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의 맹세
이건 전쟁이라 생각했다.
무장한 병력과 병력이 맞붙어 우열을 가리는. 규모의 전쟁.
하지만 달빛이 내리쬐는 도쿄항에서 벌어지는 항쟁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무언가였다.
등불도 없는 항만에 검은 색깔의 피가 흩뿌려졌다.
여기저기서 살점이 비산했다.
갖가지 언어로 쏟아지는 악다구니에 정신이 오염되는 것 같았다.
일본도를 사용하는 공문회 패거리.
도끼와 대도를 휘두르는 삼합회.
수는 엇비슷했다. 그만큼 난투도 격렬하였다.
그때 항만의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나타난 자들은 뒤에서부터 공문회를 습격하였다.
기타 잇키가 고용한 용역들이었다.
"우리편이 왔다! 승기를 잡았으니 다 작살내라!"
두징쯔의 말에 삼합회의 인물들이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질렀다.
공문회의 야쿠자들이 당황한 듯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싸움은 두징쯔에게 맡기고 대도를 든 채 천치메이를 쫓았다.
아직 자동차도 뭣도 없는 시기.
총까지 맞은 상태로는 뛰어서 도망쳐 봤자 멀리 가지 못한다.
나는 천치메이가 사라진 쪽을 쫓다 골목에 들어섰다.
그 어두운 골목의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장제스였다.
"여기서 뭐 하냐?"
"···."
장제스는 대답 없이 골목의 외길을 버티고 서있었다.
"천치메이 봤어?"
"응."
"그리로 지나갔어?"
"응."
"비켜."
"···."
장제스는 또다시 대답을 않고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아, 시바. 이게 뭐야. 뭐 하는 거야. 여기서 천치메이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알아?"
"천 형은 일본을 뜰 거야. 이제 신주쿠를 비롯한 도쿄 일대의 도박가는 너한테 넘어가겠지. 네가 이겼으니 천 형의 목숨은 살려줘라. 날 봐서라도."
장제스는 항상 영웅이니 의리니 하는 것들을 좋아했었지.
단순한 젊은 날의 치기는 아니다. 장제스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팍을 더듬었다.
품 안에 재장전한 리볼버가 있다.
여기서 장제스를 쏴버리고 천치메이를 잡으러 가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정을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을 내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골목의 끝에 장제스가 나타난 순간부터 내게 선택지란 없었던 게 아닐까.
나는 총을 겨누는 대신 입을 열었다.
"우린 계속 친구냐?"
"응."
장제스는 대답했지만 나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은 그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서로가 어떤 모습일지는 추측의 영역이었다.
말없이 뒤돌아 골목을 떠났다.
도쿄항의 난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단발적인 비명이 간간이 흘러나올 뿐 삼합회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
항쟁의 끝이었다.
***
공문회의 수입원이던 도박장을 삼합회가 인수하였다.
나는 도쿄 지부의 관리자가 되었다.
파칭코장 「가능성」의 성업은 대단하여 3호점을 넘어 도쿄가 아닌 다른 도시에도 가게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다는 게 뭔지 실감이 났다.
천치메이가 사라진 동맹회의 도쿄 본부는 기타 잇키의 손에 들어갔다.
여전히 해외 순방 중인 쑨원이 부재한 덕이지만 기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피와 폭력이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육군사관학교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주로 김경천과 함께 다녔다.
기병과인 김경천은 특히 내가 조선인이라는 걸 알고는 매우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신, 전장에서 응급 지도는 꼭 신속 측정으로만 그려야 되나?"
"아니. 상황만 받쳐준다면 행군 중 노상 측정으로 그려도 되고 따로 정찰병을 운용하여도 된다."
"기병과에서는 힘들겠군."
"방안지(方眼紙)를 활용하면 오히려 마상에서 그리는 게 더 쉬울걸."
"오, 그러냐? 고맙다. 도움이 됐어."
공부할 때마다 이것저것 물어왔는데 단순 궁금증 해결이라기보다는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김경천은 서글서글하며 밝은 친구였기 때문에 멀리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런 김경천도 둘만 있을 때면 크게 한숨을 내뱉곤 했으니.
