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공방전4
지금쯤이면 전투 결과가 나왔을 텐데. 전령은 언제야?
문이 벌컥 열렸다.
나타난 자는 전령이 아닌 량치차오였다.
"이겼네!"
"일본군이 항복했습니까?"
"항복이라기보다는···, 야마가타 공작이 워게임을 임의로 종료해버렸지."
"무의미한 피가 더 흐르지 않아 다행입니다."
"피라고? 정말 그런 듯도 하군. 전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진짜 전투가 벌어지는 것처럼 몰두하였으니 정말 뤼순 요새가 피로 물든 것 같았네."
껄껄 웃는 량치차오를 뒤로 하고 전투를 함께 치른 전우들과 주먹을 맞댔다.
김경천이 말했다.
"이게 먹힐 줄은 몰랐네. 기뢰 밭으로 돌격하는 일본군이라니."
"특공여단이 포탄의 보급을 끊은 것이 좋았어. 원래라면 일제 포격으로 상대 진지를 헤집어 놓고 돌격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일본군은 포탄 부족으로 포격을 생략했지. 만약 포격이 있었다면 기뢰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양위팅이 동북방면에서 방위선을 걸어 잠근 덕도 크게 보았네."
양위팅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모두 함께 이룬 승리였다.
심판 방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야마가타 원수는 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채 눈을 부라리고 다른 시찰단의 인물들은 딴청을 피웠다.
눈치 없는 사람처럼 량치차오가 학교장을 재촉했다.
"교장님, 워게임에서 승리한 생도에게는 포상이 있지 않습니까?"
"에···, 그렇소. 한신 생도, 김현충 생도, 양위팅 생도는 이리 오거라."
학교장이 상장을 수여했다. 특별한 것 없는 종이 쪼가리였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보상은 마음에 들었다.
"포상으로 특별외박 4회를 수여한다."
파칭코 사업에 착수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였는데 가뭄에 단비 같은 특별외박이다.
상장을 갈무리하자마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장! 이깟 행사 대충 때려치우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저 교보재는 치워버려.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그, 그래도 육군대학에서 고심을 들여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실제 전장의 교리를 단 일할도 담아내지 못하는 물건이 무슨!"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야마가타는 직접 지도를 집어 들고는 찢어버렸다.
두동강 나버린 뤼순항이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육군대학에 연락하여라. 개똥같은 물건 개발하느라 수고하였다고. 이깟 기물 놀음으로 장난칠 여유가 있으면 어떻게 하면 육군을 강하게 육성할 수 있을지나 고민할 것이지."
"예···."
"다 폐기해."
뤼순항에 이어 일본군과 러시아군의 기물들도 쓰레기통 행이 되었다.
워게임의 폐기.
어쩌면 나는 제법 큰일을 해낸 것이 아닐까.
실제 역사의 일본군은 워게임 시뮬레이션으로 나온 결과를 믿지 않은 덕에 그 막장스러운 전쟁들을 일으킨 것이지만.
그 이전에 워게임 시뮬레이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다.
일본군의 전력은 더 약해지려나?
야마가타는 쓰레기통에 침을 탁 뱉고는 성큼성큼 방을 나가려다 내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야! 너가 잘해서 이긴 거 같아? 이깟 모의 전투 따위에 그리 과몰입해서 아득바득 이기고 싶었어?"
내가 아무리 나대는 걸 좋아한다 해도 야마가타는 일본육군의 기라성같은 원로.
그 앞에서까지 설칠 생각은 없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한국 군대식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갈굼당할 때는 무조건 아니라고만 외치면 된다.
야마가타가 다시 꼬장을 부렸다.
"모의 전투라 함은 서로의 재원을 활용하여 어울리는 맛이 있어야지, 야비하게 수비만 하는 건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야! 그래 놓고서는 마지막에는 규칙의 허점을 악용하여 뻔뻔하게 승리를 갈취하다니. 지나에서는 그렇게 교육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예라고 대답할 뻔했다.
야마가타는 마지막으로 묵직하게 욕을 박아주시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게임 한번 좆같이 하네. 썅."
극찬.
극찬을 받았다!
***
육군사관학교에서 벌어졌던 도상연습은 곧 잊힌 사건이 되었다.
