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08)

황금의 폭탄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질펀하게 늦잠을 잘 생각이었는데 생각처럼은 되지 않는다.

 기상나팔이 없는 평온한 아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모두 벌써 나간 모양.

 새로 쌓아 올린 영국식 벽돌집이 아주 아늑하였다.

 탁자엔 밥과 김치, 뭇국과 나물 반찬이 소박하게 올려져 있었다.

 어머니의 집밥이었다.

 느긋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다.

 홍콩의 거리는 확연히 근대화된 도시의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댕이 묻은 노동자들이 어딜 가나 바글거렸고 하늘에는 매연이 가득했다.

 나는 곧장 홍콩섬의 센트럴가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에 비하여 확연히 현대적인 빌딩이 눈에 띄었다.

 홍콩상하이은행(The Hongkong and Shanghai Banking Corporation).

 줄여서 HSBC로 불리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은행이다.

 중국인들은 회풍은행(雅豊銀行)이라고 불렀다.

 회풍은행의 악명은 대단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회풍은행은 믿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용도를 자랑했다.

 물론 좋게 말해서 신용이지 나쁘게 말하면 돈세탁을 도울 뿐이다.

 대영제국의 위명을 등에 업고 오로지 악마적인 수준의 이익만을 탐하는 기업이 HSBC였다.

 은행에 들어가려 하니 경비가 제지했다.

 경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골목에 회풍은행을 이용하는 중국인 전용의 매판(買辦)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놈의 인종차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별수 없이 매판 골목으로 향했다. 중개상을 통하면 분명 수수료를 떼먹으려 들 텐데.

 중년의 중국인 직원이 물었다.

 "뭐 도와드릴까?"

 "예금을 하고 싶은데요."

 "계좌는 있소?"

 "없지요."

 "이 종이를 작성해주시오."

 직원이 누렇게 빛바랜 종이를 내밀었다.

 일반적인 예금계좌 개설을 위한 것이었다. 내게는 맞지 않았다.

 "이런 거 말고 한 번에 좀 많이 맡기려 합니다. 영국인 직원하고 직접 말하고 싶은데요."

 "뭐 얼마나 많이 맡기려고? 중국인 거래는 내가 도맡아 하오. 내게 말하시오."

 "액수를 말하기 전에, 이자는 얼마나 가능합니까?"

 "은화 1000냥 이상의 저금은 3리(釐)가 기준이오. 그것도 꾸준히 정기적으로 예금할 때에 한하오."

 3리?

 고작 0.3퍼센트?

 자본금이 있어도 돈놀이 할 곳이 마땅찮은 이 시대의 금리다웠다.

 "10만냥 이상은 어떻습니까?"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도 훠이훠이 내저었다.

 "일 안 볼 거면 가시오. 농지거리 하지 말고."

 나는 품에서 금괴를 꺼내 턱 올려놓았다.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진짜 금이요?"

 "예."

 "일본제국의 금괴로군! 보는 건 처음이야. 이거 어디서 났소?"

 "어디서 났는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그래서 이자는 얼마나 가능한지요."

 직원이 황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8리까지 쳐줄 수 있소."

 "회풍은행에서 최근 금 매입에 열을 올린다고 들었는데, 프리미엄이 고작 그거밖에 안 됩니까?"

 "···상부와 이야기를 잘 해보면 9리까지도 가능할 거요."

 "그렇군요. 그럼 부탁합니다."

 직원이 옳다구나 냉큼 금괴에 손을 뻗는데 탁 쳐서 막았다.

 "왜, 왜 그러시오?"

 "상부와 이야기를 부탁한다는 겁니다. 거래는 직접하고 싶습니다."

 "알겠소···."

 세계의 경제시장은 금본위제도로 돌아가고 있다.

 금과 화폐의 가치를 등가관계로 유지하는 금본위제는 국가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기에 적합했으나 그 단점도 명확했다.

 마구 찍어낼 수 있는 화폐와, 공급이 한정되어있는 금을 같은 가치체계에 포함하는 순간부터 문제는 예고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분명 법적으로 화폐와 금의 가치는 동일한데 취급은 동일하게 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를 펼 수 있는 근본은 국가의 금 보유량에서 나온다.

