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전쟁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
감촉이 있는 것도 아닌데 손끝에서 느낌이 온다.
샤즈광이 외쳤다.
"명중입니다!"
탕!
한발을 더 꽂았다.
슬로우 모션처럼 장뱌오의 몸뚱이가 허물어졌다.
주위 장교들이 다급히 몰려들었다.
후.
숨을 고르고.
다시.
탕!
탕!
탕!
총알 세발에 장교 세 명이 거꾸러졌다.
탄창을 모두 비운 나는 몸을 일으켰다.
"튀자."
야산을 헉헉대며 내려갔다.
근거리에서 다섯발이나 갈겼으니 적이 내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
잡으러 올지는 모르겠으나 잡히면 뒤지는 거니까 죽어라 달리는 수밖에 없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총참모장이면 뭐하냐고. 사람이 없어 내가 직접 야전에서 저격을 해야 하는 판인데.
그래도 고생한 덕에 목표는 초과 달성이다.
배수진을 친 목적은 적을 헝산에서 내려오게 하는 데 있었다.
장뱌오의 군대는 우창에서 도망친 병사들과 허난성의 병력을 긁어모아 만든 병력.
혁명군만큼이나 엉성하다. 지휘관의 부재만으로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장뱌오 뿐 아니라 근저에서 보좌하는 장교 셋의 목숨마저 빼앗았으니 기대 이상의 성과.
땀을 훔치며 진지에 입성했다.
진지 뒤로 펼쳐진 장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급할 필요가 없다.
"적이 수습하기 전에 바로 친다. 지휘관들을 불러라."
"예!"
강 앞에 웅크리던 몸을 일으켜 혁명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얼마간 행군하니 우왕좌왕하는 청군이 보였다.
나는 부대를 멈춰 세웠다.
"전군! 전방에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아!!!"
청군을 앞에 두고 병사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아주 단순한 수법.
아군의 사기는 끌어 올리고 적은 겁에 질리게 하는,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궁극의 전술이다.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 되나! 다시 10초간 발사"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청군은 지휘관을 잃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
이런 때일수록 단순한 작전이 효과적인 법이다.
과연 청군의 대열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후방에서부터 슬금슬금 달아나는 병사들이 보였다.
한번 대열이 무너지면 그다음부터는 쉽다.
3,000에 달하던 청군 중 3분의 1은 달아나고 2,000명 가량이 투항해왔다.
이것이 싸우면 싸울수록 병력이 늘어나는 마법?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우한3진으로 다가오고 있는 북양군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군대.
전면전에서는 가망이 없다.
하지만 쑹자오런과의 작전회의에서 밝혔듯이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전국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끓어오를 시간 동안 버티기만 한다면 분명 새로운 바람이 불 거다.
진압군은 여론에 흔들리게 되어있다.
"지금부터 참호를 판다. 한커우를 빙 둘러싸고 길게 선을 그을 거다."
"참호 파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지 안 알려주십니까?"
"파는 법 따위는 없어. 그냥 닥치고 파는 거야."
다행히 한커우의 평원은 땅이 물러 삽이 쑥쑥 들어갔다.
수천의 장병들이 달라붙어 땅만 파대니 금세 흙산이 쌓였다.
나는 장뱌오를 저격했던 언덕에 올라 공사를 감독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지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근엄하게 내려다보게 되었다.
어둑어둑해질 때쯤.
혁명군의 도독 리위안훙이 친히 전선에 나타났다.
"승리를 축하하네! 장뱌오, 그 자식은 평소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날 꼽주는게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딱 내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저승행 기차를 탔군."
"근방의 잔당을 소탕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북양군을 막아내는 데 집중하면 됩니다."
"그런데 괜찮겠는가? 진압군의 총대장은 만만치 않은 자일세."
"육군 대신 인창 말입니까?"
"그래. 나는 통령에 부임할 때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심기가 깊고 무서운 자라는 인상을 받았네."
