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공방전3
나는 강한 중압감을 받고 있었다.
뤼순 공방전은 20세기 현대전의 포문을 연 전투로 유명했다.
그 이유는 참호전의 시작이라는 점에 있었으니.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의 조합은 몇 년 후 벌어질 세계대전에서 극악의 시너지를 내며 각국의 젊은 인명을 그야말로 그라인더처럼 갈아버린다.
뤼순은 그 서막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지휘관들은 뤼순 전투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잃고도 참호전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 이유는 뤼순 전투를 단순한 공성전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피해가 너무 크다고? 요새를 공격하는데 피해를 입는건 당연하잖나? 닥치고 대규모 돌격이다!"
라는 식으로 퉁쳐버렸던 대본영.
덕분에 이번 워게임도 자신이 있었다.
콘크리트 진지 옆에 참호를 파고 대기하는 싸움.
철조망과 맥심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방어선에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적군.
이걸 못 이기면 문제 있다고 생각했는데.
- 203고지 및 서남 방어선 함락.
전령이 가져온 속보.
이게 뚫린다고?
전투 결과를 전달받은 양위팅과 김현충도 얼굴이 굳어졌다.
총지휘는 내가 하되 양위팅은 동쪽 방어선, 김현충은 서쪽 방어선을 맡고 있었다.
특히 서쪽에서 패퇴한 김현충은 자신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 서면을 보내왔다.
- 203고지 함락당하였으나, 근지에 2개 연대 전투력 보존. 항전하면 다시 탈환 가능. 사령관의 판단은?
203고지를 내주기는 했으나 적은 아직 진지도 뭣도 없는 상태.
곧바로 항전하여 개싸움으로 끌고 가면 탈환 가능성이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203고지를 둘러싸고 지옥같은 고지전이 몇차례나 벌어졌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3고지의 함락. 그 뒤에 석연치 않은 뭔가가 있다.
자연스레 선명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주사위를 굴리고 결과를 수정하는 야마가타. 감탄하는 일본군.
"역시 야마가타 원수야!"
"일본 육군은 강해!"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뤼순 공방전에서 대본영과 만주군사령부가 대립한 이유는 전투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대본영은 뤼순항에 정박한 태평양 함대의 잔당을 처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만주군사령부는 뤼순 요새의 러시아군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해군의 요청을 받은 대본영은 만주군사령부가 203고지를 주공으로 설정하도록 닦달했다.
203고지를 함락하면 장거리에서 손쉽게 포격으로 함대를 궤멸할 수 있었기에.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함대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내 목표는 뤼순 일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전의 승리.
어떻게 보면 워게임의 함정이자 꼼수라고도 볼 수 있다.
대국적인 숲을 보는 게 아니라 오로지 국지전의 승리만 노리는 것이니.
하지만 알빠임?
이기면 장땡이다.
그래서 개전 초기부터 꾸준히 해군을 불러들여 해병대로 재편성해왔다.
함포도 떼어내 육지로 옮겼다.
해상 측으로 향해있던 기관총들도 총구를 돌렸다.
내 전술적 목표는 교환비에서 꾸준히 이득을 챙겨 일본군 병력의 질과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현충이 건의한 것처럼 203고지 위에서 백병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백병전은 양측에 예측할 수 없는 피해를 불러올 것이고 방어의 이점이 있는 러시아군이 그런 개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다.
생각 정리를 끝낸 나는 곧바로 김경천에게 서면을 작성했다.
- 서남 방어선의 남은 부대 규합하여 전면 철수하라. 북정면의 대안자산(大案子山)과 의자산(椅子山) 등지에 참호 건설하여 방어선을 새로 그을 것. 기존 연대는 축성으로 돌리고 충원한 해병대는 여단으로 편성하여 저격에 힘쓰라.
쪽지를 받아든 김현충이 눈을 빛내곤 본인이 지휘하는 부대에 지령을 하달하여 갔다.
자칫 의아할 수 있는 내 지령에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고 곧바로 실행해간다.
아니,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이상이다.
단순히 묵묵히 수행하는 것을 넘어 내 의중을 이미 꿰뚫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받는다.
현충이 형. 그런 거야?
마음속으로 묻는데 거짓말같이 김현충이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이게 핏줄에서 오는 유대감인 걸까?
가벼운 미소 한 번에 가슴은 따듯해지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오른다.
과연 우리는 육군사관학교의 유이(有二)한 조선인이다.