 그 화폐와 금의 비율이 무너지는 순간 국가의 화폐 체계는 더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열강들이 경제 정책에 있어 최우선으로 신경 쓰는 것이 금 보유량이었다.

 그리고 HSBC는 금값 가지고 장난질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금융회사.

 당연히 출처를 알 수 없는 금괴가 나타나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다.

 본사에서도 날 그냥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인 직원이 안쪽으로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복을 빼입은 영국인 직원이 건물 안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빨랐다.

 회풍은행의 내부는 지극히 현대적이었다.

 디자인이며 건물의 재질이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웠다.

 영국인 직원이 또다시 손을 까딱거리며 앉으라고 지시했다.

 고객 대하는 태도가 슬슬 거슬린다.

 직원은 내가 소파에 앉은 다음에도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하여 나도 가만히 있는데 잠시 후 중국인 여직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나는 그가 통역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통역 필요 없습니다."

 영국 직원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손을 들어 여직원을 돌려보낸 영국 직원이 말했다.

 "영어를 하는군?"

 "홍콩 사람이니까."

 "아 그래? 중국인이 영어 하는 걸 처음 봐서 몰랐네."

 "그럴 리가. 홍콩인이면 영어는 다 하는데."

 "사실 중국인이랑 이야기해보는 게 처음이야. 근데 생각보다 똑똑한 거 같네."

 과연 혐성국아니랄까봐. 인성 보소.

 "금괴 꺼내 봐."

 영어긴 하지만 명령조의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금괴를 상에 올렸다.

 영국 직원이 흥미로운 눈으로 금괴를 살피다 말했다.

 "어디서 났어?"

 이거, 또 도둑놈 취급하네.

 파칭코로 번 거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분이 나쁘잖아.

 "네가 형사냐?"

 "뭐?"

 "은행원이면 은행원답게 고객 대우나 해라. 내가 여기서 자리 박차고 다른 은행에 가면 어쩌려고 그러냐."

 "···훗."

 직원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은행에 간다고? 여기 홍콩에서? 뭐 어딜 말하는 거야? 금륜전장(金輪錢莊)? 만환표호(萬環票號)? 중국인에게 이 금괴를 맡겼다가는 바로 도둑맞을걸. 전장 주인에게 말이야. 킬킬."

 "말하는 걸 보니 넌 정말 뭣도 없는 일반 행원이구나."

 "아니. 나는 책임자다."

 "못 믿겠지만 일단 조건이나 말해봐."

 직원이 우대조건을 제시했다.

 "어디서 훔쳤는지 말하면 이자율 1푼에 받아주마. 그게 아니라면 8리다."

 "아무리 봐도 네놈은 HSBC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째서?"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잖나. 대체 언제부터 HSBC가 돈에 똥이 묻어있는지 따졌지? 오히려 냄새나는 변소 청소 전문 아닌가?"

 "아하. 이제야 금괴의 출처를 슬슬 실토하는군. 보나 마나 검은돈일 줄 알았어."

 말다툼이 이어지는데 단정한 인상의 중년인이 칸막이를 젖히고 나타났다.

 직원이 벌떡 일어섰다.

 "점장님. 오셨습니까."

 "왜 이리 소란스럽나?"

 "예금 고객과 상담 중이었습니다."

 새로 나타난 점장의 시선이 금괴에 향했다.

 "저건 뭔가?"

 "고객이 예금하려는 금괴입니다."

 "이건···. 일본의 것이군."

 "예. 그래서 출처를 파악하느라 상담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출처를 파악한다고? 머저리 같은 놈."

 "예?"

 점장이 호통을 쳤다.

 "야, 이 병신 같은 자식아. 귀한 고객이 오셨으면 냉큼 VIP로 대우하지는 못할망정 무슨 실례를 저지른 게냐!"

 "아, 아니. 그게. 이자는 중국인이고···."

 "중국인이든 뭐든 우리 회사의 모토를 책임자급이나 되는 녀석이 모른단 말이냐?"