그럴 리가. 인창은 팔기군 출신.
팔기군의 인물이 무언가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
대신 내가 주목하는 장수는 다른 자였다.
반란군은 총 3군으로 구성된다.
제1군의 인창.
제2군의 펑궈장.
제3군의 짜이타오였다.
인창과 짜이타오는 팔기군의 인물이니 견제가 되지 않았지만 2군의 펑궈장(馮國璋)은 쟁쟁한 이름이었다.
북양군의 총수 위안스카이.
그의 밑에는 3명의 호걸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북양3걸이다. 펑궈장은 그 3명중 하나였다.
"펑궈장은 어떻습니까?"
"누구?"
"제2군장인 펑궈장 말입니다."
"흠. 위안스카이가 아끼는 자이니, 실력은 있겠지. 하지만 말했잖나. 펑궈장 따위보다 진짜 위험한 인물은 인창이야. 그를 조심하게나."
"예. 그러지요."
리위안훙의 전략적 식견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지는 아직 분간이 잘 가지 않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다.
나의 신앙.
우리를 적의 총알로부터 보호해주실 어머니 신(神) 참호.
우리를 괴롭히는 적을 단호히 심판해주실 아버지 신 맥심 기관총.
그리고 작고 소중한 철조망 신까지.
세 분의 손길 아래 모든 전투는 평등해 질 것이다.
***
나는 한커우 북쪽의 평원에 섰다.
이 광경이야말로 땅개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예술작품이 아닐까.
3일전까지 허허벌판에 불과했던 평원에 기다란 전선이 생겼다.
FM 따위 전혀 지키지 않은 날림공사였으나 그럭저럭 기한에 맞추어 해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혁명군의 군세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다.
덕분에 인력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인력을 갈아 넣으려야 넣을 수가 없다. 일할 사람이 너무 많거든.
이미 북양군은 도착해 있었다.
망원경으로 살피면 저 멀리 부대가 보였다.
하지만 쉽사리 공격해오지 않고 눈치만 살피는 그들이었다.
"아직 적의 총대장이 도착하지 않았다더군. 그래서 공격을 주저하는 것 같네."
"인창은 뭘 한답니까?"
"글쎄. 주도면밀한 자이니 작전이 있을걸세."
리위안훙은 계속하여 진압군 총대장 인창의 전략을 걱정하였으나.
들어온 정보는 영 딴판이었다.
"인창은 허난성 신양(信陽)에 있다는군요."
"거, 거긴 왜?"
"무장 열차에서 온종일 지낸다던데. 도독께서 말한 대로 작전이 있나 보지요."
"좀 더 지켜봅세. 경계를 늦추지 말고."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머물던 인창.
여전히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잠잠하던 그가 드디어 움직였다.
과연 그의 첫 군사행동은?
"도독. 이거 보셨습니까? 베이징발 신문입니다."
"뭐야. <육군 대신 인창, 농민 떼에 대패?>라니. 뭐 이딴 기사가 다 있어."
"읽어 보세요."
"무장 기차에 숨어있던 육군 대신이 지나가던 농민 떼를 발견하고 반란군이라 지레짐작하여 기차를 출발시켜 달아났다. 알고 보니 농민들은 밭으로 면화를 따라가는 중이었다고···."
"과연 주도면밀하여 조심성이 많은 자입니다."
"그, 그러게나 말일세. 허허."
겁쟁이 인창이 헛발질을 해주는 즐거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며칠 후 신문에 새 기사가 올라왔다.
- 인창 경질. 새 육군 대신에 위안스카이. 흠차 대신 도맡아.
나왔다. 그 이름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지금 이순간 중국 대륙 최강의 남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황제 푸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일 뿐이다.
섭정 짜이펑?
확실히 청조의 최고 권력자긴 하지만 신해혁명이 터진 지금, 그의 권좌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힘은 곧 군대다.
