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웃 전쟁
"일기통관입니다."
"오! 원더풀!"
"훌륭한 솜씨요."
극찬을 받으며 돈을 쓸어 담았다.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나오니 벌써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마작이 재밌긴 하다. 다 때려치우고 카지노나 운영하며 눌러앉을까?
그럴 수는 없지.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꿀잼은 이 시대의 대체 역사를 써 내려가는 거니까.
페리를 타고 섬을 건너 집에 도착하였다.
대문 밖에서부터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떠들 사람이라곤 여동생밖에 없는데 남자 여럿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단의 사람들이 날 보고 반색했다.
"드디어 한일걸(韓一傑) 한신 생도께서 오셨구려!"
"우와! 한신! 한신! 한신!"
"이리 앉으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뭐 이리 큰 탁자를 샀냐고 뭐라 했었는데.
죽을 때까지 꽉 찰 일이 있을까 싶던 탁자가 사람들로 가득하다.
상석에 앉으신 아버지께 먼저 인사드렸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네 친구분이 많이 오셨다. 앉아라."
내 친구라고? 죄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두리번거리는 중에 한 명. 아는 얼굴이 보였다.
꾸벅 인사했다.
"랴오 선생님. 강녕하셨습니까."
"으음. 4년 만인가."
"예. 덕분에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랴오중카이는 내가 가난했던 시절 사관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정중히 예를 차렸다.
랴오중카이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정체도 뻔했다.
대충 다 중국동맹회에서 나온 인물들이겠지.
"혹자는 자네를 발굴한 내 혜안을 칭찬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자네가 육사에서 이룬 성과는 오롯이 자네의 몫일세. 자네가 노력한 결과일세."
"아닙니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고마울 뿐일세. 하지만 조금 섭섭한 것도 있긴 하지."
나는 뜨끔했다.
랴오중카이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알 것 같았다.
"물론 고향에 오랜만에 돌아온 것이니 이것저것 바쁠 거란 건 아네. 하지만 어떻게 동맹회 지부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수가 있나?"
"아. 내일 딱 가려고 했는데 오늘 직접 집으로 찾아오셨군요.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그랬나? 내가 괜히 귀찮게 만든 것 같아 자네 아버님께 죄송스럽군."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저희 집이 원체 손님이 없으니 이렇게 많은 분이 찾아주신다면 복(福)이지요."
내가 동맹회의 홍콩 지부에 찾아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홍콩 지부가 누구의 입김 아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동맹회의 본부는 도쿄.
하지만 핵심 인물인 천치메이가 탈주한 이후 동맹회의 세력 중심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맹회는 쑨원의 명성 아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고 자연히 쑨원과 친분이 있는 자들에 의해 돌아갔다.
나와 손을 잡은 기타 잇키는 도쿄 본부를 장악하였으나 애초에 중국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집단에서 일본인인 기타의 영향력은 제한적 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동맹회는 천치메이의 상하이 지부와 랴오중카이의 홍콩 지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쑨원의 최측근인 천치메이와 그 지랄을 하고 난 이후. 당연하지만 내가 낄 자리는 없다.
문득 랴오중카이가 무언가 까다로운 말을 하려는 것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그래서. 사실인가?"
"예."
어렵게 꺼낸 말에 내가 바로 대답하자 랴오중카이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내가 뭘 물었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건가?"
"천치메이 과장과 분란이 있었는지 물으신 것 아닙니까?"
"맞네···."
"그래서 사실이라 대답한 겁니다."
상하이로 도망친 천치메이는 그곳에서 동맹회 지부를 장악하고 또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랴오중카이 역시 쑨원의 측근이고 천치메이와 사이가 긴밀하니 애초부터 숨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실은 동맹회 내에서 파벌 싸움은 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한데 모였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다만 멸만흥한의 대의 아래 함께 투쟁할 뿐일세."
"예."
"이미 천 과장 쪽에서는 화해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네. 그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도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대의가 있지 않은가. 해묵은 감정은 덮어두고 미래를 봐야지."
"예."
"지금의 동맹회는 그 어느 때보다 자네가 필요하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지휘관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자네가 요직을 맡아준다면 큰 힘이 될걸세."
"예."