"조국의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하고 급하다."
"대한제국?"
"그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각오로 육사에서 수학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 이 생활을 이어 나가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
"이곳에서 착실하게 배워야 나중에 써먹지."
"맞아. 그 이유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적국에서 수모를 참고 있겠나?"
가끔은 내게도 권유해왔다.
"넌 중국인으로 살 건가?"
"글쎄."
"너를 안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네 가슴 한편에 언제나 조선이 자리 잡은 것을 안다. 어때? 육사를 졸업하면 나와 함께 일제의 침탈을 몰아내는 데 힘을 쏟는 것이."
"고민해 보지."
"이대로면 우리나라는 일제에 잡아먹히고 말 거야. 급하다. 나는 언제나 급해. 빨리 돌아가서 조국을 구하고 싶다."
근래 들어 김경천은 부쩍 안달했다.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저 말을 했을 때 이미 1910년의 여름이 다 가는 중이었으니.
그리고 운명의 날.
도쿄 아사히 신문 1면에 한일병합조서(韓日倂合條書)의 전문이 실렸다.
여러 면에 걸쳐 조선의 장래와 유용성에 관한 특집기사도 빽빽하였다.
걱정되어 찾은 김경천은 눈시울이 붉었다.
"괜찮냐?"
김경천은 질문에 대답 대신 다른 얘기를 했다.
"갈 데가 있어. 너도 가자."
"어딘데?"
"가보면 알아."
김경천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아오야마 묘지였다.
한국인에게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묻힌 곳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묘지는 조용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흘렀다.
김경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리가 먼저 왔다. 기다리자."
나는 짐작 가는 것이 있어 더 묻지 않았다.
과연 잠시 후 입구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보통의 일본 청년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모두 조선인이었다.
"형!"
맨 앞의 청년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뛰어와 김경천과 부둥켜안았다.
꺼이꺼이 통곡하며 눈물을 흩뿌렸다.
그때까지 참던 김경천도 터졌는지 같이 눈물을 흘렸다.
망국의 슬픔이 묘지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껴안고 있다가 겨우 진정이 되었다.
함께 온 강인한 인상의 청년이 날 보고 말했다.
"김 형. 이 사람은 누구요?"
"내 친구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잠깐만, 설마 일본인인가?"
"아니. 그도 조선인이다."
"그럴 리가.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은 모두 알고 있는데."
청년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날 노려보았다.
"김 형. 믿을 수 없는 자를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요."
"그의 이름은 한신이다. 믿을 수 있는 친구야.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조선인이시니 이 친구도 조선인이나 다름없다."
"청나라에서 왔다고?"
더 눈총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아 나는 입을 열었다.
"말했듯이 한신이다. 당신들만큼이나 일제를 미워하니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든 새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내 소개를 했으니 당신들 소개를 듣고 싶은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처음에 김경천과 얼싸안았던 청년이 말했다.
"나는 지대형(池大亨)이오.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유학하고 있소."
본명 지대형. 훗날 지청천(池靑天)으로 불리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
지청천의 정체를 알자 다른 청년들도 알아볼 것 같았다.
과연 하나둘씩 밝혀지는 성명이 익숙하였다.
이응준(李應俊), 신태영(申泰永), 조철호(趙喆鎬) 등 죄다 아는 이름들.
내게 시비를 걸던 청년은 나중에 일본 육군중장 자리까지 오르는 홍사익(洪思翊)이었다.
역시 친일파 아니랄까 봐.
찔리는 게 있으니 남을 쉽게 의심하는 거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듯 지청천이 크게 발을 굴렀다.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이대로는 참을 수 없다. 한일병합이라니. 대명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이냐? 이 울분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당장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 반란을 일으키자!"
지청천의 발언에 홍사익이 심드렁한 투로 꼬장을 놓았다.
"일제의 심장부에서 고작 이 인원으로? 그건 반란이 아니라 자살이야."
"자살이라도 좋다! 일제가 아닌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다!"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아. 하지만 난 사절이야."
"뭐? 네가 그러고도 대한제국의 군인이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대한제국의 군대는 이미 3년 전에 해산당했다. 지금 우리는 일본제국의 군인이야."