 "아니, 점장님. 제 설명을 좀."

 "닥치고 썩 꺼져!"

 직원을 쫒아낸 점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건 매우 익숙한 맛이다.

 자본주의의 그 맛이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부하직원을 내쫓은 것도 훌륭하다.

 보여주기식임을 알면서도 고객의 마음이 싹 풀리지 않는가.

 "저 녀석은 낙하산으로 본국에서 부임한 지, 채 한 달도 안된 녀석이랍니다. 아직 미숙한 점이 많으니 고객님이 잘 헤아려 주시지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고객님의 금괴는 일본제국이 공인한 것으로 최상품입니다. 보다 세밀한 측정은 이루어져야겠지만 최소 청 제국 은화로 12만냥은 나갈 겁니다. 바로 예치해주신다면 HSBC의 VIP 대우로 1푼 5리의 이자를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비로소 말이 통하는 자를 만났으니 슬슬 본론을 꺼냈다.

 "후하군요. 실은 제게 이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특약 조건을 붙였으면 하는데요."

 "말만 하시지요."

 "거치식(据置式)으로 하고 싶습니다."

 "거치식이라 함은···?"

 "말 그대로입니다. 예치 기간을 정하고 만료될 때 예금한 것과 같은 상당의 금괴로 돌려받았으면 합니다."

 처음으로 점장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금괴로 상환받길 원하신단 말씀입니까?"

 "예."

 "글쎄요. 그런 식으로 거래를 한 적은 없어 뭐라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겠군요."

 "거치금 규모가 제법 클 것이니 사정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다른 금괴가 또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또한 모든 예금은 금으로만 할 것이고?"

 "그렇습니다."

 점장이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무슨 계산기를 두드리는지 눈빛이 시시각각으로 바뀌었다.

 "원하시는 예금 규모와 예치 기간을 말씀해주시지요. 일단은 제가 홍콩의 지점장입니다만 그 규모에 따라 윗선과도 상의를 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같은 금괴가 스물 세 개 더 있습니다. 기간은 3년 반을 원합니다."

 "스, 스물 세 개라니. 진심이십니까?"

 "예. 조건만 맞춰 주시면 오늘 내로 운반할 수 있습니다."

 점장의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건 상의할 필요도 없겠군요. 무조건 고입니다. VVIP 대우로 3푼의 이자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4푼이면 바로 계약서를 쓰지요."

 "···하. 알겠습니다."

 연락받은 삼합회의 조직원들이 나타나 금괴를 모두 운반하였다.

 나는 점장의 인사를 받으며 회풍은행을 나왔다.

 센트럴가 거리로 나와 올려다본 HSBC 빌딩은 높았다.

 하지만 충분히 오를만해 보였다.

 파칭코 사업을 통해 지난 몇 년간 축적한 자금을 저 은행의 금고에 죄다 쏟아부었다.

 이자 따위를 챙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회풍은행의 금고에 금괴를 보관한 게 아니다.

 폭탄을 심은 거였다.

 3년 반의 예치 기간이 끝나면 유럽에는 대전쟁이 벌어진다.

 HSBC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의 사업가들이 자금을 출자한 이른바 합자 기업.

 하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열강의 사업가들은 각자의 사정에 바빠 투자금을 죄다 회수한다.

 나는 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군벌 시대 개막 이후 중국 외환시장의 독점권을 움켜쥐고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HSBC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HSBC의 주식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팔지 않았으니 암시장에 수십 배의 웃돈을 주고 겨우 1, 2주 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식으로 언제 지분을 늘리겠는가?

 나는 단번에 삼킬 생각이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은행의 투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각국은 화폐를 미친 듯이 찍어내고 자연스레 금본위제는 폐지된다.

 바로 한 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대, 금 보유량이 곧 은행의 존폐를 결정하는 시대.

 나는 HSBC의 금 보유량을 인질삼아 대주주를 노리는 것이었다.

 주머니는 텅 비었으나 가슴은 무거웠다.

 군벌 시대가 또 한 걸음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벅차오르는 동시에 묘한 흥분감이 날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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