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없는 항쟁2 (수정)
천치메이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기다리는 일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해가 중천에서 능선에 걸릴 때까지 재떨이가 꽉 찼다.
비밀 거처의 방문을 벌컥 열고 공문회의 부하가 들어왔다.
마침내 원하던 소식이다.
"고문(顧問)님, 잡았습니다."
"가자."
천치메이는 목적지로 가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수많은 반동(反動)인사들의 목숨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취해온 그였다.
이제껏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번은 뭔가 특별한가?
천치메이는 한신과 처음 대면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신기에 가까운 마작 실력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을 때만 해도 똘망똘망한 청년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이후 나눈 짧은 대화에서 천치메이는 한신이 어떤 자인지 바로 파악했다.
자신이 결코 컨트롤할 수 없는 자.
멸만흥한의 혁명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자였으며.
가슴속에 알 수 없는 꿍꿍이를 품곤 드러내지 않는 놈이었다
그 말은 곧 쑨원을 정점으로 확고한 상명하복으로 돌아가야 할 동맹회에 해가 된다는 의미였다.
당시 천치메이는 천천히 두고 지켜보려 했다.
하지만 실수였다. 놈의 성장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진무학교를 장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휘젓는 놈의 행사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대해져 종래에는 이 지경까지 왔다.
"뱃속에 검은 무저갱(無底坑)을 숨겨두고 있어."
"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꼬붕은 천치메이가 혼잣말하는걸 알고 입을 다물었다.
사색에 빠져있던 천치메이가 다시 말했다.
"상황을 자세히 말해봐라."
"말씀하신 대로 잠복하고 있으니 놈이 걸려들었고 저항 없이 사로잡았습니다. 지금은 최고 고문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입니다."
"수상한 점은 없고?"
"수상한 점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간 미꾸라지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던 놈인데,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러워. 어딘가 의심스럽단 말이지."
"유우토는 저와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 함께 컸습니다. 절대 거짓말을 할 녀석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다구요."
이번 거사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한신이 새로운 파칭코장 개점을 준비한다는 이야기.
그걸 위한 파칭코 기계를 영국에서 받아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 오늘 낮.
파칭코장 「가능성」에 위장 취업한 부하가 전해온 정보였다.
천치메이는 재빨리 손을 써 도쿄항에 무장한 부하들을 보내 잠복시켰다.
이후 오랜 기다림 끝에 한신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거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네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다. 한신이 고의로 거짓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을 염려하는 거지."
"설마 그렇게까지···. 유우토는 공문회와는 아무 연관 없는 데다가 범법 기록도 깨끗하기 때문에 들켰을 리 없습니다."
천치메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이 한신이라는 놈을 상대할 때면 항상 예상을 왕왕 벗어나는 일이 생기곤 했기 때문이었다.
"장중정은 어딨나?"
"···그것이. 이번 일에는 참여 안 하겠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녀석이니."
천치메이도 고약한 취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진무학교에서 단짝이었던 둘을 싸움 붙일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둘이 맞붙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상황의 통제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천치메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인적없는 도쿄항은 파도 소리만 철썩거렸다.
"너흰 주변을 수색해라."
"예."
도쿄항에 잠복한 부하들, 그리고 자신과 함께 도착한 부하를 합쳐 도합 사십명이 넘는 인원이 한신 한 사람을 잡겠다고 모였다.
"이쪽입니다."
부하의 안내에 따라 낡은 창고건물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등도 없어 해가 지면 완전히 어두울 것 같았다.
한신은 창고의 정중앙에 평온하게 앉아있었다.
들어오는 천치메이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멀쩡해 보이는군."
천치메이는 들어오자마자 부하들에게 눈을 흘겼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특별히 얻어맞은 흔적도 없다.
부하가 변명했다.
"저항하지 않을 테니 수발은 자유롭게 해달라고 해서···. 어차피 사로잡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과연 그 말대로 창고는 야쿠자들로 꽉꽉 차 있다. 한신이 달아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천치메이는 자신감 있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상황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한신. 어쩌다 이 꼴이 되었나."
