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공방전2
일본제국 육군 원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칠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좋아···. 해보자고."
단순한 도상연습이라기에는 놀랄 만큼 정밀한 지형도와 기물들을 보고 있자니 일러전쟁 당시의 흥분이 살아나는 야마가타였다.
뤼순 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였지만 동시에 심각한 출혈을 야기한 전투였다.
그 때문에 이번 모의전투에서 야마가타는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를 원했다.
일본군을 지휘할 생도들에게 미리 계책을 귀띔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제 벌어질 뤼순 공방전은 작전대로라면 기존 역사와는 다른 완벽한 황군의 전투가 될 것이다.
"도상연습,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을 맡은 교관이 개전을 알렸다.
야마가타는 뤼순의 지도를 훑었다. 양 병력은 엇비슷했다.
일본군의 전력은 제1사단과 9사단, 11사단에 1개 후비여단을 합하여 6만명, 포는 400여문이었다.
러시아군은 4사단과 7사단, 4만 2천명에 600여문의 포와 기관총 100여정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해군은 1만 2천이었다.
"학교장,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일본군의 승리를 예상합니다."
"멍청한 놈아. 그건 당연한 거고! 전투의 양상이 어떨 것 같으냐는 말이다."
야마가타는 썰을 풀고 싶어입이 근질거렸다.
"당시 뤼순 공방전에선 개전 초기부터 요새를 직접 공격하다 큰 피해를 보았었는데, 아무래도 먼저 진지를 꾸리며 러시아군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너는 일러전쟁 참전 경험이 있지않느냐? 클라우제비츠는 안 읽었느냐?"
"후기전투였지만 일단은···, 예. 참전 경험이 있습니다. 전쟁론도 읽었습니다."
"그런 놈이 전쟁의 본질과 목적도 모른 채 참전했단 말이냐? 일러전쟁은 어디까지나 단기 결전! 러시아군이 병력을 증강하기 전에 빠르게 끝맺어야 하는 전쟁이었다!"
대본영에서 야마가타가 강력히 주장했던 바였다.
특히 뤼순 공방전에 있어 그러하였다.
러시아군이 요새를 정비하기 전에 단번에 총력을 기울여 함락시켜야 할 뤼순항이었으니.
맨몸으로 요새를 공략하려다 보면 피해는 어쩔 수 없다.
어설프게 병력을 분산 투입하여 전투가 길어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피해가 크다는 것이 야마가타의 지론이었다.
때마침 지령받으러 방을 나갔던 양군의 전령들이 돌아왔다.
일본군은 가장 먼저 군 사령부부터 서쪽으로 옮겼다. 2개 사단의 병력이동도 함께였다.
야마가타는 마음에 들어 외쳤다.
"좋아. 잘한다. 그렇게 해야지!"
"외람되지만, 사령부의 이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야마가타가 돌아보니 그 량치차오라는 청나라의 기자였다.
전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 어딜 끼어드는가 생각이 들었으나 옆방에서 청나라의 생도들이 벌벌거리며 기물을 옮길 생각을 하자 골려주고 싶어졌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어떻게 이겼는지 아느냐? 청이 자랑하던 북양함대를 궤멸시키고 황해의 제해권을 움켜쥔 덕이었다. 일러전쟁도 같았느니라. 황해의 제해권만 얻으면 아주 수월하게 흘러갈 전쟁이었어. 뤼순항은 러시아의 태평양함대 잔당들이 정박한 항구로서 뤼순 공략의 주목표가 태평양 함대의 궤멸이었다."
"그랬군요."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지는 서쪽의 203고지니라.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육지에서 안전하게 뤼순항에 정박한 함대를 포격할 수 있는 곳이지."
량치차오는 언론인답게 빠른 손놀림으로 속기했다.
그러면서도 입은 조잘댔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일본 생도들에게 203고지 공세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알려주신 거로군요."
야마가타는 뜨끔했으나 곧이어 가슴을 땅땅 치며 소리쳤다.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 어전회의에 참여했던 장성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니까.
"하! 그래! 하지만 당시 만주군 총사령부는 대본영의 결정을 계속해서 거부했지. 그리곤 203고지가 있는 서쪽은 내버려 두고 동북과 정면으로만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여 애꿎은 병사들의 목숨만 잃은 거야. 그렇게 3번이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는 겨우 203고지에 병력을 투입하여 점령했지. 그리곤 어떻게 됐나? 곧바로 남은 러시아군이 항복하며 공방전이 끝나버렸잖아!"
"그런 사정은 몰랐습니다."
"잘 봐둬라.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최강이니까."
