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08)

의리없는 항쟁

 얼굴 시커먼 젊은 장정들이 으스대며 신주쿠 거리를 걷는다.

 괜히 여기저기 눈도 부릅떠 본다. 거리의 사람들은 시비가 걸리지 않도록 슬금슬금 피한다.

 이 나이대의 청년들이란 으레 함께 뭉쳐 유흥가를 걷기만 해도 즐거운 것이다.

 "네 말 들어보니까 그냥 구슬 뽑기잖아. 그게 재밌겠냐? 아무렴 야들야들한 여자 속살 만지는 것보다 재밌을까."

 "믿어보시라니까요."

 2구대를 왕창 끌고 파칭코장으로 향하는 무다구치 일행.

 하지만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심상치 않다.

 "뭐 이리 사람이 많아? 무슨 행사 있나?"

 짜증을 내는 무다구치.

 생도 한 명이 행인을 잡고 물었다.

 "이보쇼, 여기 왜 서 있는 거요?"

 "기다린다."

 "뭘 말이오?"

 "파칭코."

 파칭코장 「가능성」의 규모는 절대 작지 않았다.

 골목이 좁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이상으로 도박꾼들이 득실거릴 뿐이었다.

 "이상하네. 지난달에 왔을 때는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그새 입소문이 번졌나."

 "그냥 딴 데 가자. 오면서 보니까 반대 골목에도 파칭코장 있더구먼."

 "거긴 이름만 파칭코지, 여기랑 전혀 달라. 거기야말로 그냥 구슬치기라니까? 진짜는 여기밖에 없다고."

 생도들이 쑥덕댔다.

 지켜보던 무다구치가 대뜸 외쳤다.

 "자랑스러운 육사 생도들이 이깟 난관에 곤욕을 겪나? 뚫고 가면 되지!"

 "어떻게 말입니까?"

 "잘 봐둬."

 무다구치는 어깨를 딱 펴고 인파를 헤집고 지나갔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든 말든 눈알을 부라리며 뚫고 갔다.

 그러던 무다구치는 어느 순간 딱 멈추어 섰다.

 파칭코장 입구 바로 앞에 검은 양복의 떡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뭐야? 비켜!"

 "줄을 서주십시오."

 서툰 일본어.

 하지만 양복 위로 드러나는 우람한 근육은 전혀 서툴지 않았다.

 뒤에서 구경하는데 무다구치의 뒤통수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내가 누군지 몰라?"

 "줄을 서주십시오."

 "야, 나는 육군사관생도야! 알아들었으면 비켜!"

 "줄을 서주십시오."

 뒤따르던 2구대 생도들도 도착하였다.

 길거리의 한복판에 수십명의 장정들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는 사관생도라고···. 좋은 말로 할 때 비켜."

 무다구치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우리 쪽을 힐끔힐끔 보았다.

 뭐 하는 거야?

 쌈을 걸 거면 걸고 튈 거면 튀어야지. 우두커니 서서 뭘 노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무다구치의 처량한 눈빛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이자는 지금 체면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생도들이 그만 떠나자고 말을 해주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그저 자리에 붙박인 채 앵무새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무다구치 형. 그놈의 체면이 뭔데.

 쫄리면 형이 튀어야지. 튈 핑곗거리를 남이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면 어떡해.

 광경을 지켜보던 생도 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애처롭던 무다구치의 눈빛이 반짝였으나 생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를 무참하게 박살 내는 것이었다.

 "무다구치 선배! 보여주십쇼! 저희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

 "그래요. 형님. 무사도 정신으로 저 깡패 면상 한번 갈겨주시죠!"

 생도들이 환호했다.

 얼떨결에 떡대와 일대일로 마주 선 무다구치였다.

 나는 속으로 깔깔대다 떡대에게 슬쩍 눈짓했다.

 떡대가 알아들었다는 듯 살짝 끄덕였다.

 "이야아!"

 이판사판이라는 걸까.

 무다구치가 고함을 질렀다. 두 주먹을 꽉 쥐는데 뭔가 엉성하다.

 그런데 무다구치가 채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떡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어리둥절한 무다구치와 환호하는 생도들.

 "오오! 역시 형님! 기백만으로 야쿠자를 압도하셨다!"

 "우와 정말 데단해~~."

 파칭코장에 입성하였다.

 불시방문임에도 매장관리가 마음에 들었다.

 도박장치고는 청결했고 특별히 행패 부리는 이도 없었다.

 "이야, 이게 다 뭐냐? 별천지구먼."

 "1엔에 구슬을 100개 줍니다."

 무다구치는 마음에 들었는지 곧장 파칭코에 빠져들었다.

 나는 게임을 하진 않고 돌아다니며 매장이 잘 돌아가는지 살폈다.

 빈자리 하나 없이 따닥따닥 붙어 앉은 도박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단했다.

 이거 조만간 3호점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람을 쐬러 골목에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꽁초를 반쯤 태웠을까, 익숙한 얼굴이 침을 찍 뱉으며 걸어왔다.

 나는 바로 앞까지 걸어오길 기다렸다가 묵묵히 물었다.

 "한 대 줘?"

 "응."

 담배를 건넸다.

 "사쿠라가 아니네? 이젠 담배도 고급만 찾아 피우는 거냐."

 "그럴 리가. 애초에 잘 피우지도 않아."

 담배를 받아든 장제스는 쪼그려 앉아 말없이 한 대를 다 태웠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진무에서는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던 장제스와 나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같이 어울릴 일이 줄어들고 사이는 서먹해졌다.

 특히 최근에는 아예 마주친 일이 없었으니.

 작년 말에 일본에 돌아왔을 때 본 이후 올해는 처음 보는 거였다.

 사이가 멀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요즘 천치메이 과장님은 어떠냐?"

