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위안스카이는 전신거울 앞에 선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땅딸막한 키.
뺨에 물든 홍조.
천진난만한 눈동자.
벌써 지천명을 옛 저녁에 넘은 나이인데도 어린애 같은 용모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외모를 좋아한 적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데 순진무구해 보이는 외모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오래 참았어. 그렇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말을 걸어본다.
한동안 물끄러미 거울을 들여다보던 위안스카이는 의복을 갖춘 후 집을 나섰다.
자금성의 정문 앞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돤치루이가 따라붙었다.
호사가들은 떠든다.
북양3걸 가운데서도 돤치루이가 제일이라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북양군의 절반 이상을 통제하는 군사령관이 돤치루이였다.
"각하, 오셨습니까."
"오냐. 저번에 시킨 일은 어떻게 됐느냐?"
돤치루이가 뒤편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부하들이 여러 부의 신문들을 가져왔다.
"좋아. 이거면 되겠어."
위안스카이는 신문을 챙기고 황성 안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한때 드높았던 자금성의 문턱은 오늘날 뒷간 변소처럼 하찮기 그지없다.
청조에 광서제(光緖帝)나 서태후(西太后)와 같은 영웅은 이제 없다.
위안스카이는 확신했다.
청 황실에 자신에 맞설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고.
과연 황제 푸이의 어머니 융유태후(隆裕太后)는 오들오들 몸부터 떨었다.
지난 몇 달간 자신이 올 때마다 좋지 않은 소식이 함께였다는 사실을 학습한 결과였다.
예를 올린 위안스카이는 대뜸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부터는 꺼져가는 청조의 등불을 비통해하는 총리대신을 연기할 셈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총리대신, 왜 그러시죠···?"
"아이고, 마마! 이, 분하고 슬픈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합니까. 이 신문의 사설들을 보십시오. 온 천하가 황실의 퇴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흉험한 재앙이 시시각각 닥쳐오는 것 같아 그저 비통할 따름입니다."
"휴, 흉험한 일이라니요···?"
"저 유럽의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아십니까? 루이 16세는 막강한 권력을 자랑한 왕조의 군주였으나 프랑스 혁명 당시 군중들에게 끌려 나와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 그럴 수가···!"
"청 황실에도 같은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저는 하지 못합니다."
융유태후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흑, 하지만! 사람들이 떠들길 총리대신이 거느린 군대는 막강하여 금방 반란을 진압할 거라고···."
"태후 마마.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온 중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히 우한의 군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번성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해올 기세이니, 저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마마."
"···어떤 선택지가 있는 거죠?"
위안스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빙그레 웃었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비분강개의 총리대신을 연기하였다.
"끝까지 버티며 베이징에서 혁명군을 맞이하던가···. 그게 아니라면 공화의 길입니다."
"공화? 그 길을 가면 저와 황제는 어떻게 되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화의 길이 곧 황실을 지키는 길입니다. 국가의 정체를 바꾼다고 어찌 황제가 하루아침에 황제가 아니게 될 수 있겠습니까? 황실은 자금성에 그대로 남을 것이며 존칭과 예 또한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잃는 것은···."
"통치권이지요. 다만 좋게 보면 통치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편히 여생을 보내는 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융유태후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는 위안스카이는 실룩이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황제만 없으면 자신의 위에 아무도 없는 날이 온다.
황제만 없으면!
융유태후와 함께 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돤치루이가 눈빛을 보내왔다.
위안스카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돤치루이가 은밀히 미소 지었다.
위안스카이는 태후를 앞세웠다.
돤치루이를 포함하여 북양군의 수십명 지휘관들과 함께 조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전회의장에 가까워지자 떠드는 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이미 남방의 십칠개 성을 잃었소.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고 지금은 버틴다 하여도 장기적으로 혁명군의 기세를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위안스카이는 뭘 하는 건가! 북양군은 청국 최강이라더니, 그깟 변변한 성벽 하나 없는 한커우를 점령 못 해서 이리 전투가 지연된단 말인가!"
"그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도둑이 든다고 호랑이를 마당에 두는 집이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한커우 전투도 일부러 패배하였음이 분명하네."
