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에 찬 정치병자
중화를 강조하는 쑨원의 발언에 회담의 분위기는 묘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슬쩍 심기가 불편한 티를 내었으나 쑨원은 아랑곳 않고 떠들어대기에 바빴다.
"오다 보니 우창에는 아직도 철혈십팔성기를 내걸었더구려."
"예."
"임시로 급히 수립된 군정부이니 이해하오. 다만 이제는 서서히 국기도 바꾸어야 하지 않겠소?"
"뭐로 바꾼다는 겁니까?"
"당연히 중화를 상징하는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를 말함이오."
청천백일만지홍기는 쑨원이 제작한 중국동맹회의 기였다.
혁명 세력 전체를 동맹회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쑨원의 심보가 보였다.
"신중국의 기를 무얼로 할지는 좀 더 큰 자리에서 논의해야지요. 여기서 다룰 게 아닙니다."
"그렇다 하여도 철혈십팔성기는 중국 남부의 십팔개 성만을 상징하는 기. 몽골과 티벳, 만주 등을 포괄하지 못하오. 신해년의 혁명은 중화의 이름 아래 하나로 묶여야 하는 법이오."
회담을 하러 왔으면 모름지기 양보하는 것이 있고 그에 따라 이런저런 조건도 생겨나는 법인데.
이건 뭐 처음부터 끝까지 고압적인 통보뿐이다.
"총리님. 저 화북 북양군의 군세는 막강하여 혁명군의 역량을 한데 집중하여도 쉽지 않은 싸움입니다. 그런 북양군을 후베이성 군정부는 지난 몇 달간 젊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완벽하게 막아내었습니다. 그 공헌에 대한 보답은 없는 겁니까? 지금껏 말씀이 너무 서운하군요."
"보답이라니! 혁명에 모욕적인 용어요. 우리는 모두 흥한의 대의를 위하여 희생하고 노력하는 같은 처지인데 어찌 후베이성만 보답을 바란단 말이오."
"그렇군요. 총리님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턱을 괴던 리위안훙이 깜짝 놀라 탁자에 부딪혔다.
"날이 늦었으니 회담은 이쯤 하지요. 내일도 이곳저곳 시찰 일정이 잡혀 있지 않으십니까?"
"그렇소. 그럼 이만 가보겠소. 오늘 우창의 용 두 분을 만나 뵈어 이 사람, 크게 개안하였소."
"예."
"조만간 난징에서 각 성의 대표들을 모아 전체 회의가 열릴 것이니 그때 다시 뵙도록 하오."
아니, 전체 회의라니. 우리 그런 거 합의한 적 없잖아.
게다가 그놈의 점령도 못 한 난징 타령은 참.
쑨원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문을 활짝 열고 사라졌다.
조용한 가운데 리위안훙이 중얼거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하도 말이 많으니 중간부터 내용의 흐름을 잃었네. 동맹회 상하이 정부에서 고위인사가 온다길래 잔뜩 긴장했더만, 회담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모르겠군. 마무리는 된 건가?"
"마무리 안 됐습니다."
"쑨원은 가버렸는데?"
"다른 자와 마무리해야지요."
쑨원이 지껄이는 헛소리가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후베이성 군정부가 임시정부에 불과하단 것은 맞다.
휘하 군대의 지휘는 여전히 불안하고 통치를 위한 행정 체계는 애초에 구성한 적조차 없다.
어디까지나 진압군을 막기 위한 관문으로서의 군정부.
장기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통합 정부는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장차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청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고.
쑨원을 위시한 혁명파는 한창 기세는 좋으나 실속이 없다.
동맹회가 집결한 상하이는 기회주의자들의 잔치판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은 위안스카이의 존재와 그 휘하에 있는 15만의 정예군.
당장은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북양군벌들의 반목을 부추겨 그들의 힘을 약화하든, 내가 자리를 잡고 세력을 키우든.
어느 쪽이든 단시일 내에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그 외에도 량치차오와 차이어로 대표되는 입헌파나.