애초에 심판 방에서 워게임을 참관한 자는 시찰단의 소수. 입막음을 한 것인지 어디 하나 관련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곳이 없었다.
야마가타의 주도 아래 워게임 개발 프로젝트가 중지되었다는 얘기만 뜬소문처럼 돌 뿐이었다.
전투를 지휘했던 여섯 생도도 뤼순 공방전에 별달리 붙일 말이 없었다.
전장의 안개에 가로막혀 전체 전투의 양상을 파악하기 힘들었고 자신의 전선에 집중하느라 다른 방면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
그저 어찌어찌해서 러시아군이 이겼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소소하게 흘러나왔다.
어디까지나 주말에 특별 외박을 나와 기타 잇키와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신주쿠의 찻집.
기타는 날 보자마자 묘한 쓴웃음을 지었다.
"전신(戰神)이 오셨구려."
"예?"
"곧 있으면 구국(救國)의 영웅이 되실 것 같소이다."
기타가 신문 한 통을 툭 던졌다.
신문의 1면에는 내 육사 입학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었다.
그 위의 헤드라인은 아주 과했다.
-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전신이 강림! 광둥성 출신 한신 생도, 일본의 최정예 육군을 농락하다.
아니, 기껏해야 워게임일 뿐이었잖아요.
제목 낚시꾼의 자질이 있는 량치차오였다.
기사는 1면부터 4면까지 이어져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나 유학 시험을 보고, 진무학교에 입학하여 조기졸업을 한 후, 육사에 입학한 한신이라는 녀석의 생애가 세세히 적혀있었다.
그 문장들 속에서 나는 조국 걱정에 잠 못 이루는 구국의 애국자가 되어있었다.
내가 조선인이라는거 말 안했나···?
"기사에 나오는 워게임이란 게 뭐요?"
"별거 아닙니다. 심각한 결함이 있어 폐기 처분되었으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요."
"량 선생은 청일전쟁이나 의화단의 난 당시 귀하가 청의 군부에 있었더라면 변란을 막았을 거라고 강변하는구려."
"언론인의 흔한 과장입니다. 그보다 사업 얘기나 하시지요."
기타는 할 말이 남았는지 아쉬운 표정을 짓다 이내 사업 경과를 알려주었다.
"인허가는 받았소. 가게를 열 장소도 물색해 놓았지."
"잘됐군요."
"그 기계가 귀하가 말하는 파칭코요?"
기타가 내 옆에 있는 파칭코 시제품을 가리켰다.
홍콩에서의 노하우를 발전시켜 만든 가능성 2호기였다.
"예. 한번 시험 삼아 해보시겠습니까?"
"아니오. 그런 도박기기 따위는 관심 없소. 내 목표는 오로지 공문회의 소멸이니."
"근래에 공문회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천가 놈이 귀하의 아이디어를 훔쳐 파칭코 사업을 벌이려 시도한다오. 외국에서 핀볼을 잔뜩 수입해서 벌써 신주쿠의 도박장 이곳저곳에 배치했다고 들었소."
천치메이 자식. 멍청하긴.
핀볼과 파칭코는 전혀 다르다고.
동맹회의 혁명 자금이 또 애먼 돈으로 날아가는구나.
"운영은 된답니까?"
"모르오. 나는 도박장 근처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오."
"그렇군요."
"그보다 이제 계획은 뭐요? 가게를 개점하여 자금을 모을 거요?"
"예."
"가게를 운영하려면 힘 좀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필요할 텐데. 내가 아는 애들이 좀 있소. 소개해주길 원하오?"
기타가 아는 사람들이라 해봤자 뻔하다.
보나마나 일본개조 사상에 사로잡힌 극단주의자들이겠지.
그런 정치병 걸린 놈들을 잘못 썼다가는 된통 당하는 수가 있다.
"아닙니다. 저도 아는 친구들이 있으니."
"귀하가? 이곳 도쿄에서? 동맹회의 인물들이오? 아니면 육사와 관련이 있소?"
"아닙니다. 동맹회든 육사든 관련 없습니다. 오로지 저를 위해 힘써주는 친구들이지요."
"그런 친구들이 있다니···. 모르긴 몰라도 오래전부터 도쿄에서의 혁명을 준비해 온 귀하의 진정성이 느껴지는구려. 이 사람, 다시 한번 감복하였소."
"예. 예."