저 만족 놈들.
내가 조선과 북방에서 구르며 청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아편에 쩔어서 첩이나 끼고 시시덕거리던 돼지 새끼들이 감히 날 비난해?
위안스카이는 속에서 차오르는 증오감을 삭혔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태후 마마 납시오!"
어전회의에 참여한 대신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태후에게 예를 표하다 뒤따라 들어오는 자신을 보고 인상을 구기는 놈들이 보였다.
흐흐. 어쩔 거냐? 최후의 승자는 나다.
"태후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이···. 총리대신께서 대신 말씀해주세요."
헛기침을 하며 위안스카이는 앞으로 나갔다.
"태후께서 고심 끝에 큰 결정을 내리셨소. 황실의 보존을 위해서 공화 체제로의 이행밖에 길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소이다."
"마마, 그게 정말입니까?"
융유태후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대신들이 술렁였다.
위안스카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본관은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태후 마마의 말씀을 받들어 따르고자 하오.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공화정 이후에도 황실의 대우가 지금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오. 황제 폐하는 그대로 자금성에 머무시고 황실의 종친들도 적절히 합의된 지위를 보장받아야 하오."
만족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미 뇌물을 먹인 몇 명은 잠잠했지만, 상당수는 거세게 반발하였다.
"위안스카이! 감히 네놈 따위가 태후 마마를 앞세워 폐하의 퇴위를 요구하는 거냐!"
"그럴 리가 있소. 본관은 그저 황실의 안위를 염려할 뿐이오."
"흥! 네깟 놈의 헛소리는 듣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를 지휘하고 있어야 할 저 장수들과 함께 나타난 저의는 뭐란 말이냐! 조정에 무력 시위라도 하겠다는 거냐?"
염정대신(鹽政大臣)이 삿대질을 했다.
위안스카이는 반박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린 음성이 그를 비호하고 나섰다.
"정말이에요, 지금은 떳떳한 듯 참고 있지만 총리대신은 제 앞에서 눈물까지 흘렸는걸요. 그의 황실을 위한 마음은 진실이에요. 그러니 우리 여기서는 서로 비난하지 말고 장차 폐하를 위한 최선의 앞날을 논의해 봐요."
융유태후의 말에 대신들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속여넘겼을 줄이야.
군 지휘관들이 동석한 채 어전회의가 계속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가 가져온 신문들을 꺼내 보였다.
"이걸 보시오. 상하이의 외국인 상인들이 건의문을 올렸소. 구미의 열강들도 모두 황제의 퇴위를 원하고 있소. 황실의 편은 어디에도 없는 거요."
물론 열강의 의견 따윈 모른다. 죄다 뇌물을 뿌려 만든 건의문이다.
하지만 베이징의 자금성에 틀어박혀 평생 나태하게 살아온 만주의 귀족들.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식견 따윈 없다.
조금씩 회의가 진전되었다.
처음에는 절대로 항전뿐이라 떠들다가.
은근슬쩍 만약을 가정하고 공화정이 되었을 경우 상황을 예측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그러다 종래에는 어느새 공화정은 기정사실로 되고 어떻게 하면 만족의 이권을 더 챙겨올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가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철저히 굽실댔다.
아무리 화가 차올라도 참고 또 참았다.
그 덕에 어전회의를 나왔을 때 그는 혁명 정부와의 협상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황제의 퇴위는 결정되었다.
남은 것은 혁명 정부와 이견을 조율하는 것뿐.
이제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설 것이다.
행동을 같이하던 지휘관들도 각자 위치로 돌아가고 둘만 남게 되자 돤치루이가 속삭였다.
"한고비는 넘겼지만, 또 한고비가 남았군요. 혁명파는 워낙 난폭한 놈들이니 협상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뭘 모르는구나."
"예? 무슨?"
"협상은 이미 끝났다. 조건도 거진 맞추었지. 도장만 찍으면 끝나는 상황이다."
"아니, 언제 끝내신 겁니까? 저도 몰랐는데."