이후로도 쭉 설교가 이어졌다.
별달리 할 말이 없어 계속 '예'로 때웠다.
랴오중카이 선생님의 훈화를 들으며 드는 생각은 참 세상을 아름답게 보시는 분이란 거였다.
머릿속에 꽃밭이 가득하다.
동맹회에 이런 사람만 가득하다면 기꺼이 뼈를 묻을 수 있을 텐데.
내가 대꾸는 않고 순순히 수긍만 하자 랴오중카이는 기뻐하며 술을 권했다. 그러다 자기가 먼저 취해버렸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술잔이 돌며 나는 정신없이 동맹회의 손님들을 접대했다.
그들이 하는 얘기는 천편일률처럼 똑같았다.
해외에서 쑨원이 청조에 대항하여 벌인 전설적인 행각.
청 정부의 삽질. 최근 불거지는 철도 국유화 문제.
얼른 들고일어나야 하는데 군대를 지휘할 지휘관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꼭 필요하다는 마무리까지.
적당히 응대해주다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골목에 나와 담뱃불을 붙였다.
홍콩에 돌아오고 나서 한 번도 안 피웠었는데.
골 아픈 일이 생기니 바로 땡기네 이거.
문득 대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도 한 대 주시오."
이것까지 따라 나오냐고 거참.
말없이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일본산이요?"
"예."
"좋군."
오늘 '예'만 몇 번 하는지 모르겠다.
"계속 말을 걸고 싶었는데 너무 슈퍼스타셔서 기회가 없었소."
"말이야 아무 때나 걸면 되지요."
"안쪽에선 할 수 없는 얘기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아서. 후후."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보니 콧수염과 능글능글한 웃음이 인상 깊었다.
"뭔 얘기를 하시려고?"
"오늘 쭉 보아하니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이시더군."
"뭐, 부인은 안 하지요."
"하지만 내 얘기는 다를 거요."
"글쎄요."
눈빛을 반짝이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 탁자에 앉아있는 치들이 할 줄 아는 말이라곤 멸만흥한밖에 없소. 저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백성의 안위가 아닌 만주족에 대한 증오요. 옥좌에 앉아있는 황제를 끌어다 참수하면 그걸로 족할 자들이란 말이오."
무슨 말을 할지 별 기대는 없었는데.
확실히 이자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 증오의 정점에는 회장이 앉아있지. 그리하여 누가 더 청조를 미워하는지 과시하며 충성경쟁을 하는 거라오. 아무것도 모르는 랴오중카이 같은 자도 있지만 내 감상은 그렇소. 저들은 눈 뜨고 잘 때까지 혁명을 떠들지만 정작 혁명이 일어난 이후의 상황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소."
"그럼 당신은 관심을 두고 있고?"
"그렇소. 또한 당신도 그럴 거라고 믿소."
"어떻게 아시는지?"
"량치차오와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소. 보통의 꽉 막힌 동맹회원이라면 입헌파와 상종할 리가 없지. 게다가 무엇보다 당신은···, 조선인이잖소."
하기야 내게 한족이 가진 것과 같은 뿌리 깊은 증오는 없다.
"좋습니다. 확실히 흥미가 가는군요. 본론을 말해보시지요."
"내게 있어 혁명은 수단에 불과하오. 목표는 신중국을 건설하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 회장의 방침은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잔혹하오. 만족은 이미 한족의 문화에 많이 동화되어 변발만 깎아놓으면 서로 구분할 수 없음인데 어찌 차별한단 말이오?"
"그야 그렇지요."
"만족이 300만이오. 그들을 배제할 수는 없소."
"본론은요?"
"회장을 바꾸고자 하오."
회장이면 쑨원인데. 동맹회 내부에서 감히 쑨원에 대항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자의 이름이···.
"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천중밍(陳炯明)이오."
천중밍의 말과 동시에 기억이 났다.
실제 역사에서 쑨원을 배신한 전력이 있는 자다.
벌써 10년 전부터 역심을 품고 있었구나.
"반란을 일으키려는 건 아니오. 서두를 생각도 없소. 다만 동맹회 내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평화적으로 회장을 교체하고자 하는거요."
"일단은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나는 천중밍의 기색을 살폈다.