"이 꼴이라니. 무슨 소리요? 조금 전 당신 입으로 멀쩡해 보인다고 했으면서."
"말장난은 집어치워라. 그러게 내 말을 들었으면 좋지 않았나. 우리는 제법 친한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지. 의형제가 될 수도 있었겠지."
목표는 한신의 파칭코 사업을 인수하는 것.
천치메이는 짐짓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직도 늦지 않았어. 여전히 우리 관계는 회복의 여지가 있다."
"어떻게 말이요?"
"우리는 멸만흥한의 기치 아래 모인 사람들이다. 모두 혁명의 꿈을 꾸는 사내들이지. 너는 지금 그 대열에서 잠시 엇나갔지만, 다시 합류만 하면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 말은 당신에게 파칭코 사업을 넘기라는 거겠군."
천치메이는 씨익 웃었다.
다잡은 먹이를 두고 흥정을 벌이는 일은 그가 가장 애정하는 유희다.
"내가 아니라 혁명에 넘기는 것이지. 소소한 개인의 욕심 따위는 접어두고 진정 중국을 위해 충성하는 길을 택하라는 거다. 도박으로 긁어모은 부도덕한 돈을 혁명에 쏟아부어 고귀한 돈으로 승화시키라는 거야."
"그리고 그 돈의 관리는 당신이 하고?"
"그래."
천치메이는 한신의 태평한 기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능멸해서 밴질밴질한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가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사업을 넘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네 목이 날아가겠지."
"사업을 넘기면 안 날아가고?"
"이제 좀 알아듣는구나."
"보장은?"
천치메이는 코웃음 쳤다.
"보장 같은 건 없다. 확실한 건 이거야. 사업을 넘기지 않겠다면 이 자리에서 너는 죽는다. 반면 넘긴다고 하면 네가 믿든 믿지 않든 나는 널 놓아줄 거다. 물론 일본에는 더 있을 수 없겠지. 육사 졸업은 포기하고 본국으로 귀환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죽는 것보다야 낫잖나."
당연하지만 살려줄 생각은 없다.
후환의 싹을 남겨두는 건 천치메이의 방식이 아니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이미 놈이 꽤 많이 컸다는 것.
입헌파 량치차오와는 언제 접촉하였는지 항상 그의 신문에 한신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청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일본 유학 중인 유망한 사관생도가 실종된다면 제법 큰 뉴스거리가 될 터.
어쩌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천치메이는 그러므로 더욱더 여기서 한신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이 늦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다.
천치메이는 강한 어투로 한신을 재촉했다.
"선택해라. 어쩔 거냐?"
"외통수군."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목숨을 담보로 한 흥정은 언제나 같은 귀결로 흐른다.
"···좋소. 다만 조건이 있소."
"말해라."
"동업자가 있으니 그쪽은 건드리지 마시오."
한신이 말하는 동업자는 천치메이도 물론 알고 있었다.
기타 잇키. 눈엣가시 같은 자.
중국 동맹회의 근본은 물론 쑨원이었으나 워낙 다양한 혁명 세력을 한데 모으다 보니 쑨원의 혁명방식에 불만을 품은 자들도 심심찮게 있었다.
기타 잇키가 바로 그 대표주자였다.
한족도 아닌 주제에 중국의 운명을 놓고 사사건건 참견질하는 시건방진 놈이 기타였다.
하지만 기타 잇키를 건드리는 건 한신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놈은 이미 경찰의 주요 감시 대상에 올라가 있으며 일본의 정·재계에 영향력 있는 인사였다.
일본 땅에서 일본인을 습격하기의 어려움은 둘째였으니.
놈이 중국 땅을 밟지 않는 이상 지금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좋다. 거래 성립이다."
"그럼 이제 뭐요. 악수라도 하나?"
"그 전에 네가 해줄 일이 하나 더 있다."
"또?"
"사업을 넘기기 전에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놓고 가야 하지 않겠나?"
마침 부하 한놈이 창고에 뛰어 들어와 귓속말했다.
"배가 들어왔습니다."
