의 영예인 공작 작위까지 받은 자였다.

 어떻게 보면 일본을 광란의 전범국으로 만든 첫 단초가 야마가타였으니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다.

 야마가타의 뒤로 여러 인물이 도열해있었다.

 대부분은 일본 군부의 인물 같았으나 양복을 입은 정부 관료들도 보였다. 여러모로 대규모 시찰이었다.

 육사에서도 학교장을 비롯하여 교직원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황국의 전쟁. 하늘이 일본제국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린 대전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세부적으로 아쉬운 것은 당시 만주군 총사령부와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지. 아니, 제대로 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항명에 가까운 불복이 있었다. 대본영의 지시대로 초기에 출혈을 감수하고 203고지를 탈환했더라면 전쟁은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음이야."

 야마가타가 역사 선생에 빙의한 것처럼 러일전쟁사를 하나하나 설명하였다.

 나이가 들면 사연이 많고 말이 길어지는 것은 시대공통인가 보다.

 살짝 졸 뻔했는데 마침 강연이 끝나고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행사를 마친 야마가타가 흡족한 듯 생도들을 훑었다.

 교관들은 육군의 대원로를 극진히 모셔 나가려 했으나 야마가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때쯤이면 첫 시험 성적이 나왔을 터인데, 수석이 누구냐? 한번 얼굴을 보고 싶다."

 교관들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서로를 돌아보았다.

 학교장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공작님, 일단은 이어질 행사가 있으니 다음번에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방금 내 말에 반문한 거냐?"

 "아, 아닙니다."

 "나는 지금 보고 싶다."

 "예···."

 육군 소장인 학교장도 야마가타에 비하면 병아리일 뿐이었다.

 교관이 생도들을 헤집고 날 찾아내 손짓했다.

 별수 없이 단상에 올랐다.

 가벼운 경례 후.

 "23기 생도 한신입니다."

 날 보자마자 묘한 표정이던 야마가타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나인이냐?"

 "네."

 "진무학교를 나왔느냐?"

 "네."

 "빠가야로. 적국의 병사를 세금을 들여 훈련시켜주는 꼴이라니. 내가 그렇게 진무의 설립을 반대했건만···. 진무에서 어떻게 가르치길래 지나인에게 육사의 수석을 빼앗긴단 말이냐? 허. 보나 마나 일본의 교육방식을 훔쳤겠지."

 저기요. 진무에선 아무것도 안 배웠어요.

 그 똥통에서 나는 혼자 공부했단 말입니다.

 "당장 추밀원(樞密院)에 진무의 폐지를 건의해야겠어. 적국에서 유학생을 받는 것도 그만둬야 해. 숱한 황군 청년들을 잃어가며 이룩한 대일본의 군사기술이야. 저깟 놈이 탈취해가는 꼴은 못 보겠어."

 분노에 차 혼잣말을 쏟아내는 야마가타를 보며 학교장은 안절부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령이 떨어졌다.

 "학교장은 대체 뭘 한 거냐? 넌 일러전쟁에도 참전했었지. 그 포화 속에서 뭘 배웠냐? 혹 지나인에게 특혜를 주는 건 아니냐? 유학생이랍시고 특별 과외를 붙인다던가."

 "겨,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육사의 수석을 빼앗길 수 있느냔 말이야!"

 "그건···, 한신 생도가 별종이라서 그렇습니다···. 다른 청의 유학생도들은 대부분 하위권을 맴돕니다. 한신 생도를 제외한 상위권은 모두 야마토 정신을 본받은 일본의 훌륭한 청년들이 차지했습니다."

 "흥. 그깟."

 혼자서 콧김을 뿜던 야마가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교관을 호출했다.

 "좋아. 한번 보자고. 석차표를 가지고 와봐."

 "옛."

 그때까지도 나는 어색하게 단상에 서 있어야만 했다.

 등 뒤로는 연병장에 수백명의 생도들이 날 올려다보고.

 눈앞에는 일본군의 원로가 나 때문에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순수하게 이 상황이 즐거웠다.

 시찰단의 얼굴을 한명한명씩 들여다볼 여유도 있었다.

 그중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그자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는데 입가에 감도는 감미로운 미소가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지? 군인은 아닌 것 같고. 관료인가?

 "석차표 입니다."

 "내놔봐."

 뺏다시피 야마가타가 석차표를 채갔다.

 그야말로 안하무인. 

 육군의 일인자가 육사에 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시범을 보여주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뭐야? 학교장. 얘기가 다르잖아!"

 "예?"

 "저 지나인 말고 상위권에 적국의 애새끼가 둘이나 더 있잖아!"

 "아, 그렇다고는 쳐도. 나머지는 다들 일본인···."

 "이건 굴욕이다. 대굴욕이야! 대일본제국의 육군사관학교 석차표라고는 믿을 수 없다. 삼십 등 이내에 외국인이 셋이나 있다니!"

 야마가타가 석차표를 꾸겨 던져버렸다.

 "시험 방식이 문제야! 한문 따위로 작문이나 시키니까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녔던 저 지나놈들이 성적을 잘 받는 거잖아! 근대화의 최첨병에 있는 육군사관학교가 그런 식으로 교육해서야 되겠어? 고리타분한 사서삼경 따위는 불태워버리란 말야!"

 "예···."