"이 개자식이!"
지청천이 홍사익의 멱살을 잡았다.
다른 청년들이 말려 겨우 떼어냈다.
광경을 지켜보던 김경천이 입을 열었다.
"홍사익. 어제부로 우리는 모두 식민지인(植民地人)으로 전락하였다. 같은 처지에 놓인 동지에게 그저 꼽을 주고 싶었던 건 아닐 테고. 네가 생각하는 방안을 말해봐라."
가장 나이가 많은 김경천이 은연중에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홍사익도 김경천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량으로는 뭘 해보기도 전에 바로 사살당할 거요. 우리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투쟁 끝에 독립을 성공한 나라가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독립을 도모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을 기르는 것이요."
"비겁한 새끼! 죽음이 두렵냐? 이미 조국이 적의 손에 떨어졌는데 그 역량이란 걸 어느 세월에 키운단 말이냐!"
지청천이 또다시 홍사익을 공격하려 하였다.
겨우 제지한 김경천이 다시 말했다.
"지대형과 홍사익의 의견은 알았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생각하는 방안을 말해보자."
여러 의견이 나왔다.
항의의 표시로 전원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의견.
그 정도로 항의가 되겠느냐며 일본 천황이 있는 황궁 앞에서 다 함께 할복자살하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대체적인 여론은 참고 기다리자는 쪽이었다.
"으으.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조국이 병합당한 이 하늘 밑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고!"
지청천이 강하게 불만을 표시하였으나 다른 청년들은 미온적. 달리 말하면 현실적이었다.
김경천이 내 쪽을 보았다.
"한신. 네 생각은 어떠냐? 무슨 말을 해줄지 기대하고 있다."
나는 묵묵히 말했다.
"홍사익의 말이 맞다. 우린 역량이 모자라. 실력을 키워야 해."
내가 홍사익의 편을 들 줄은 몰랐는지 김경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청천도 매서운 눈빛을 날렸다. 홍사익은 얼떨떨해 보였다.
"실력을 양성하자고? 진심이냐?"
"두차례에 걸친 전쟁에 승리하면서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다. 동아병부(東亞病夫)의 청나라는 이미 맛이 간 지 오래고, 러시아는 집안 대들보가 무너지지 않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지. 일본은 이미 세계열강인 영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상태. 외교적인 시도도 먹히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내 말을 들은 김경천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청천이 재촉했다.
"형! 뭘 생각해! 나는 이미 두 번 죽음을 각오했었어. 저 을사년에 보호조약을 맺었을 때와 정미년에 군대가 강제해산 당했을 때지. 더는 못 참아. 나는 싸우다 죽겠어."
"참아라."
"형!"
"두 번 참았으니 한 번 더 참아 세 번을 채워라."
김경천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말했다.
쉬이 볼 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에 지청천도 입을 닫았다.
김경천은 어디서 났는지 술병을 꺼내 뚜껑을 땄다.
그러더니 군용단검으로 새끼손가락을 따서 병 속에 피를 흘려 넣었다.
"여기서 맹세한다. 훗날 조선이 떨쳐 일어나는 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일본군을 탈출하여 무기를 들고 다시 모이자.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일본군의 장교로 암약하며 놈들의 군사기밀을 빼 오자. 놈들의 지식과 정보로 무장하면서 언제고 올 그날을 기다리며 비분강개(悲憤慷慨)를 감내하자."
김경천이 내게 술병을 내밀었다.
나도 새끼손가락을 그어 핏방울을 떨구고 옆 사람에게 전했다.
침묵 속에 술병이 돌았다.
망설이던 지청천도 술병에 피를 섞었다.
망설이던 홍사익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행동은 같았으나 그 속마음은 딴판일지 모른다는 것이 애석하였다.
술병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김경천에게 쥐어졌다.
김경천은 망설임 없이 술병을 마시고 내게 건넸다.
나는 병의 입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액체의 색깔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안에 떠다니는 핏빛 애환이 느껴졌다.
이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날은 올 것이다. 분명.
술병이 돌아, 자리한 모두가 한 모금씩 머금었다.
1910년 8월 30일.
아오야마 묘지의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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