위안스카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네가 한커우에서 고생할 때 진행된 사안이니 몰랐을 거다. 난징의 쑨원과 꽤나 많은 필담을 나누었지."
"쑨원이 뭐랍니까?"
"간단하다. 서로 조건을 하나씩 요구했고 이해 사항이 맞아떨어졌지. 이로써 나는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될 거다."
"그게 각하의 요구조건이었군요. 쑨원의 조건은 뭐였습니까?"
"난징을 수도로 해달라더군."
돤치루이가 깨달았다는 듯이 경호성을 질렀다.
"그럼 난징에서 일부러 병력을 철수하라고 하셨던 것도···. 병력이 빠지자마자 혁명군이 곧바로 난징을 점령하였던 것도···."
"그래. 합의한 사항이다."
"난징이 수도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좋지 않겠군요."
"북양군의 지지기반이 베이징이니 그 힘을 약화하려는 수작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일단 대총통 자리에 오르고 나면. 수도 이전 따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대충 뭉개면 그만이야."
"과연 현명하십니다."
위안스카이는 천천히 자금성을 뒤돌아봤다.
타들어 가는 석양이 찬란한 금빛 지붕에 부서지며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머지않았다. 곧 자신의 것이 된다.
***
쑹자오런이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왔을 때, 나는 이미 소식을 받아본 뒤였다.
"황제가 퇴위한다고 합니다!"
"들었습니다."
"분명 기쁜 소식입니다만, 저는 용납할 수 없군요. 쑨 선생은 동맹회에도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일을 감행했습니다. 아마 만족 황실에 상당한 이권을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했을 테지요. 이건 이제 막 태어난 혁명 정부에 시작부터 오점을 남기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황실이 아닙니다."
"그럼?"
"위안스카이."
지금 시점에서 황제의 퇴위는 혁명 정부의 시작이 아니다.
위안스카이를 영수로 한 북양 정부의 시작이다.
"상당한 수준의 야합이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난징을 그리 쉽게 공략했을 때부터 수상했으니. 진정으로 이권을 보장받은 것은 황실이 아닌 위안스카이입니다."
"서, 설마."
"곧 알게 되겠지요. 동맹회가 위안스카이를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민다면 무조건입니다."
"어렵게 되었군. 쑨 선생의 난징 정부가 청조와 결탁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한다면 우리로서는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두 갈래 길이 있다.
첫 번째는 후베이성 정부를 끝까지 유지하며 군벌 세력화하는 방법.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너무 섣부르다.
중요한 것은 명분.
혁명의 구호는 멸만흥한이었다.
만조가 사라지고 통일 정부가 들어서는데 거기서 독자행동을 했다가는 전 중국을 적으로 돌리게 될 터.
여기서는 두 번째 길이다.
일단 협력하는 척하면서 뒤통수를 친다.
나는 쑹자오런을 보고 말했다.
"우리도 합류하지요. 중화민국 정부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참모장께서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밀실 야합으로 세워진 정부라고. 저는 갈 수 없습니다."
"그 정부를 우리가 집어삼키면 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돌아가는 꼴을 보니 대총통은 이미 위안스카이로 내정된 듯한데."
"대총통은 주지요. 우리는 총리를 노립니다."
머리 좋은 쑹자오런이 눈을 번쩍 떴다.
"그 말은 중화민국의 정부 형태를 의원내각제로 만들자는 거군요."
"위안스카이는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자이지만 법률 공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중화민국의 임시 헌법 제정권을 손에 넣어 의회를 조직하고 위안스카이를 식물 대총통으로 만드는 겁니다."
"좋아, 좋습니다! 정치공세만으로 대적을 패퇴시킨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군요. 그건 제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저만 믿으세요."
쑹자오런은 당장 임시 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며 사라졌다.
확실히 이 일에 있어 그보다 잘 해낼 사람은 없다.
문제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치 공세는 그저 날 죽여 줍쇼 하고 날뛰는 꼴일 뿐이라는 거지.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쑹자오런은 그렇게 죽었다. 바로 다음 해에.
창문 너머로 바삐 뛰어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 말라고, 친구.
이번에는 죽게 놔두지 않을 거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