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초등학생을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하지
"저, 정말입니까···? 장군께서 진심으로 만남을 고대하셨는데···."
"차이어 장군은 제가 흠모하는 분이니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이유라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차이어와의 만남을 다음에 기약한다는 내 말에 전령은 토끼 눈이 되어 안타까워했다.
"자세한 건 답신에 적었습니다만. 간단히 말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해라니요?"
"군대를 포함한 청의 조직은 오랫동안 혈연과 지연, 학연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차이어 장군과 저는 육사라는 연결고리가 있지요."
"그건 그렇지요···."
"물론 만남을 청하시는 장군께서 특정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지름길이 아닌 정도를 가고자 하니, 밑바닥부터 임관할 생각입니다."
"오오, 그런 뜻이!"
차이어의 전령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라면 장군께서도 납득하실 겁니다. 임관하시어 보직이 결정되고 나면 오해 없이 장군을 만나 뵐 수 있을 테니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예. 이해해주셔 감사합니다."
차이어의 전령이 답신을 들고 떠나자 동맹회의 사내들이 앞다투어 손뼉을 쳐댔다.
"잘했소! 저런 입헌파는 상종을 말아야 돼!"
"역시 동맹회의 영웅일세!"
슬슬 정리해야지.
널브러진 랴오중카이를 자택에 옮겨야 한다는 핑계로 하나둘씩 동맹회원들을 집 밖으로 쫓아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천중밍이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는 동맹회 안에서도 새롭게 맺어진 비밀동맹이요. 얼른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오. 나도 내 위치에서 힘쓸 테니."
천중밍까지 사라지자 비로소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고 생각했는데.
2층의 계단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던 한서시가 우당탕 뛰어 내려왔다.
"오빠! 오빠! 저 사람들 다 오빠 친구야?"
"뭐야. 이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냐. 친구 아냐."
"그래도 다들 오빠를 좋아하는 거 같던데. 맨날 깡패들하고만 어울리던 오빠가 정상적인 사람들하고 있는 걸 보니 신기해."
"저놈들도 정상은 아냐."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날 이용해 먹을 생각밖에 없는 놈들이라고.
차라리 삼합회 애들은 의리라도 있지.
"그래서 언제 장군이 되는 거야?"
"장군은 그리 쉽게 못돼."
"왜에. 빨리 장군되서 우리 집도 좀 떵떵거리면서 살아보자아."
"벽돌집에 매일 고기반찬이 나오면 됐잖아. 뭘 더 바라는 거야."
여동생의 입이 삐죽 나왔다.
"그거랑은 다르지, 자랑을 못하잖아."
"왜 못해."
"···학교 애들이 놀린단 말야."
"뭘 놀려?"
"···."
여동생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말해봐."
"오빠가 아편 팔아서 번 돈으로 잘 먹고 잘사는 가오리방쯔라고 놀려!"
금세 여동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서시야. 내가 철모르고 어릴 적 아편 운반을 몇 번 한 적이 있지만 적어도 유학길에 오르고 난 이후론 아편 관련한 일은 손도 댄 적 없어."
"정말···?"
"어."
"그럼 무슨 사업을 하는지 왜 안 알려주는 거야? 거리의 깡패들은 왜 오빠만 보면 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거야?"
말문이 막혔다.
아편 사업은 진짜 관계없지만, 파칭코 사업도 딱히 정직하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으으. 이게 대부의 심정인가?
마이클 콜레오네가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내가 하는 사업은 그냥 오락실 같은 거야.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깐의 유흥거리를 제공하는 일이지."
"좋은 일이야?"
"좋은 일이냐고? 그럼. 좋은 일이지."
"그럼 됐어. 더 안 물을게. 그런데 나는 오빠가 빨리 장군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학교 애들도 더 이상 가오리방쯔라고 못 놀릴 거 아냐."
"노력해볼게."
눈물을 닦고 안아주었더니 서시는 금방 진정했다.
2층까지 모셔 재우고 난 후 드디어 집안이 조용해졌다.
다만 그때까지도 꼿꼿이 탁자에 앉아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내게 아버지는 어딘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말수는 적지만 기상은 호방하여 대인의 풍모가 있는 분.
