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사관생도
경술년이 다 가고 육사에 24기가 들어왔다.
연병장에 집합하는 신입생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동기들.
입은 근엄한 무표정인데 눈가에는 실실거리는 웃음기가 보였다.
"새끼들, 저거 군기 빠진 거 봐라. 걷는 거 봐."
"이야. 저건 딱 너 맨 처음 입학했을 때 걸음걸이인데?"
"지랄. 내가 언제 저렇게 걸었냐."
나는 모범 학생으로 추천받아 24기 신입생도들과 함께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무다구치 렌야가 수행했던 것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미래의 일본 장교 후보생들을 특별히 사근사근대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다구치처럼 오바할 마음도 없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생각한 대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24기 1중대 1구대에 배정받은 나는 먼저 구대장을 대면했다.
육사의 구대장은 전통적으로 몇기수 선배가 부임하였는데 특히 근무실적이 좋은 중위 중에서 선발하였다.
이번에 오는 구대장은 17기의 선배였다.
문을 열고 신임 구대장이 나타났다.
비쩍 마른 몸에 신경질적인 인상.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중위다."
목소리가 마치 쇠를 긁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멍하니 도조를 바라보다 조금 늦게 대답했다.
"23기 생도 한신입니다."
"5초 걸렸군."
"예?"
"상관이 먼저 신분을 밝혔는데 대답하는 데 5초가 걸렸어. 이게 맞나?"
어느새 회중시계를 꺼내든 도조 히데키였다.
나, 지금 갈굼당하고 있는 건가?
이 느낌 오랜만이다.
"아닙니다."
"네가 모범 학생이건 뭐건 상관치 않는다. 내게는 교육 중인 사관생도 일인일 뿐이야."
"예."
"지나인인가?"
"예."
도조는 아무 말 안 하고 그저 나를 쏘아봤을 뿐인데 눈빛에 혐오감이 가득하였다.
단순한 사람의 시선에 그와 같은 미움과 경멸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밟아죽일 바퀴벌레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내가 졸업하고 몇 년 새에 육사가 왜 이리 되었는지."
"···."
"지나인에게 모범 학생 자리를 주다니. 부임하기 전에 혹시 모범 학생으로 D가 올까 봐 걱정하였는데 이건 더한 막장이로군."
아씨. 때려치우고 싶네.
도쿄의 암흑가에서 부하들이 떠받들어주는데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사소한 갈굼인데 뭔가 예전처럼 참기가 힘들었다.
아니면 상대가 도조라서 그런지도.
"지나인이 신입생도의 생활지도는 제대로 할 수 있나?"
"육군사관학교의 내규에 따르면 모범 학생에게 생활지도의 의무는 없습니다. 그저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신입생도들과 함께 내무반을 쓰며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생활하면 될 뿐입니다."
"내가 있을 때랑은 다른데."
"그렇습니까. 그새 내규가 수정되었나 봅니다."
도조는 탐탁잖은 얼굴로 있다가 벌레를 씹듯 말했다.
"너는 좀 있다 들어와라. 점호를 할 거니까."
"예."
24기 1중대 1구대의 내무반 앞.
한참을 기다렸으나 점호가 끝나지 않았다.
구대장이면 교련 때나 열심히 지도할 것이지 점호 때까지 신입을 들볶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내무반 안쪽에서 고성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들어와."
마침내 도조가 날 불러들였다.
한겨울인데도 내무반 안쪽에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전해져왔다.
신입생도들의 꼴은 무다구치때와는 전혀 달랐다.
겉으로 피가 나거나 멍이 든 생도는 없었지만, 그 분위기가 아주 기괴했다.
내가 들어왔는데도 눈동자 하나 굴리는 생도가 없었다.
다들 뻣뻣한 차려 자세로 형형한 눈빛을 뿌리며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헌데 그렇다고 군기가 잘 들어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대신 신입생도들이 무언가를 강하게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생도들이 있었으니.
나는 묻지 않고도 그들의 출신학교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관들에게 소개할 생도가 있다. 한신 생도, 앞으로."
"23기 한신이다. 앞으로 너희들과 함께 내무반을 쓸 거다.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보고."