확실히 그가 가는 방향은 나와 겹친다.
소수민족을 차별할 수는 없다.
"예."
"좋소. 추후에 연락하겠소."
천중밍과 대화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아우성이 쏟아졌다.
"우리의 영웅께서 어딜 갔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흡연자라서요."
"말씀을 하시지! 나도 같이 피웠을 텐데. 그나저나 이제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됩니까?"
"생각 중입니다."
"저 입헌파의 차이어가 20대의 나이로 윈난 육군의 협통령(여단장)이 되었다는데, 그걸 뛰어넘는 일본육사 최고의 중국 장교인 한신도 얼른 출세를 따라잡아야지요."
동맹회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 한다.
하지만 나는 이용당할 생각은 없었다.
"저는 큰 욕심은 없습니다. 그냥 어느 부대의 참모 자리 정도면 족합니다."
"엥? 왜 지휘관을 노리지 않고 참모를 지망한단 말이오. 출세하려면 자신의 부대를 이끄는 것이 좋소."
"충고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소박하게 시작할 생각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계십니까."
동맹회의 인물들이 쑥덕였다.
"누구 또 올 사람이 있나?"
"아니, 지부에서 올 사람은 다 왔어."
"이 늦은 시간에 또 누구지."
내가 맞이하러 나갔다.
날 보자 문밖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한신 생도, 아니지요. 이제 졸업하셨으니 미래의 한신 장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저는 차이어 장군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차이어 장군이요?"
"예. 장군께서 육사의 선배로서 꼭 한번 만나고 싶다 하셨습니다. 부임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바쁘신 탓에 직접 오시진 못했지만 언제 한번 날짜를 잡아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건 량치차오 선생님의 소개장이고 이건 차이어 장군의 서신입니다."
남자가 곱게 쌓인 두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받아서 편지를 확인하는데.
"차이어라고?"
"량치차오?"
어느새 술 취한 동맹회원들이 문간까지 뛰어나와 소리쳤다.
"야! 한일걸 한신은 우리 동맹회의 인재인데 어디서 눈독을 들이는 거냐!"
"눈독을 들이다니요. 저는 단지 서신을 전하러 왔을 뿐인데. 잠깐만, 동맹회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짜식아.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베이징의 뒷간에서 너희들이 좋아하는 황제 똥구멍이나 닦아라!"
"···당신과는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무슨 막말을."
"비겁하게 만족과 내통한 간첩들이 고작 욕 좀 들어먹었다고 불평하면 섭섭하지."
아오 시끄러.
이들을 제지해야 할 랴오중카이는 술에 곯아떨어져 쿨쿨 자고 있다.
동맹회원들은 슬슬 차이어의 전령을 툭툭 치며 물리적으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는데 안쪽에서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이 집은 오는 손님을 차별하지 않소. 주인으로서 마땅히 객을 대접할 뿐이오. 신아, 뭐하냐! 밖에 손님을 얼마나 세워두는 거냐!"
"예. 들어 오세요."
아버지의 일갈에 동맹회원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차이어의 전령은 푹 자고있는 랴오중카이 옆에 앉았다.
바로 술을 대접했다.
"감사합니다. 술맛이 좋군요."
"예. 답장을 받아 가셔야지요?"
"급한 건 아닙니다. 천천히 써주셔도 됩니다."
"아니요. 지금 써드리지요."
량치차오의 소개장부터 펼쳤다.
앞부분은 구구절절했다. 왜 인사도 않고 떠났느냐고? 우리 그 정도 사이 아니었잖아.
차이어에 관한 내용은 끝의 몇줄이었다.
「···차이어는 내가 으뜸으로 믿는 장수다. 중국의 미래를 책임질 전략가이니 친교를 맺어두면 장차 천하를 얻는 것과 같을 것이다.」
차이어의 서신은 더 짧았다.
「안녕하십니까. 출신학교의 작은 인연으로 다짜고짜 서신을 작성하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두렵군요. 저는 얼마 전 윈난 육군 제 19진 37협의 통령으로 부임하였습니다만 참모처의 부족함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리를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뵙고 싶으니 만남을 기대합니다.」
나 인기 좀 많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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