천치메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신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너는 오늘 재수가 없어 붙잡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네가 도쿄항에 올 거란걸 알고 있었다."
"···."
"새 파칭코장을 개점한다면서? 그리고 오늘 영국상인에게 기계를 넘겨받기로 했고."
"어떻게 알았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네가 기계를 인수해주어야 한다는 거다. 말하자면 마지막 행사인 셈이지. 그 일만 해결하면 이후로는 푹 쉴 수 있다."
한신의 눈에 반항하는 빛이 보인 듯 하였으나 천치메이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수는 없다. 놈은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나는 천치메이의 부하들에게 포위당한 채 항만으로 끌려갔다.
주변은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도쿄항에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상선은 밀매에 특화된 것처럼 작고 날쌔 보였다.
도착하자 상선에서 방립을 쓴 선원이 튀어나와 외쳤다. 영어였다.
나는 선원과 한동안 영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야기를 마치고는 천치메이에게 말했다.
"올라가서 물건을 확인해보라는군."
"그래."
천치메이를 포함해 몇명의 야쿠자들이 배에 올라탔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져 밀매 현장에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좁은 갑판을 걸으며 천치메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모르게 조잘거리게 되었다.
"아까 했던 말 진심이요?"
"뭐 말이냐."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말."
"그게 지금 중요한가?"
"아니. 중요하지 않지."
창고에 도착하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숙여 갑판 밑에 있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들어갈 생각 없이 열기만 한 채 갑판 위에 그대로 섰다.
"뭐하나? 안 들어가고."
"들어갈 필요가 없소."
"왜?"
"물건이 알아서 나올 테니까."
"파칭코 기계가 알아서 나온다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내 말은 곧 실현되었다.
갑판 밑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손에 도끼며 낫, 대도 등을 들고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댔다.
천치메이 일행의 뒤쪽에는 선원들이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영어를 쓰던 선원이 방립을 벗자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영국인이 아닌 황인의 얼굴이었다.
천치메이는 말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들은 누구냐?"
"누구겠소. 당신의 머리로 생각해보시오."
"홍콩의 삼합회 놈들이구나···."
"과연 잘난 머리요. 이제 그만 가시오."
나는 26년식 리볼버를 꺼냈다.
천치메이가 무어라 외칠 것처럼 크게 입을 벌렸다.
망설이지 않고 쏘았다.
"습겨어어어억!!!"
탕!
"끄악!"
새된 비명이 어두운 밤공기를 찢고 크게 울렸다.
천치메이는 비틀거리며 옆에 서있던 야쿠자들을 고기방패로 내세웠다.
내 총격이 신호가 되어 삼합회의 사내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했다.
달밤에 선상에서 흉악한 집단난투가 벌어졌다.
사람과 사람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와중에 나는 오직 천치메이만을 노렸다.
탕! 탕! 탕! 탕!
다가가면서 계속 쏘았다.
분명 맞추긴 맞추는데 천치메이의 거동이 느려지지 않았다.
아씨. 총이 왜이리 약해?
천치메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난간 쪽으로 기대고 섰다.
가슴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깜깜한 가운데 뱀눈처럼 치켜뜬 눈동자가 번뜩였다.
놈이 난간을 넘었다.
풍덩!
재빨리 달려 물길을 내려다보았다.
헤엄쳐가는 모습이 보였다.
항만이 소란스러웠다. 거센 소요가 일고 있었다.
이상을 알아차린 공문회의 야쿠자들이 일본도를 곧추세운 채 상선 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또한 천치메이를 발견한 몇명은 헤엄쳐 그를 구출하고 있었다.
"자! 가자!"
갑판 위를 정리한 삼합회의 두징쯔가 전의를 불태웠다.
상선의 입구쪽에 야쿠자들이 득실거렸다.
두징쯔가 고함을 지르며 항만으로 뛰어내렸다.
나도 그 뒤를 따라 항쟁에 합류했다.
비호를 받으면서 비실비실 도망가는 천치메이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밤은 길다.
아직 오늘 흘러야 할 피가 다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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