내가 간단히 소개 인사를 마치자 도조 히데키가 언짢은 듯 다시 말했다.
"한신 생도는 모범 학생으로 같이 지내며 앞으로 귀관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한다.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랑스러운 육군사관학교의 신입생도로서 타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생활해야 한다. 알겠나!"
"예!!!"
"좋아. 오늘 육군사관학교에서의 첫날밤을 잊지 말아라."
도조가 나가고 나와 24기 생도들만이 남았다.
"자자. 불 끄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신입생도들이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없는 생도들을 대신하여 내가 불을 껐다. 곧장 침대에 누웠다.
"다 누워. 내일 다섯 시 기상이니까."
그제야 주섬주섬 침구류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식들아. 행운인 줄 알아. 나 같은 천사는 없다고.
신입생도들에게는 흔치 않을 평화로운 밤이었다.
***
도조 히데키가 굴리는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지독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이 오직 말로만 쪼았는데 그 쪼기가 딱따구리처럼 매몰찼다.
아픈 곳을 자비 없이 후벼파며 생도를 복종시켰다.
"너희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덕이다! 그 은덕에 보답하는 방식이 고작 이거란 말이냐! 다시!"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께서 통솔해 주시었다! 저 옛날 진무 천황께서 몸소 오토모와 모노노베의 병사를 이끌고 중앙에 있는 나라 가운데 아직 복종하지 않은 곳을 평정하신 후, 옥좌에 즉위하시어 천하를 다스리신 지 25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세상의 모습이 바뀜에 따라 병제의 연혁도 여러 번 바뀌었다···!"
도조가 있는 곳은 멀리서부터 알 수 있었다.
어디서나 집요하게 군인칙유의 복창을 요구하는 그였다.
"너희들은 군인이다! 군인칙유는 헌법이다! 두 번 틀렸으니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복창해라!"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께서 통솔해 주시었다···!"
내가 첫날 보았던 회중시계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써먹었다.
"틀렸어! 3초 늦었어! 언제든 사태가 발생하면 곧장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지로 향해야 하는 것이 군인이다! 어찌 지금과 같은 평시에도 집합에 시간이 이리 걸린단 말이냐! 다시 원위치!"
헐레벌떡 생도들이 뛰어갔다 오면.
"1초 늦다! 전장에서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시간이야! 너희의 목숨은 너희들 것이 아니다! 천황폐하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원위치!"
초 단위로 생도들을 압박하며 미칠듯한 뺑뺑이가 돌아가곤 했다.
확실히 도조 히데키는 남다른 인간이었다.
무다구치와 같은 자가 똥군기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밌으니까.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즐거우니까.
하지만 도조는 달랐다.
그는 진심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적부터 다년간 함양한 군인정신이 제2의 천성이 되어 그의 뇌를 단단히 지배하고 있었다.
군인칙유에 광적으로 집착하며 정신교육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그였다.
그런 도조 히데키도 남들과 비슷한 점이 있었으니.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아닌 자들에 대한 강한 우월의식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
1중대 2구대의 구대장이 낑낑거렸다.
나무 밥통의 뚜껑이 안 열리는 모양이었다.
언뜻 보아도 뚜껑이 움푹 파여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밥통 안에 쑤셔 넣은 모습이었다.
신경 쓰지 않고 밥이나 먹으려 했으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자꾸 눈이 돌아갔다.
안간힘을 쓰며 뚜껑을 열려고 하는 2구대장을 식당의 생도들이 비웃고 있었다.
참다못한 2구대장이 소리쳤다.
"누가 웃어!"
웃음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빙글거리는 생도들이었다.
도조는 바로 옆에서 식사 중이었으나 못 본 척 자신의 식사에만 열중했다.
2구대장이 다시 외쳤다.
"이 밥통 뚜껑을 짓눌러 열지 못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조용한 가운데 누군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밥통을 부수면 되지. 그걸 못하나."
속삭임을 들은 2구대장이 식탁 위로 성큼 올라섰다.
"방금 말한 사람 누구야! 어떤 자식이야!"
식탁 위를 걸으며 한 사람씩 취조했다.