어린 나이에 바다를 건너 낯선 타지에 정착할 만큼 개척심과 식견이 뛰어난 사람.
다만 그 고고한 혜안 덕인지 가끔은 내가 2회차 인생을 산다는 사실을 아는 느낌이 들어 꺼림칙할 때가 있다.
부자간에 말없이 대작이 이루어졌다.
"서시 얘기는 신경 쓰지 마라."
"예."
"장군이니 뭐니 하며 청나라에 충성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야. 너는 어렸을 적부터 독특한 아이였지. 널 가르친 선생들은 귀신이 든 아이라며 몹쓸 말들을 뱉기도 하였으나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섬찟하다.
보아라. 이게 어떻게 19세기 조선인의 현실 인식이냐고.
이런 아버지 어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조선인이라는 것에 목매달 필요도 없다. 물론 뿌리는 기억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네가 어디에 있고 앞으로 무얼 할지다."
"예."
"이 홍콩만 해도 하루에 수십번씩 소란이 인다. 거리에서는 마차가 누굴 쳤느니, 누가 피하지 않았느니 하며 싸우고. 하역을 할 때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편한 보직이 돌아갔다 하면 목에 핏대를 올리고 죽일 듯이 싸우지."
끝도 없이 마신 것 같은데 아버지는 평온히 앉아계셨다.
오랜 선원 생활로 탄 구릿빛 피부는 홍콩에서도 고집하는 하얀 옷과 대비되어 초야에 잠든 기인처럼 보였다.
"고작 도시 한곳에서도 이렇게 소란이 이는데 청나라, 일본제국,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조선에서 일어나는 동란은 대체 어떻겠느냐? 또한 북방의 러시아와 구미의 열강들, 저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대관절 무슨 괴란이 벌어지는지 나는 이해하고 싶어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생전 처음 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더 넓은 세상을 항상 궁금해했었다. 그래서 이민 길에 오른 거지.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 보니 홍콩이라는 도시 한 곳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더구나. 그에 비해 세계는 넓고 무궁무진하다. 아마 나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
"하지만 너라면 가능하다."
"예?"
"네가 뭘 보고 있는지, 무슨 뜻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 이 애비는 모른다. 네 할아버지도 그랬으니까. 날 족보에서 파며 없는 자식 취급하였지. 선신이 묻힌 고향을 떠난다는 발상 자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야."
늦은 여름밤.
날씨는 그윽하고 술맛은 달콤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꿈결처럼 아득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아편을 팔아야 한다면 팔아라. 장군이 되고 싶다면 되어라.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어떤 선택을 하든 애비는 널 응원할 테니."
"나라를 세우면 어떻습니까?"
"응?"
"한족이든, 만족이든, 한민족이든, 나아가 피부가 하얗든 까맣든, 유일신을 믿든 다신교를 믿든 모두 포옹할 수 있는 그런 나라말입니다."
아버지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박거리다 말했다.
"그게 네 꿈이냐?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세우는 것이?"
"···."
"세워라. 나는 너를 믿는다."
후우.
우리 아버지도 아무래도 2회자 인생이신 거 같아.
***
청나라의 군제(軍制)는 개판이다.
개국공신 팔기군은 이미 봉급만 타 먹으며 무위도식하는 특권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하여 한족 용병들을 녹영(綠營)과 용영(甬營) 등의 군대로 편성하였으나 성과는 미미하였으니.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문관 출신의 한족 사대부들이 죄다 지휘관 자리를 꿰찬 덕에 가히 전설적인 당나라 군대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모든 군대가 그처럼 구식인 것만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가 중심이 되어 편성한 신군(新軍)은 구미의 군제를 차용하여 편제와 장비만 보면 진정한 의미의 신식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직접 훈련시킨 북양 6진은 베이징의 주변을 방어하는 중앙군으로서 청나라 내에서만큼은 명실상부한 최강의 군대였다.
그리하여 새로 임관하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다 신군을 지망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자연스레 경쟁이 붙었다.
위안스카이의 군제개혁은 전국에 여러 개의 육군학당을 만드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학당 간의 교육의 질은 편차가 심하였으며 인정해주는 수준도 다양하였다.
