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의 배수진
한커우 북쪽의 헝산(横山).
3,000여명의 청군이 운집해 있다.
제8진 통제 장뱌오는 부관들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한커우의 시가지를 내려다보았다.
반란군이 작은 점처럼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저 꼬라지는 뭐냐···? 저걸 진지라고 지었단 말이냐? 리위안훙 멍청한 새끼, 돼지처럼 처먹을 줄이나 알지."
"듣기론 리위안훙이 아닌 그 밑에 신임 관대가 작전을 총괄한다더군요."
"관대? 그깟 놈이 군 전체를 총괄한다고?"
"한신이라는 자입니다. 그래도 일본 육사에서 성적이 워낙 좋았기에 저희 영관들 사이에서는 꽤 화제가 되었었는데···. 저 진지를 보니 역시 초짜배기 냄새는 지우지 못하는군요."
장뱌오는 코웃음 쳤다.
한신이라니. 무슨 오만한 이름이란 말이냐.
"저런 놈들에게 우창성을 내주다니. 큰 실수를 했어."
"야밤이었고 총독이 먼저 도망친 탓에 대응이 어려웠습니다."
"젠장! 괜찮아. 이제부터 만회하면 된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다.
그날 자신이 사태만 잘 수습하였어도 이렇게까지 격화될 일이 아니었다.
일전에 쌀 폭동이나 인력거 노동자 파업 따위의 소란을 진압하여 '바투루(용감한 전사)'의 칭호까지 받은 장뱌오다.
반란 진압에는 나름의 일가견이 있었다.
단지 이번에는 군인들의 폭동이었다는 점.
게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놈들의 반란이 상당히 조직적이었던 점 때문에 지나치게 당황하고 말았다.
"중앙군은 어디까지 왔다느냐?"
"내일모레 후베이성 북단에 도착 예정입니다."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얼마간 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황제 폐하께 얼굴이라도 들 수 있어."
"적의 진지구축은 형편없습니다. 그러나 워낙 수가 많은 탓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쉽지 않습니다."
장뱌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미 후광 총독 루이청은 우창 봉기의 책임을 지고 관직을 삭탈(削奪)당하였다. 조정에서는 처벌의 수위를 논의 중이다.
루이청과 동시에 도망친 장뱌오이니.
같은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청에 충심을 증명해야만 한다.
북양군의 정예 5만 병력이 도착하면 반란군은 갈려 나갈 것이다.
어차피 우창 탈환은 기정사실. 보다 중요한 것은 공을 세워 처벌을 피하는 거다.
"곧 창장(長江, 장강)을 거슬러 해군 함대가 도착한다. 해군과 함께 한커우를 포위하여 양쪽에서 공격하면 오늘 밤에는 한커우에 진지를 꾸리고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을 면밀히 살피겠습니다."
"그래. 병사들에게 일러라. 언제든 치고 나갈 수 있도록 만전의 태세를 갖추라고."
장뱌오는 다시 한커우 시가지의 반란군 진지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허접하다.
벌써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 하다.
몇시간 후.
"함대의 뱃머리가 보입니다!"
"좋아! 출전이다!"
양쯔강의 드넓은 수면위로 군함이 위풍당당한 기체를 드러냈다.
언뜻 봐도 10여척 이상. 천군만마처럼 든든했다.
함대를 지휘하는 자는 해군 대신 싸전빙.
처참한 패배로 점철된 청일전쟁에서 유일한 수훈을 거둔 명망있는 장수다.
싸전빙이라면 한커우에 펼쳐진 판도를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전세를 파악할 것이다.
척하면 척이지. 함대 포격 후 보병 돌격이다.
말하지 않아도 싸전빙이나 장뱌오와 같은 수준의 장군에게는 당연한 전술.
"곧 함대 포격이 시작된다! 포격이 끝나면 혼란에 빠진 적이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칠 것이니 모두 돌입을 준비하라!"
우창에서와 같은 불시 습격이 아니라 야전에서 정정당당히 맞붙는다면 자신이 질 리 없다.
리위안훙? 아니지. 한신이라고 했나?
기다려라 멱을 따주마!
헝산의 포대에 몸을 웅크린 채 돌격 준비를 하는 장뱌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장군님. 포격은 언제···?"
"기다려. 싸전빙 제독은 나처럼 경험 많은 장수다. 그의 판단을 믿어라. 보다 좋은 포격 위치를 선정하려는 거다."
"하지만···. 항구에 전함을 댑니다만?"
정말이었다.