"너야? 네가 말했어? 너 입에 웃음기 안 빼?"
분명 군 계급상 이곳의 최고 상관은 구대장.
식당에 있는 누구보다 계급이 높다.
하지만 일본식 상명하복 정신에 일반 구제중 출신의 구대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훗날 일본육군을 좀먹을 파벌이 이미 육사에서부터 자라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수백의 생도들이 1명의 구대장을 따돌리는 것과 같은 광경.
참다못한 2구대장이 낄낄대는 한명을 군홧발로 걷어찼다.
의자에서 떨어진 생도를 마구 발로 밟았다.
아주 기이한 광경이었다.
화가 난 구대장은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생도를 폭행하고.
맞는 생도는 몸을 웅크린 채 처맞으면서도 웃고.
또 그 광경을 수백명의 생도들이 빙글거리며 관람하고 있었다.
우웩.
토할 듯 메스꺼운 느낌이 올라왔다.
그때 도조 히데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조가 2구대장을 잡았다.
"어이, 타카하시. 그쯤 해둬."
"닥쳐. 이놈이 날 모욕했다고."
"뭐 어떻게 모욕했다는 거야?"
"날 비웃었어."
도조는 쓰러진 생도에게 몸을 굽혀 직접 일으켜 세웠다.
"이름이 뭐지?"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입니다."
"왜 웃었는가?"
"재밌어서 웃었습니다."
아마카스 생도의 말을 들은 2구대장은 화가 솟구쳤는지 또 군홧발을 들어 올렸으나 도조가 제지했다.
항의하려던 2구대장이 멈칫했다.
도조가 킬킬대고 있었다.
"자네, 왜 웃나?"
"옛날 생각이 나서."
"뭐?"
"나도 과거에 이런 적이 있었거든."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도조는 2구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마카스의 옷매무새를 단정히 잡아주었다.
처음 보는 인자한 미소가 만면에 가득하였다.
"몇 년 만에 육군사관학교에 돌아오고 보니 바뀐 게 너무 많아 적응이 어려웠었지. 그런데 오늘 자네를 보니 내 육사시절이 생각나는군. 나도 똑같이 밥통 뚜껑을 주걱으로 후려갈겨서 열리지 않게 했었는데···."
"뭐? 도조,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시에도 구제중 출신의 D 구대장이 식당을 헤집으며 소란을 피웠었지. 그놈이 날 잡고 사정없이 팼어. 그래도 나는 웃음이 나왔었다. 아마카스 생도. 자네라면 왜 그런지 알겠지?"
2구대장이 옆에서 떠들든 말든 도조와 아마카스의 대화가 이어졌다.
"예. 알 것 같습니다."
"그래. 너는 잘못한 게 없다. 가서 쉬어라."
"예."
아마카스가 식당을 떠나자 2구대장이 도조 히데키를 노려보았다.
"이럴 건가? 나도 자네와 같은 행동 지도의 권한이 있어!"
아마카스 생도에게 향할 때는 한없이 부드럽던 도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타카하시. 적당히 해라."
"뭐야?"
"내가 그간 네놈에게 맞춰줬다고 진심으로 너와 내가 동급이라고 믿기라도 했단 말이냐? 기억해라. 너와 나는 태생적으로 신분이 달라. 내가 육군 장성 자리에 오를 때 너는 이 구대장 자리가 마지막으로 얻는 요직일 거다."
"이, 이 새끼가!"
2구대장이 주먹을 쥐었으나 일반 생도를 패는 것처럼 같은 구대장을 폭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여전한 비웃음을 받으며 식사를 위해 조용히 밥통을 깨뜨리는 수밖에는.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나는 다짐했다.
얼른 탈출하자고.
이 사방이 적인 꽉 막히고 답답한 상황을 가능한 한 빨리 탈피하자고.
이제 클만큼 컸다.
자금도 빵빵하고 명성도 얻었다.
중원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횡행해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강하게 울렸다.
마침내 1911년의 5월 27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의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파칭코 사업을 위해 기타 잇키와 두징쯔를 일본에 남겨둔 채 중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바야흐로 신해년의 혁명이 폭발 조짐을 보이며 대륙이 들끓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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