뤼순의 지도를 살폈다.
전장의 안개 때문에 대부분은 흐릿하다.
빼앗긴 203고지가 특히 그렇다.
저 넓지 않은 지역에 일본군 2개 사단의 병력이 밀집해 있다.
동북 방면을 살폈다.
반룡산 일대의 방어선은 견고하다.
진무학교에서 양위팅은 독특한 학생이었다.
시치아의 팔기파와 사이가 친밀하였는데 그렇다고 북양파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장제스와도 곧잘 이야기를 나눴으며 쑨원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그 모든 파벌에 깊이 관여하진 않고 공부에 힘썼다.
- 요새 보강 위해 콘크리트 보루 2개, 영구포대 4개 건설 완료, 적 포병 진지 위치 파악 완료
양위팅의 서면. 깔끔한 군정(軍政)이었다.
실제 뤼순 공방전에서도 마지막까지 뚫리지 않았던 동북 방어선이었으니.
양위팅의 수비라면 끝까지 믿고 맡길 수 있겠지.
- 방위선을 따라 참호를 지어 모든 각도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라. 적의 위치를 파악하더라도 경거망동 말고 방위선을 사수하라.
지령을 받아든 양위팅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공격 대신 수비에 집중하라는 명령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나는 적의 다음 행보를 예측했다.
물론 태평양 함대겠지. 함대를 모두 잃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그 기회를 살릴 방법이 있다.
함대의 포격을 위해 일본군 서남의 2개 사단은 가진 포탄의 상당량을 소모할 터.
보급을 기다릴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시 전령이 들어와 203고지에서 포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이어 줄줄이 들어오는 전령들은 죄다 전함과 수반 함정의 격침 소식을 알릴 뿐.
여기가 승부처다.
김현충에게 서면을 작성했다.
- 광산대대를 포함한 특공여단을 편성하여 대정자산 일대를 장악하라. 갱도를 파고 참호를 구축하여 적의 보급을 차단하라.
나는 김현충의 부대가 빠진 빈자리를 해병여단으로 채워 북정면의 방비에 들어갔다.
급히 해군을 돌려 편성한 부대이니만큼 전투 수행에 애로사항이 많을 것이나.
이것은 워게임. 실제 전투가 아니다.
규칙은 한정적이며 전투에 영향을 끼치는 제반요소를 모두 구현해내기는 불가능하다.
그저 참호에 짱박혀서 기관총만 쏘아대는 일이면 해군이 아니라 민간인을 데려다 놓아도 게임상 페널티는 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작전에 들어간 특공여단이 얼마만큼 해주냐는 것.
그리고 나는 훗날 조선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김현충을 믿었다.
아니, 나중에 연해주에서 새로이 붙이는 별호대로 김경천(金擎天) 장군을 믿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차오르는 분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일본군 전술이 잘못된 게 아니다! 교보재에 문제가 있는 거야!"
분명 단박에 203고지를 차지한 것은 좋았다.
태평양 함대를 격침했을 때까지도 다소 포탄의 소비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이후가 문제였다.
203의 격전 이후 벌써 여러 번 전령이 오갔으나 격전은 없었다.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다만 러시아군의 일부 부대가 마치 돌출행동을 하듯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진지를 꾸렸을 뿐이었다.
그 꼴을 보고 야마가타는 적에게 내분이 생겼노라 좋아했건만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애초에 철도가 없어 보급이 어려운 뤼순의 서남방면이었다.
일본군이 2개 사단 규모의 대군을 그런 지역에 몰아넣은 것은 203고지만 차지하면 전투가 끝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왜 함대가 궤멸하였는데 러시아군이 항복하지 않는 거냐!"
방에는 자신 외에도 육군 장교들이 가득하였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대신 유일하게 깐족대는 자는 군인도, 일본인도 아닌 량치차오뿐이었다.
"함대는 없어졌을지라도 러시아군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하였습니다. 항복을 받아내야 할 쪽은 수비가 아닌 공격 쪽이지요."
"넌 좀 닥쳐! 뭘 안다고 떠드나!"
질책대로 입을 닫는 량치차오였으나 야마가타는 그 모습마저 밉살스러워 보였다.
큰일이었다.
기존의 판도는 뤼순 요새를 일본군이 포위하고 밀어 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비좁은 서남방면에 고립된 일본군을 러시아군이 포위한 형국이었다.