그중에서도 역시 최고의 엘리트로 평가받는 후보생들은 일본육사 출신들이었다.
신군은 편성되었어도 각 지방의 진(사단)끼리는 경쟁 구도가 심화되고 있었다.
다들 우수한 장교를 데려오려고 혈안이 되어있었으니 육사 출신이기만 하면 다들 줄 서서 모셔 오려 안간힘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는 나였다.
윈난성의 차이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광시성과 광둥성, 저장성과 푸젠성 등 중앙군의 실력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부대로 오라며 부추기는 통에 어머니가 온종일 손님 대접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이어에게 댔던 것과 같은 이유를 대며 모두 거절하였다.
정직하게 바닥부터 임관하고 싶다?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일본에서 개고생했는데.
원하는 부대가 정확히 있었다.
후베이성(湖北省, 호북성) 신군 제8진.
신해혁명의 신호탄을 울리는 봉기가 바로 제8진이 주둔한 후베이성의 성도 우창(武昌, 무창)에서 시작된다.
이미 혁명은 몇 달 남지 않았다.
나는 선봉장이 되어 단걸음에 세력을 규합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당찬 포부를 품은 채 제8진 보병 제18영의 관대(대대장)로 부임한 첫날.
나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군기 문란의 수준을 넘어선 나태의 극치.
"다 왔냐?"
"아니요."
집합을 건지 두 시간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병사들을 쓱 한번 훑었다.
분명 차렷 자세로 대열을 지키라 일렀건만.
짝다리를 짚거나 두리번대는 따위의 행동은 지적하지도 않았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들은 원래 저러냐?"
"누구요?"
"저기 연병장에 판 깔고 마작치는 녀석들."
"원래 저런다는 게 무슨 말인데요?"
"···아니다."
몇놈은 아예 풀숲에 누워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으며 또 몇놈은 담뱃대를 돌려 피우고 있었다.
내가 군인을 소집한 것인지 건달들을 불러 모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삼합회의 부하들이 그립구나아아아.
보병영의 병사 수는 500명.
적은 수는 아니다. 활용하기에 따라 일개성을 함락시킬 수도 있는 병력이다.
하지만 이래서야 무얼 하겠냐고.
"관대님. 지금 안 오는 애들은 전에 봉급도 안 주는 군대가 무슨 의미냐며 전역한다고 했었는데. 걔네는 안올거같으요."
이놈의 요자 말투도 거슬렸으나 놀랍게도 지금까지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병사였다.
일단 꼬박꼬박 대답하는 녀석 자체가 드물었으니.
아아. 이런 군대를 보유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다.
"좋아. 있는 사람들로 제식훈련을 한다. 모두 모이라고 해."
우등병이 말을 전하자 병사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문제는 마작에 몰두한 놈들이었다.
"관대님이 부르시는데요."
"아 좀 꺼져. 지금 한창 집중하는데."
인상이 험악한 병사가 우등병을 밀쳤다. 덩치도 커다란 것이 삼합회에 온다면 인재 중의 인재였다.
우등병이 다시 쪼르르 달려왔다.
"훈련은 조금 있다가 하시죠. 샤즈광(夏之光)은 내기 중에 누가 끼어들면 화를 엄청 내거든요."
"저놈 이름이 샤즈광이냐?"
"네."
"저놈이 병사들 중에 대빵이고?"
"넹."
악! 넹은 좀 너무하잖아.
하지만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어느 정도는 각오한 바였다.
태어난 이후 규율을 지켜본 적도 없고 평생 되는 대로 살아온 청의 젊은이들이다.
오히려 강제로 억압하려 하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애초에 반란이 바로 여기서 일어났으니까.
군기 잡겠다고 설치다가 내가 썰릴 수는 없잖아?
이놈들의 정신연령은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으니 다루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선생님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면 된다.
나는 제18영, 아니 18반의 선생님으로서 이 반의 일진부터 내 편으로 만들 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이! 샤즈광!"
"어떤 새끼가 내 이름을 막 불러?"
"관대다. 마작이 재밌어 보이는데. 나도 끼워줄래?"
일진이 좋아하는 놀이에 관심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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