비록 대장함 한척 뿐이었지만 한커우의 항구에 순양함이 입항하고 있었다.
"저, 저거 대체 뭘 하는 거야!"
"전령을 보낼까요?"
"당장!"
전령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장뱌오의 군대는 돌격 준비를 한 채로 밤을 새워야 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돌아온 전령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중립? 중립이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싸전빙 이 물개 새끼가 미쳤나? 좋다고 해군부에서 주는 돈으로 군함을 사들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청조를 배신해?"
"어떻게 할까요, 장군님."
역시 중앙군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장뱌오는 이번 진압군의 총대장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육군 대신 인창(蔭昌)은 꽉 막힌 팔기군의 장수다.
인정머리 하나 없고 지 목숨 귀한 줄만 아는 자식.
도착하면 가장 먼저 자신의 지휘권부터 박탈할 터.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베이징으로 압송당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우리끼리 한다."
"우, 우리끼리 말입니까?"
"저 진지를 봐라. 군대라기보다는 토비(土匪)떼에 가깝다. 응집하여 밀고 나가면 적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쁠 거다."
"그래도 시가전은 좀···."
장뱌오도 부관의 걱정은 이해하는 바였다.
반란군이 진을 친 지역은 한커우의 시가지.
시야와 이동이 제한되어 아무래도 부대 간의 기민한 연계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전투를 벌인다면 그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개싸움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함대 포격에 의해 초토화된 지역을 보병으로 정리하는 거였는데···.
장뱌오도 정작 공격을 실행하려니 망설여졌다.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기다려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부관이 외쳤다.
"장군님! 적이 움직입니다!"
장뱌오는 적의 군세를 살폈다.
뭐지? 해군의 위협이 사라졌으니 먼저 이쪽을 공격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장뱌오가 진을 핀 곳은 헝산 포대.
함부로 공략하기 어려운 요지다.
물론 머릿수로 무식하게 밀고 들어오면 이쪽도 후퇴해야겠지만 급조한 군대로 다수의 사상자를 감수하는 작전을 펼칠 수 있을까?
"어어. 헝산을 우회합니다!"
적군은 바로 공격해오는 대신 좌측으로 크게 돌고 있었다.
포위하겠다는 심산인가?
하지만 가늠해본 적의 병력은 기껏해야 1개 여단 수준.
포위진을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다.
잔뜩 긴장하여 반란군의 이동을 살피던 장뱌오는 문득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곤 일어서서 껄껄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부관들이 시선이 느껴지자 장뱌오가 입을 열었다.
"으하하하! 너희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이냐?"
"뭘 말입니까?"
"지금 반란군을 진두지휘하는 게 한신이라는 녀석인가? 꼴에 이름값을 하겠다고 병법을 펼치는구나!"
"병법이라니요?"
"적의 행군 방향과 목표점을 보아라. 장강을 등진 배수진(背水陣)이다! 애송이가 국사무쌍 한신의 병법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구나! 으하하."
초한쟁패기의 영웅, 회음후 한신.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명장이다.
그의 용병술은 전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일컬어지며 후대 수많은 지휘관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3만여 병력으로 배수진을 치고 조나라 20만 군대를 깨뜨린 정형 전투(井陘之戰).
장뱌오도 물론 알고 있다. 몇차례나 연구한 바다.
"애송이가 제법 머리를 썼어. 오합지졸인 반란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배수진을 치고 싸운단 말이지. 물론 도망갈 곳이 없으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되긴 하겠지."
"장군님 말씀대로면 병법을 잘 이용한 것 아닙니까?"
"으하하! 그것이 어설프게 병법을 공부한 자들의 한계다. 배수진의 핵심은 보병에 있지 않아. 기병에 있지."
"하지만 어디에도 기병은 안 보입니다."
"규합한 군세를 유지하기도 벅찬 반란군이 기병을 어찌 운용하겠나? 배수진을 친 보병이 적을 유인하는 사이 기병과 같은 별동대가 텅 빈 본진을 타격하는 것이 정석일진대. 사방이 뻥 뚫린 한커우에서 별동대를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 저 배수진은 그저 고통스럽게 자살하겠다는 거다."
장뱌오는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해군이 중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중앙군이 도착할 때까지 헝산에 갇혀있을 줄 알았는데.
멍청한 적의 신임 관대가 알아서 병력을 끌고 자멸해주려 기어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출전이다! 쥐가 스스로 독에 기어들어 갔으니 독 안에 총알을 퍼부어주자!"
명령이 하달되어 곧장 전투준비가 완료되었다.