서남쪽의 대규모 행군을 보여주는 일본군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러시아군 진영은 조용했다.
기껏해야 요새 건설, 도로 보강, 화포와 기관총 정비 등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량치차오는 평온한 얼굴로 워게임의 진행양상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가슴 한편은 초조했다.
워게임의 취재는 이번 시찰의 제 2목적이었다.
제 1목적은 한신이라는 생도를 만나는 것이었다.
동맹회의 소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맹회 내에서 특별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한신의 모습은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 여지가 충분했다.
진무학교에서 들려오는 그의 소문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육사에서까지 수석 자리를 거머쥐었다는 사실은 한신에 대한 그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하지만 야마가타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심판의 자리에서 모든 요소를 지켜보고 있는 육군 원수의 판단이 틀리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첫 번째 지령 하달이 끝나고 전령이 다시 양 방으로 뛰쳐나갔다.
더 빨리 들어온 건 러시아 전령이었다.
"203고지 방어 강화 공사! 서남방면에 병력 충원! 야포와 기관총 배치!"
량치차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신이 일본군의 이동을 읽었음이 틀림없다.
전령이 가져온 세부 명령서에 의해 기물이 이동했다.
뒤이어 일본군 전령이 들어왔다.
"1사단, 우익으로 크게 우회하여 고지전 준비! 9사단은 위치에서 진지 구축!"
야마가타는 203고지의 방어가 집중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수백 명이 지키는 조그만 진지일 뿐이다.
대규모 사단 병력이 돌격하면 함락은 기정사실이다.
러시아 전령이 나가기도 전에 두 번째 러시아 전령이 또 들어왔다.
이것이 3대3 모의전투의 묘미였다.
6명의 생도가 각자 지휘하는 부대가 있고 그들 사이에 명령 계통도 있다.
따라서 얼마나 소통을 원활하게 하여 부대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가 중요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자칫 불화가 생겨 원하는 전술을 펴지 못할 수도 있음이었다.
들어온 두 번째 러시아 전령이 외쳤다.
"대정자산(大頂子山) 등지의 저격 연대, 야포 전진 배치하여 포격!"
"뭐야?"
야마가타는 자기도 모르게 책상을 쳤다.
잔뜩 웅크리고 숨어있어야 할 러시아군이 무슨 배짱으로 앞으로 나와서 포격을 하는 거지?
물론 이유는 명확했다.
도로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야전에서 고지를 우회기동 중인 1사단이었으니.
오히려 가만히 이동하는 꼴을 지켜보는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리 빠르게 대처했느냐가 문제였다.
모든 지형과 기물을 보고 있는 심판 방과는 달리 생도들의 방은 전장의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상태였다.
미리 일본군의 이동을 아는 게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기민한 연계였다.
"포격에 따라 주사위를 굴립니다."
심판을 맡은 교관이 주사위 3개를 굴렸다.
또르르.
"일본군 피해. 전사 100명, 부상 200명. 러시아군 피해 없음."
"괜찮아. 별거 아냐! 전령, 빨리빨리 움직여라!"
야마가타가 재촉했다.
전장의 템포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전령들은 헐레벌떡 뛰어다니고 전장의 기물들은 마구 굴려졌다.
"좋아, 박아! 박으란 말이야!"
마침내 우회에 성공한 일본군 1사단이 좌익의 9사단과 함께 총공세에 들어갔다.
그동안 러시아군은 끊임없는 포격으로 일본군을 갉아먹었으나 그 피해는 사망자 일천을 겨우 넘기는 것으로 충분히 감당할만했다.
오히려 온통 일본군에 둘러싸인 뤼순 요새의 서쪽 진지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주사위를 굴립니다."
개전 이후 첫 대공세.
비좁은 야산 몇 개에 수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몰려들어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고작 도상 위에 나무 쪼가리들이 여러 개 뒤엉킨 것에 불과했음에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침을 삼키게끔 했다.
또르르.
정면 9사단의 공세, 유탄포의 성공률을 계산하는 시행이었다.
"1차 포격, 명중탄 100발. 러시아군 피해 없음."
"뭐야? 야, 교관. 계산을 어떻게 한 거야?"
야마가타가 다짜고짜 시험 교관을 다그쳤다.
"예, 이것이···, 워낙 유탄포의 명중률이 낮게 책정되어 있기도 하고,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발사하는 식으로는 콘크리트 진지를 깨부수는데 가중치를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젠장, 주사위 좀 신경 써서 똑바로 굴리란 말이야!"
"예···."
시험 교관이 눈치 보며 주사위를 다시 굴렸다.
이번에는 드디어 대규모 돌격의 시행이었다.