전국 30만에 달하는 신군 중, 위안스카이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북양군이 15만.
북양군에는 북양3걸인 펑궈장을 포함하여 훗날 군벌로 자라나는 장군들이 잔뜩 포진해 있고 청조는 그들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다.
일찍이 섭정 짜이펑은 북양계의 세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여 위안스카이의 관직을 박탈하고 조정에서 쫓아냈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고향에서 낚시를 즐기는 등 여유로웠으니.
청조는 쇠락하고 북양군은 성장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정세는 그가 예견한 대로 흘러가 짜이펑은 자기 손으로 쫓아낸 호랑이를 다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창살에서 풀려난 배고픈 호랑이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자신을 학대하던 옛 주인에게 예전처럼 충성할까?
그게 아니라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잡아먹을 대상을 물색할까?
그 이빨이 향하는 방향은 과연 어느 쪽일지.
위안스카이의 복귀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진압군은 재편성되어 1군은 펑궈장, 2군은 또 다른 북양 3걸중 한명인 돤치루이(段祺瑞)가 맡았다.
청의 군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한커우 외곽의 먼 곳에 집결해 있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머지 않았다는걸.
***
아침에 깼는데 기분이 이상하였다.
바로 참호를 시찰하러 나갔다.
날 알아본 병사들이 눈인사했다.
전선에선 경례를 금지한 터였다.
그간 보강공사를 꾸준히 하여 이제 참호가 제법 태가 난다.
첫 3일 동안 급히 완성했던 흙구덩이와는 새삼 다른 모습이다.
무명천을 덮은 흙벽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주요 요지마다 배치된 맥심 기관총이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2개 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 길고 긴 한커우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철조망까지 완벽하게 깔았으면 더 좋았겠으나 짧은 시일에 공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관총 주위에만 설치되었다.
그때.
쾅!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다발적으로 참호 근처 여러 곳이 터져나가며 흙무더기가 흩뿌려졌다.
"포격이다!"
시작됐다.
청군이 쏘는 야포의 적중률은 형편없었다.
그저 쏘아댄다는 느낌. 내가 있는 근거리에라도 제대로 떨어지는 것이 없다.
조준을 하긴 하는 건가?
하지만 눈먼 총이 제일 무섭다고.
어디서 어떻게 비명횡사할지 모르니.
"엄폐하라! 엄폐!!"
벙커에 몸을 숨기고 포격이 끝나길 기다렸다.
폭죽놀이의 간격이 점점 뜸해졌다.
대신 대지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적군이 온다! 쏴라! 방어해! 기관총 사수는 탄환을 아끼지 마라!"
개전이다.
나도 한양식 소총을 들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서 푸른 군복을 입은 청군이 개미 떼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생각할 새도 없이 견착.
바로 다섯 발을 다 쏘고 재장전에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아!"
투타타타타타타타.
청군이 내지르는 함성과 혁명군이 쏘아대는 총성이 경쟁이라도 하듯 울부짖는다.
전쟁. 전쟁. 이것이 전쟁.
쉴새 없이 쏘고 또 쏘았다.
언제부터인가는 내 위치도, 본분도 잊고 사격에만 열중하였다.
푸른색 군모 대가리를 맞추고 또 맞추었다.
총성에 귀는 먹먹하고 화약 연기를 너무 마셔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래도 나는 계속 쏘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함성이 잦아들었다.
대신 총성뿐이었다.
그조차도 점차 빈도가 줄어들었다.
종래에는 거친 숨소리와 비명, 신음소리만이 참호를 채웠다.
"부상자를 호송해라."
슬쩍 얼굴을 내밀어 한커우의 평원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인간이었던 것들이 무더기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것이 전쟁!
지난 홍콩의 여름밤.
아버지와의 대담이 머리를 덥혔다.
시체의 산을 몇개를 넘더라도 나는 이기고 또 이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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