장뱌오는 적이 진지를 꾸리기 전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커우 일대를 살폈다.
장뱌오의 군대가 주둔한 헝산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야트막한 동산 몇 개가 있을 뿐, 별동대를 운용할 만한 지형은 보이지 않는다.
장뱌오는 3,000여 병력 앞에 위엄있게 섰다.
후난성에서 급히 끌어오느라 이쪽도 급조한 병력인 건 마찬가지다.
자신이 직접 지휘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 있다.
"공격이다!"
군대가 헝산을 내려가 창장 강변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
헝산이 올려다보이는 한커우의 얕은 동산.
나는 탄클립을 매만지며 샤즈광에게 물었다.
"도독은 어떠냐? 깼냐?"
싸전빙의 해군 함대에 담판을 지으러 간 리위안훙.
새벽이 되어서야 고주망태가 된 채 돌아왔다.
제대로 말도 못할 만큼 취해서 담판 결과는 겨우 부관에게 들을 수 있었다.
"제가 나올 때까지는 쿨쿨 잘 자던데요."
"그래도 한 건 했어. 싸전빙 제독 입장에서는 어차피 원하지 않던 싸움이야. 도독이 북양수사학당의 인연으로 싸움을 피할 핑곗거리를 제공해준 거지."
"왜 원하지 않는 싸움입니까?"
"대의는 혁명군에 있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자라면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황족 내각과 철도 국유화의 꼬락서니를 보고도 청조를 지지하겠나?"
"저는 어려운 얘기는 모릅니다."
그때 망원경을 대고 있던 리페이양이 낮게 말했다.
"적이 산에서 내려옵니다."
나는 바로 소총을 집어 들었다.
탄클립을 장착하고 풀썩 엎드렸다.
"병사들이 산을 다 내려오면 다시 한번 진형을 짤 거다. 그 틈을 잘 살펴."
"예."
"알겠습니다."
샤즈광과 리페이양이 망원경을 얼굴에 찰싹 붙인 채 정신없이 헝산을 노려보았다.
"얼굴은 알지? 모르겠으면 금색 견장을 찾아라. 장뱌오는 부대 한복판에서 빨빨 돌아다니며 지시를 내릴 거다."
샤즈광이나 리페이양이나 불과 며칠 전까지 일반 사병에 불과했던 녀석들.
급작스레 관측수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필요한 것은 내 지시를 듣고 곧바로 의구심 없이 이행할 수 있는 능력.
현 상황에서 이 둘보다 적합한 인재는 없다.
문제는 샤즈광과 리페이양이 아니다.
나다.
저격수는 1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무시당하던 병과다.
안전한 곳에 숨어 살인만 반복하는 비열한 자식이란 논리지만.
전쟁에 야비한 게 어디 있겠나.
볼트액션 소총의 눈부신 기술적 발전 이후.
저격은 내성 없는 적의 고급 인재를 암살하기에 최고의 전략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딱히 전문적인 저격수는 아니란 건데···.
그래도 200m 안에서는 웬만하면 맞출 자신이 있다.
그리고 배수진을 잡아먹는데 눈이 먼 장뱌오는 부대를 이끌고 내가 숨은 언덕 바로 앞을 지나갈 거다.
200m가 뭐야. 100m 안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
물론 너무 가까워지면 도망치기 힘드니 적당한 거리에서 승부를 봐야겠지만.
"대장님 말씀대로 병사들이 멈췄습니다. 부대를 정비합니다."
"장뱌오는?"
"찾는 중입니다."
맨눈으로도 얼마간은 보였다.
배수진을 친 혁명군을 조망하며 자신의 부대에 작전을 하달할 수 있는 평야 지대.
장뱌오의 군대가 멈춰 대열을 짜고 있었다.
"앗! 찾았습니다."
리페이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치를 말해라."
"어···. 오른쪽."
"적의 부대가 뭉텅이로 나뉘어 있으니 몇번째 뭉텅이인지 말해."
"세, 세 번째. 세 번째 뭉텅이의 맨 앞에서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자입니다."
"찾았다."
조준경 따위는 없다.
저격 소총도 아니다.
그나마 육사에서 사격 연습할 때 쓰던 아리사카 30년식은 몸에라도 익었었는데.
한양 88식은 영 조작감이 삐걱댄다.
이리저리 손짓을 해대며 바쁘게 떠드는 장뱌오가 보였다.
이걸 위해 3,000명의 병사를 먹잇감으로 던졌으니.
여기서 내가 해줘야 된다.
호흡을 참고.
한 방에 끝낸다는 각오로.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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