산시성의 옌시산과 같은 자들은 독자적인 길을 가려 한다.
개막하고야 만 대군벌 시대.
난세에 필요한 것은 동맹이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나는 전보를 쳤다.
수신자는 상하이의 쑹자오런이었다.
***
쑹자오런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익숙한 인영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혁명의 첫발을 디딘 것을 축하하오! 도쿄에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것들이었소. 특히 한커우의 기적은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더군. 내 일전에 비꼬는 투로 귀하를 전쟁의 신이라 칭했었는데, 그 말을 증명해 보이다니.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오."
일본에서 날아온 기타 잇키는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사업은 어쩌고 여길 왔습니까?"
"동맹회의 본부를 옮겼소. 도쿄에서 상하이로 말이오. 게다가 사업이라니, 그깟 하찮은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는데 대장부가 되어서 어찌 외면한단 말이오."
"전쟁은 보급입니다. 도쿄의 사업은 결코 하찮지 않습니다."
"난 잘 모르오. 귀하의 친구가 그럭저럭 경영하는 거 같던데. 얼마 전에 교토(京都)에 새 업장을 열었다고 얼핏 들은 것이 기억나는군."
파칭코 사업을 맡겨놓고 온 삼합회의 두징쯔는 수완이 좋았다.
단지 유지하는 걸 넘어 사업을 계속 확장해냈다.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웠다.
사사로운 욕심이 들 만도 한데 나를 총관리자로 대우하며 꾸준히 사업 보고를 해왔다.
쑹자오런과 기타 잇키,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자의국 건물의 비밀스러운 독방에 착석했다.
"바로 본론을 여쭙지요. 참모장님께서 절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쑹자오런이 바로 물어왔다.
어휴. 속 시원해.
쑨원과 대화하다 앉은 화딱지가 아무는 느낌이다.
"총무님이 바라는 신중국은 어떤 모습입니까?"
일부러 쑨원과 같은 질문을 쑹자오런에게 던졌다.
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답했다.
"민주공화국입니다."
"그게 뭡니까?"
"후후.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사실 무수히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저는 세계의 다양한 정치제도를 연구하며 개념을 가다듬었지요. 미국과 영국의 의회부터, 일본의 헌법, 독일의 공무원제, 러시아의 제정까지 다양하게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바라는 민주공화국은 세 가지 개념으로 압축됩니다."
"말씀해주시지요."
쑹자오런은 기타 잇키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첫째, 황제의 권위를 뛰어넘는 절대 권력을 지닌 헌법이 통치의 최상위층에서 만인의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 헌법은 누가 만듭니까?"
"국민 의회를 구성합니다. 의회의 구성원은 외부 간섭을 철저히 배제한 채 어떤 은밀한 동기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로 각 지방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요."
이론은 좋다만. 정말 말 그대로 이론일 뿐이다.
외부 간섭을 어떻게 배제하냐고.
사람이 어떻게 동기가 없겠냐고.
무엇보다 문제는.
"산은 높고 황제는 먼 중국에서 공정한 선거가 가능하겠습니까?"
"어렵겠지요. 그래도 시도해야 합니다. 저는 공정 선거를 가능케 할 방안으로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를 나누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이 서로를 견제하며 또 지방 정부끼리도 견제하는 거지요. 이게 민주공화국의 두 번째 개념입니다."
일종의 연방제인가?
이상은 높지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는 무엇인지요."
"저번에 말씀드린 의원내각제입니다. 내각제는 대통령이나 총리 한 사람의 능력과 성품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대신 대통령의 직무와 권한을 제약하고 제도화하지요. 저는 가장 이상적인 정부의 형태는 입법부가 행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의회가 폭주할 수도 있잖습니까."
"중국은 이미 수천년간 황제 한 사람과 그에 기생하는 구시대적 관료제로 폭주해왔습니다. 의원내각제의 폐해가 있다 하여도 그 수준은 전제정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쑹자오런은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한 수재.