 "형이야 항상 혁명 준비하느라 바쁘지."

 "뭔 사업을 또 한다더만."

 "파칭코? 파리만 날려. 가게 처분해야 하는데 기곗값도 안 나올 거 같다던데."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장제스가 천치메이와 의형제까지 맺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사람의 사이가 돈독해질수록 자연히 나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에효."

 장제스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나 간다."

 "벌써? 밥이라도 먹고 가."

 "안 고파."

 "아니면 게임이라도 한판 하고 가. 나 요즘 사업하는 거 알지?"

 "알지. 나 자주 해. 재밌더라 파칭코. 근데 지금은 그냥 갈게."

 장제스는 또 한 번 가래침을 뱉더니 건들거리며 골목을 나갔다.

 그러다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발걸음을 돌려 다시 돌아왔다.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의 장제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조심해."

 "뭐?"

 "천 형이 너 노린다."

 장제스는 그 말만 하고는 홱 돌아서 골목을 빠져나갔다.

 뒤따라 나갔으나 금세 인파에 파묻혀 장제스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한 천치메이가 날 건드릴 방법은 없다.

 놈의 세력이 아무리 방대하다고 해도 일본제국의 사관학교까지 뻗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학교 바깥에서였다.

 천치메이와 척진 이후부터 얼마간 각오한 바였지만, 암살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성가신 일이었다.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건물에 들어가면 도주 경로부터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었으니.

 나는 슬슬 승부를 내야 할 시점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화창한 주말.

 육사를 나와 기타 잇키가 있는 찻집까지 가는 것만 해도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게 아니었다. 

 "그게 정말이오?"

 천치메이가 날 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타 잇키는 짐짓 걱정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왜 기뻐 보이지?

 기타가 재잘거렸다.

 "그럼 더 기다릴 수 없겠구려. 공문회 궤멸을 위한 작전을 서둘러야겠소."

 "무기와 용역은 잘 구해집니까?"

 "자금이 든든한데 무슨 걱정이오. 지금 당장이라도 스무명쯤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소."

 "천치메이 개인을 타격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면 그리 많이도 필요 없을 겁니다."

 "그럴 수는 없지. 요즘은 시절이 수상하여 대가리를 날려도 몸통이 남아있으면 대가리가 다시 자라난다오. 명목상이라도 공문회에는 오야붕이 있잖소. 천치메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놈은 옳다구나 공문회를 바로 접수할 거요."

 어떻게든 대규모 항쟁을 원하는 기타 잇키.

 아무래도 꺼려지는 이유는 역시 폭력에 대한 21세기스러운 거부감이겠지.

 지금껏 내가 정직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피와 폭력은 항상 내 삶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적당한 때와 장소는 있습니까? 천치메이는 워낙 비밀스러운 자라 동맹회에서도 그의 일과와 거동을 아는 이가 없더군요."

 "본인도 모르오. 하지만 알만한 사람을 안다오."

 "누구입니까?"

 "천가 놈의 오른팔인 자요. 귀하와는 같이 공부한 적도 있다지."

 음.

 과연 장제스라면 알겠지. 하지만.

 "녀석은 알아도 가르쳐주지 않을 겁니다."

 "가르쳐주도록 만들면 되오. 천치메이와는 달리 그놈은 애송이일 뿐이오.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잡아 올 수 있소."

 "···그 정도로 쉽지는 않을 텐데요."

 "그놈이 대가 세다는 건 들어서 안다오. 하지만 입만 열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오? 팔다리가 부러지고 음경이 짓밟히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는 자를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장제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파칭코장의 어두운 골목에서 쓸쓸히 멀어지던 그 모습.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보게 될 겁니다. 녀석은 불지 않을 테니."

 "그럼 어떡할 거요? 동맹회 근방에서 항쟁을 벌일 수는 없소. 동맹회의 분열은 곧 혁명의 실패이니, 이일은 최대한 동맹회와 연관되지 않는 선에서 해내야 하오."

 "우리가 찾아갈 수 없다면 찾아오게 하면 됩니다."

 "천가 놈을 유인하자는 말이오?"

 "예. 천치메이는 절 노리고 있으니.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기타는 만류하려는 것처럼 두 손바닥을 크게 들었는데.

 아니다. 손뼉을 짝짝 쳐댄다.

 "좋은 생각이오! 과연 전략의 천재!"

 이젠 걱정하는 척도 안 하네.

 신나서 박수를 치던 기타가 다시 물어왔다.

 "헌데 귀하가 미끼가 된다 해도 천가 놈이 직접 나타나리라는 보장이 없잖소. 암살자만 보내 깔끔하게 처리하려 들 수도 있음인데."

 "천치메이는 올 겁니다. 제 파칭코 사업을 탐내고 있으니."

 "오호라. 그렇군."

 "기타 선생님도 몸조심하십시오. 또 모르지 않습니까. 선생님을 노릴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괜찮소. 참, 이것. 귀하도 필요하겠군."

 기타가 품에서 하얀 천에 쌓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뭡니까?"

 "가지고 다니시오."

 들어보니 묵직했다. 물건의 정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천을 살짝 들어 확인했다. 26년식 리볼버.

 소총이라면 많이 쏴봤지만 권총은 처음이다.

 "이건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여기저기서 선물이랍시고 준다오."

 총기가 선물로 들어오는 남자. 멋있어.

 가지고 다니면 쓸일은 있겠지.

 기타가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서 몇명이 필요하오?"

 "수보다 중요한건 질입니다. 필요한 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어중이떠중이를 많이 모아봤자 오히려 정보가 새어나가고 혼란만 가중시킬 겁니다."

 "그건 걱정마시오. 실패시 할복의 각오가 있는 자들로만 선별할 테니."

 기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기타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

 나 스스로도 살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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