주사위 6개를 한꺼번에 잡고 굴리는 교관.
"203고지 진지 공략 돌입. 203고지와 동북 보루, 서남 보루 동시 교전, ···일본군 사망자 6200명, 부상자 11800명. 러시아군 사망자 500명 부상자 1900명. 고지 공략 실패."
야마가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말이 돼? 그 많은 병력이 돌격했는데 왜 함락이 안 돼! 뭐 전투가 이따위야?"
"그, 그것이···, 주사위를 굴린 결괏값대로 적용했습니다만···."
"요새 방어 가중치가 이상한 거 아니야? 일본군의 돌격 정신 교리에는 가중치를 제대로 적용하였나?"
"예···? 돌격 정신 가중치 말입니까?"
"그래! 이 구제불능아! 비켜 봐! 내가 황군의 전투를 보여주지."
야마가타는 시험 교관에게서 주사위를 빼앗았다.
또르르.
주사위가 굴렀다. 결괏값을 계산한 교관이 소리쳤다.
"이, 일본군 사망자 7900명, 부상자 16000명. 러시아군 사망자 600명. 부상자 1800명. 고지 공략 실패."
이전보다 오히려 나빠진 결과였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여기서 굴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전투라 할지라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돌격을 감행하는 것이 반자이 정신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죽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말이야!"
또르르.
주사위가 다시 굴렀다.
일본군의 대패. 결과는 같았다.
"다시 간다!"
또르르. 대패.
"다시 간닷!!"
또르르. 대패.
"다시 간다앗!!!"
또르르.
그렇게 몇번이나 굴렸을까.
굴러 나온 주사위의 결괏값을 보고 교관이 급히 외쳤다.
"203고지전 결과. 일본군 사망자 8200명 부상자 13800명. 러시아군 사망자 500명 부상자 2400명. 진지 함락 성공!"
야마가타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고 외쳤다.
"이거야! 이게 황군이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학교장이 박수를 치자 나머지 시찰단들도 따라 쳤다.
시험 방은 마치 실제 전장에서 일본군이 고지 함락에 성공한 것처럼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그 꼴을 보는 량치차오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 무슨 촌극이란 말인가? 이 방에 정상인은 나밖에 없는 건가?'
한참이나 전장의 결과를 기다리던 전령들이 소식을 가지고 각방으로 흩어졌다.
량치차오는 이깟 모의전투의 결과는 어떻게 나오든 좋았다.
인위적으로 주사위를 조작한 도상연습에 의미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대신 이런 상황에서 한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관심이 갔다.
일본군의 전령이 먼저 지령을 들고 왔다.
가장 주요한 요지를 개전 초기에 점령한 일본군은 일사천리로 뤼순 요새의 서남방면에 진지를 구축하여갔다.
러시아군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적 타격이 크겠지. 절대 질수없다고 생각했던 전투에서 졌으니···.'
량치차오가 침음하는데 러시아군의 전령이 들어왔다.
"새로 편성된 해병대를 포함하여 서남방면 전면 철수! 반룡산(盤龍山) 동북 일대 방어선에 합류!"
"뭐? 해병대? 그건 또 뭐야?"
야마가타가 인상을 찌푸린 반면 량치차오는 눈을 빛냈다.
"공작님께서 주사위와 씨름하는 사이, 러시아군의 편제에 변화가 있었군요. 태평양 함대의 해군들을 육지로 불러들여 해병대로 새로이 편성한 거로 보입니다."
"그게 무슨 멍청한 소리냐. 그럼 함대는 어쩌고?"
"글쎄요. 그냥 비운 것 같습니다만."
그때 일본군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203고지에 포격 진지 구축하여 유탄포로 뤼순항에 포격 실시! 한기도 남김없이 죄다 침몰시킬 때까지 맹사!"
일본군의 지령을 듣던 야마가타가 안색이 하얘졌다.
"멍청아! 함대에는 아무도 없다고! 가뜩이나 명중률이 낮은 포격으로 포탄을 낭비할 셈이냐!"
그러나 203고지에 야마가타의 말이 들릴 리 없었으니.
주사위를 몇번이나 굴려 예비포탄까지 모두 활용한 끝에 일본군은 태평양 함대를 궤멸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사망자는 제로였다.
러시아군은 비록 요새의 서남방면을 빼앗겼지만, 병력의 손실은 극히 적었다.
대신 일본군은 극심한 피해를 본 것에 더해 포탄이 수급될 때까지 공세에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량치차오는 뤼순에서 벌어지는 워게임에 점차 몰두해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가? 이게 그 전략의 천재라는 한신의 전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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