파칭코 장사를 하기 위해 데려온 삼합회의 부하들이 졸지에 혁명 지사로 탈바꿈했다.
기타 잇키와의 사업 논의.
파칭코 시제품의 테스트와 생산.
가게 인테리어 및 점원들의 인사행정.
서류작업은 육군사관학교에서 해내며 외박이 있음에도 짧기만 한 주말을 바쁘게 뛰어다니며 보냈다.
그런 끝에 1910년의 산들산들한 봄날.
도쿄 신주쿠의 대로에 「가능성」2호점의 간판이 내걸렸다.
***
"그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임관 후에는 더 많은 시련이 닥쳐올 테니.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너희들과 함께했던 지난 몇 달은 소중한 추억이었다. 평생 간직하마!"
22기 무다구치 렌야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뒤따라 몇몇 생도들이 눈물을 훔쳤으나 또 다른 몇몇은 얼른 꺼지라는 표정으로 무다구치를 노려보았다.
졸업식 날까지도 극명하게 보이는 대립이었다.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카디들은 무다구치와 얼싸안고 추억을 공유했으나.
일반 구제중을 졸업한 D들에게 무다구치는 그저 악연일 뿐일 테니.
나는 아예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우글대는 생도들 너머 방금 사라진 제복인. 메이지 덴노를 생각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바로 작년.
이 거리라면 나는 맞출 수 있었을까?
마치 강의실에 갑작스레 들어온 테러범을 제압하는 상상을 하는 것처럼, 일본 천황을 저격하는 상상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이 상황이 이채로웠다.
저 대한해협 너머 한반도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제국의 야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순간에도 고통받고 있을 대한제국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으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역사라도 내 뜻대로 움직이려면 걸맞은 힘이 필요하다.
"오늘만은 형이라 불러라! 내가 허락하마."
"진짭니까?"
"그래, 자식아. 불러봐라."
"무다구치 형!"
"오냐!"
무다구치가 1중대 2구대의 카디들과 부둥켜안고 사관생도의 정을 나누었다.
"야! 오늘은 이 형이 쏜다! 가자!"
한껏 기분이 오른 무다구치가 2구대 생도들을 이끌었다.
카디들은 환호했으나 D들은 떨떠름하였다.
"어···. 선배, 저희도 갑니까?"
"뭐? 너희는 2구대가 아닌가?"
"마, 맞습니다···."
"근데 뭘 물어?"
"그, 같이 졸업한 22기 선배님들도 계시는데 왜 같이 어울리지 않고 저희들과 있는가 싶어서···."
무다구치가 인상을 팍 썼다.
예의 육사 입소 첫날의 그 흉악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지금 나보고 친구 없다고 갈구는 건가? 네놈 짬 다 찼다, 이건가?"
"아, 아닙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1중대 2구대는 영원하니까. 자, 가자!"
무다구치 렌야가 거만하게 양팔에 D들을 어깨동무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나는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무다구치는 감히 내게 어쩌지 못할 터였다.
량치차오가 여러 번에 걸쳐 발행한 전략의 천재, 한신 일대기는 꽤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는 허구한 날 그 얘기였다.
청에서는 황실에까지 소개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 직위도 없는 일개 유학생에 불과했던 나는 일약 외교상의 주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스포츠 스타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아시아의 최고 명문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청나라의 생도가 1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소재는 기깔난 국뽕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레 육사에서 나를 대하는 태도도 조심스러워졌다.
청의 유학생이 일본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주일공사에 신고하는 경우는 많지만, 보통은 합의하고 별일 없이 끝나기 마련.
하지만 내가 만약 육사에서 부당하게 대접받는다면 여론에 영향을 미쳐 자칫 외교적 불화로까지 번질 수 있었으니.
육사에서 지침이 내려와 무다구치가 날 완전히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던 이유였다.
2구대를 이끌고 희희낙락한 무다구치.
기껏해야 유곽에나 가겠지. 관심 없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나는 문득 들려오는 카디의 외침에 멈춰섰다.
"무다구치 형! 신주쿠에 파칭코 가게가 생겼는데 거길 갑시다!"
"파칭코가 뭔데?"
"아, 가면 압니다. 가십시다."
자영업자가 손님 반응 조사하는 건 당연하잖아.
장사 좀 잘되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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