 "지나놈들이 청일전쟁에서 왜 찢겼느냐? 지나인은 노예근성이 있어서 항상 이민족에 지배당하는 데 익숙하고 허황된 옛 영웅주의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런 놈들은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또 무기력하게 패배할 거야. 그런 놈들의 경전은 읽을 필요도 가르칠 필요도 없어!"

 "예···. 예···."

 학교장은 별다른 항변도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대답만 해댔다.

 그런데 시찰단 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색한 일본어였다.

 "제가 한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야? 누구야? 너."

 "본인, 언론취재 자격으로 이번 시찰에 참여하게 된 청국의 량치차오(梁啓超)라 합니다.

 나와 눈이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얼굴이 익숙했던 이유가 있었다.

 동맹회의 기관지에서 흐릿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량치차오.

 중국의 개혁에 있어 오늘날 쑨원과 더불어 가장 이름 높은 사상가였다.

 동시에 쑨원의 혁명파와 대립하는 입헌파의 수장이 량치차오였다.

 "아아. 기자가 하나 온다고 했었지. 그게 너구나.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외세에 침탈당하는 조국을 둔 청국인으로서 공작님의 뼈저린 질책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질책이 자칫 청국의 미래까지 부정하는 건 아닌지 두렵군요."

 "허.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지나의 군인이 가장 잘하는 건 전쟁에서 굴복하는 것 아니냐? 내가 지나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외세에 수없이 짓밟혔다는 건 알지. 단 한 번도 외세에 침략당한 적 없는 황국의 민족성과는 근본부터 차이가 난다 이 말이야!"

 야마가타의 잔인한 폭언에도 량치차오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이번 시찰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시다시피 새로운 전쟁 교보재를 취재하기 위해서입니다. 교보재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시험해볼 계획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시험을 청국 생도와 일본국 생도의 대결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말씀하신대로 정말 민족성 차이로 전쟁의 승패가 나는지 확인보는 겁니다."

 "엉?"

 뜻밖의 말이었는지 야마가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금방 풀렸다.

 야마가타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실상 전쟁이라 함은 상대를 말살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지. 그런데 타국의 생도들끼리 맞붙게 하면 강요하지 않아도 불이 활활 타오를 거다!"

 "그럼 생도 선발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발? 그래, 해야지. 학교장 나 좀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야마가타가 학교장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찰단이 황급히 따라 일어나 우르르 야마가타의 뒤를 쫓았다.

 한 사람은 빼고. 량치차오였다.

 "반갑소. 량치차오라고 하오. 나는 민간인이니 경례는 할 필요 없소."

 "안녕하십니까. 육사 생도 한신입니다."

 악수를 했다.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전쟁 교보재라든가, 육사 생도로 시험을 해본다든가 하는 말들은."

 "이번에 일본군이 프로이센에서 새 문물을 들여왔다고 하오. 크릭스슈필(Kriegsspiel)이라는 건데 지도와 기물을 이용해 모의 전투를 할 수 있는 물건이라더군. 크릭스슈필을 일본군 실정에 맞게 교보재로 개발한 물건의 실제 제품을 오늘 시험해보려는 것 같소."

 "일종의 워게임을 말하는 겁니까?"

 "워게임이라. 그 말이 정확하오."

 건물 안에서 교관이 날 불렀다.

 그 모습을 보고 량치차오가 말했다.

 "육사의 수석생도를 부르는 것 같구려. 내 제안 때문에 졸지에 강제로 모의 전투장에 끌려가게 된듯하니 미안하오."

 "아닙니다. 바라던 바인데요. 신문물을 접하는 건 즐겁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청국을 모욕하는 노망난 늙다리의 망언을 참기 힘들더군. 가서 콧대를 짓눌러 주시오."

 "노력해 보지요."

 ***

 육사의 교실.

 급하게 책상을 이어붙여 만든 중앙에 커다란 지도가 놓였다.

 보자마자 어떤 전쟁을 모티브로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러일전쟁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던 뤼순 공방전이었다. 

 교관이 워게임의 규칙을 설명하였다.

 총 3개의 방에서 진행된다.

 일본 측과 러시아 측, 심판의 방을 구분한 것이며 전장의 안개를 실현하기 위한 구분이었다.

 내 방에서 명령을 내리면 전령이 이동하여 심판 방에 전한다. 그 때문에 전투의 결과조차도 전령이 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전투의 시행은 주사위로 결정하며 심판 방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가장 중요한 진영은 당연하지만 러시아 측이 되었다.

 옆방에 야마가타와 량치차오를 비롯한 심판진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며.

 그 너머 방에 일본군을 맡은 일본 생도들이 있을 것이다.

 대결은 특이하게 3 대 3이었다.

 워게임이 시작되면 서로 대화할 수 없고 서면으로만 소통해야 했다.

 당시 러시아군의 직급체계에 따라 부대 통제권도 분할된 것이 진짜 본격적으로 전쟁하는 느낌이 들었다.

 총지휘관으로서 아군 지휘관과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한신이다."

 "김현충(金顯忠)이야."

 "양위팅(楊宇霆)."

 우리는 육사에서 30등 안에 든 3명의 외국인이었다.

 근데 김현충이라고?

 "조선인이야?"

 "응."

 뭐라 더 말하려는데 교관이 시작 신호를 보냈다.

 뤼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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