포위망 바깥에 있는 11사단은 요새의 동북 방어선에 막혀 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양군의 전령은 계속 들락날락하고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야마가타가 걱정하던 문제가 생각보다도 더 빨리 닥쳤다.
심판을 보는 교관이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군량 부족으로 일본군 1사단과 9사단 사기하락. 불이익이 적용됩니다."
이제 일본군의 전투는 더 낮은 숫자가 적힌 주사위로 실행될 것이다.
야마가타는 조마조마하여 도상의 날짜를 살폈다.
여전히 일본군이 승리할 방법은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기 중인 제7사단이 합류한다면 방어선을 뚫을 타격력이 생긴다.
하지만 날짜를 확인한 야마가타는 절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직도 1904년 10월 초.
7사단 투입 이벤트는 최소 한 달 후에야 터진다. 그러나 고립된 1사단과 9사단에 그만큼 버틸 여유는 없다.
그사이 포위망 바깥의 11사단이 몇차례 견제를 시도하였으나 여의찮았다.
동북 방면의 러시아군은 마치 겨울잠이라도 자는 것인지 굴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교관이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군량 부족이 지속되어 일본군 1사단과 9사단 사기하락 및 아사자 속출. 불이익 2단계가 적용됩니다."
그때 일본군의 전령이 들어와 외쳤다.
"9사단은 대정자산 기슭으로 이동, 대규모 돌격 준비! 1사단은 9사단의 돌격에 맞추어 동시에 의자산 및 대안자산의 고지전 준비!"
더는 버티지 못한 일본군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어오는 모습.
전투 결과에 따라 전황을 완전히 뒤엎어 버릴만한 대규모 돌격 준비였다.
하지만 지켜보는 야마가타는 속이 쓰라릴 뿐이었다.
"병신들. 7사단의 도착까지 버틸 거면 끝까지 버티거나, 돌격을 할거면 좀 일찍할 것이지. 2단계 불이익이 적용되자마자 돌격하는 건 어느 나라 군대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야마가타는 일본군의 기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아직 희망의 끈은 있다.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다.
일본군의 정신력은 최강. 한껏 위기에 몰릴수록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 야마가타였으니.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러시아 전령의 외침은 그 미약한 희망조차 깨버리는 암담한 것이었다.
"전령! 대정자산과 의자산, 대안자산 일대에 기뢰 매설 실시! 방면의 가용병력을 모두 투입하여 신속하게 매설하고 후퇴!"
야마가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육군 원수가 조용하자 도리어 시찰단의 장교들이 소곤거렸다.
"기뢰는 어디서 나온 거야?"
"태평양 함대가 가라앉기 전에 쟁여놓은 듯 하군."
"그런 좋은 게 있으면 미리 매설할 것이지 왜 지금 이 순간에?"
"글쎄···, 들키니까?"
"어차피 기뢰는 지뢰랑 달라서 돌격해갈 때 훤히 보이잖나. 그럼 아무 때나 매설해도 똑같을 텐데."
"하지만 이건 도상연습이야. 실제와는 다르지···."
장교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본 측 전령이 들어왔다.
전령은 제법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목청껏 외쳤다.
"1사단과 9사단. 일제히 반자이 돌격! 방위선을 뚫을 때까지 무차별 공세!"
일본군의 대규모 돌격.
교관이 입을 꾹 다문 채 주사위를 굴려 기뢰의 폭파 시행을 계산하였다.
성인 두셋을 합한 거대한 몸체의 기뢰.
그러나 바로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지도 위의 일본군은 기뢰에 마구 폭사해가면서도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교관은 자기도 모르게 야마가타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턱을 괴고 전투에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관이 떨리는 손으로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지옥 같은 기뢰 밭을 뚫고 참호에 도달한 일본군의 대규모 전투 시행.
불이익 2단계를 적용한 일본군이 기관총 포화에 쓸려나갔다.
확실히 이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게임이었다.
한 명도 도망치지 않는 일본군은 돌격에 돌격을 거듭했다.
8개를 굴렸던 주사위가 6개로 줄어들고.
4개에서 다시 2개로 줄어든다.
또르르
마지막 1개의 주사위가 굴렀다.
마지막 나무기물이 지도에서 제거되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야마가타가 입을 열었다.
"치워."
명령을 들은 교관은 재빨리 지도를 접고 기물을 정리했다.
러시아군의 대승리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