이제 막 서른 살이었으니, 쑨원에게서 느꼈던 꼰대스러움이 없었다.
나는 까다로운 질문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민족의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만족과 한족이 융합하여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묻는 거라면. 먼저 정치적으로 완전한 평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또한 민족자결(民族自決)을 보장해야겠지요."
"그렇다면 만주족이 독립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동북3성의 광활한 영토를 잃게 될 텐데요."
"감수해야지요. 애초에 우리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하는 겁니다. 혁명의 최우선 목표는 어디까지나 전제정을 타파하고 책임 내각을 구성하는 데 있습니다. 영토 따위를 욕심내다가는 영영 내실을 다질 수 없을 겁니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지 않는 중국인. 이거 귀하다.
쑹자오런, 저와 함께 갑시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쑹자오런이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제가 시험에 통과했습니까?"
"시험이라니요."
"얼마 전 쑨 선생과 대담을 나눈 사실을 압니다. 참모장님처럼 총명하신 분이면 아마 상당한 답답함을 느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어케 알았누.
내가 대답 없이 묵묵히 있자 쑹자오런이 다시 말했다.
"봉기 이래 상하이 정부와 우한 정부는 지난한 대결을 벌이고 있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쑨 선생이 귀국하고 동맹회의 본부가 상하이로 옮겨지며 무게 중심은 상하이 쪽으로 실리고 있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동맹회는 쑨원의 조직이지요. 하지만 그 안에 제 파벌도 만만치 않습니다. 저, 쑹자오런이 우한 정부를 지지하겠습니다."
"대가로 뭘 원하십니까?"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군요. 저는 정치적 동지는 많지만, 군사적 지지기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참모장님께 어떤 군사적인 행동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절대 없을 겁니다. 다만 참모장님이 절 지지한다면 앞으로 정치권에서 제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녀도 함부로 적들이 총구를 들이민다거나 하는 낭패는 겪지 않겠지요."
동맹 제안이다.
"뭔 짓을 할 작정이길래 네 개 여단의 지지가 필요합니까?"
"제 목표는 신중국의 초대 총리입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정적(政敵)들과 싸우게 될 겁니다."
쑹자오런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쑨원과는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점이 보였으니.
야망이었다.
그저 맑은 눈을 하고 민족이니, 민권이니 추상적인 이야기를 떠드는 쑨원과 달리 쑹자오런에게는 분명한 야심과 그걸 실행할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재밌는 것은 그 야심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는 거였다.
그의 눈은 언제나 이글이글 불타오르며 탐욕과 야망에 가득 차 있었다.
탐욕은 위험하지만 강력한 동기가 된다.
개인의 부를 불리는 것이 아닌, 정치로 체제를 바꾸겠다는 야망은 쓰기에 따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여러 개의 중국과 같은 것을.
"좋습니다. 동맹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기타 잇키가 말했다.
"그런데 우한 정부의 도독은 따로 있잖나. 그자 없이 이런 결정을 내려도 되는 건가?"
쑹자오런과 나는 맞춘 것도 아닌데 동시에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아직 해가 중천이니 리위안훙은 자고 있을 터.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서 밤새 술 마시고 노는 게 그의 일과다.
기타 잇키가 잘 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쑹자오런이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겠소."
"뭐 할 말 있습니까?"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바다를 건너왔는데."
"뭡니까."
"우리의 혁명을 잊었소? 분명 신일본을 건국하기로 했잖소!"
아아. 그 얘기.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일본의 혁명은 일단 신중국을 건설하면 그다음에 생각하지요."
"기한을 둘 거요."
"언제까지?"
내가 불안한 듯 쳐다보자 기타가 문득 씨익 웃었다.
"장난을 쳐봤소. 내가 그리 모진 사람으로 보이오? 한창 바쁜데 일본의 일까지 요구하진 않소."
"다행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장난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하지만."
기타의 의뭉스러운 웃음.
언젠가는 일본에서도 혁명 한번 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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