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08)

마지막 황제2 (수정)

 자금성의 태화전.

 넓디넓은 광장이 오늘은 문무백관으로 가득 차 있다.

 샛노란 금빛의 황룡기(黃龍旗)가 펄럭이고 갖가지 복색을 입은 고관대작이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모르는 서양인이 보았더라면 대단한 경사가 있나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광장의 외곽에서는 서양식 의복을 차려입은 자들이 무질서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기이한 광경.

 광장의 중앙에는 변발한 관리들이 머리를 땅바닥에 박아대며 대성통곡을 하는데.

 가장자리에서는 팔짱을 낀 양복쟁이들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고 희희낙락한다.

 나는 광장의 외곽에 속해있었다.

 혁명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다.

 중국동맹회의 삼인방인 쑨원, 황싱, 쑹자오런부터 해서 리위안훙과 같은 지방 군정부의 도독들, 지휘관들까지 모두 모여 황제의 폐위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융유태후가 황제를 안고 등장했다.

 청조의 관료들이 일제히 무릎 꿇었다.

 광장에 비통한 울음소리가 넘쳐흘렀다.

 그 가장 앞에 위안스카이가 있었다. 누구보다도 목놓아 우는 그의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가슴이 절절해질 정도였다.

 여섯 살배기 꼬마 황제 푸이.

 자신의 앞에서 슬프게 울어대는 노인들에는 아무 관심 없다.

 대신 귀뚜라미통을 만지작거리며 태후에게 칭얼댈 뿐이다.

 한바탕 울음바다가 그쳤다.

 위안스카이가 주섬주섬 조서를 꺼냈다.

 조금 전까지 꺼이꺼이 우는소리를 하던 관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위안스카이의 움직임에 시선을 집중했다.

 방금의 눈물은 일종의 관례였던 걸까.

 한 나라가 망국할 때 이 정도의 통곡이면 족하다 여긴 모양이다.

 "본관은 청나라의 내각총리대신으로 오늘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나 결코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오늘을 통해 중국은 한 마리 용이 되어 비상할 수 있음이니, 구차한 언어는 그만두고 조서를 읽겠다."

 위안스카이가 느릿느릿 퇴위 조서를 낭독했다.

 조용한 광장에 황제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함께 울려퍼졌다.

 "이로써 황제는 퇴위하지만, 황실은 소조정(小朝廷)으로 남는다. 다음은 퇴위 후, 황제의 우대 조건에 관한 사항을 읽겠다."

 두 번째 낭독까지 끝나자 태후가 퇴위 조서에 인장을 찍었다.

 이로써 진시황 이래 수천년간 이어지던 황제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퍽 초라한 결말.

 폐위식이 끝나자 썰물처럼 관료들이 빠져나갔다.

 그 대열의 맨 앞에는 위안스카이가 있었다.

 황제를 졸졸 따르던 관료들이 이제는 위안스카이를 쫓아다니는 형국이었다.

 "분명 이날을 그토록 기다려왔건만,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는 않군요."

 쑹자오런이었다.

 저 멀리서 통의 귀뚜라미를 꺼내 장난치는 황제가 보였다.

 나는 무심하게 말했다.

 "한때 강대했던 제국의 몰락을 지켜보는 일은 그 제국이 선했든 악했든 씁쓸한 법이니까요."

 "그렇지요. 하지만 우린 갈 길이 바쁩니다. 쓸데없는 동정 따위는 사치. 황제는 거꾸러졌으니 이번엔 대총통을 거꾸러뜨리러 가봅시다."

 쑹자오런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바로 따라가지 않고 자금성의 경내를 좀 더 바라보았다.

 문득 황제가 손에서 귀뚜라미를 놓쳤다. 

 귀뚜라미는 팔딱팔딱 달아나고 황제는 그 뒤를 쫓았다.

 광장을 방방 뛰던 귀뚜라미의 점프가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의 발치에서 멈췄다.

 사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귀뚜라미를 짓밟아버렸다.

 그 광경을 본 황제가 울음을 터뜨렸으나 아무도 신경 쓰는 이 없었다.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귀뚜라미를 잡아먹은 뱀의 눈. 천치메이였다.

 도쿄의 밤바다 이후, 2년 정도 되었나?

 천치메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나도 똑같이 까딱했다.

 "후베이군 총참모께서 작전실에 안 있고 베이징이 웬 말인가?"

 "그러는 상하이 도독은? 혁명에 개입하려는 열강들이 외교 대사를 보내 상하이가 북적인다던데. 여기서 한가롭게 귀뚜라미나 잡고 있어도 되는 건가?"

 "어이쿠. 내가 말을 잘못했군. 이봐, 한신. 혁명은 성공했고 우리가 다툰 건 옛일일 뿐이야. 서로 성가시게 굴 필요는 없잖아. 나는 그때 다툰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판이라고."

 "내가 널 총으로 쐈었지. 몇발 맞췄었는데 멀쩡해 보이네."

 천치메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아픈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말을 들으니 기억이나. 가슴에 흉터가 크게 나서 비 오는 날이면 삭신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후들거리곤 하지. 너는 아까워할 필요 없어. 나는 충분히 고통받았으니까."

 "사과는 안 한다."

 "그래. 어차피 나도 널 죽이려 했었으니 피차일반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번 구성될 내각에 들은 정보 있나?"

 "노리는 게 있나 봐."

 그의 눈이 번뜩였다.

 "딜을 하자고. 중화민국의 장관 자리는 총 열 개. 혁명파에는 다섯 개가 할당되어 있다. 그 다섯 개를 난징 정부와 후베이성 정부가 나눠 가지는 거야."

 "알아."

 "이쪽에 네 개를 넘겨라."

 "어림 없는 소리. 그럼 후베이 정부 쪽엔 뭘 해줄 건데?"

 "부총통 자리를 넘겨주지."

 부총통?

 특별한 실권은 없는 자리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메리트가 있다.

 바로 대총통에게 불의의 상황이 닥쳤을 때, 그 권한대행자라는 것.

 그에 비하면 장관 자리의 개수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불의의 상황이라는 건 만들기 나름이잖아?

 "후베이성 정부에서 부총통이 나온다면 그쪽의 대장은 뭔 감투를 먹으려고?"

 "대장?"

 "쑨원 말이야."

 "흐. 선생님은 우리 같은 시정잡배와는 결이 다른 분이다. 명리에 담백하여 그깟 감투 욕심따위는 옛적에 초월하신 분이지. 몇 가지 공무를 맡아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으실 거다."

 "좋아. 다만 조건이 있다. 이쪽에서 원하는 장관 자리가 있어."

 천치메이가 반색하며 말했다.

 "뭔데? 육군부만 아니라면 좋다."

 "사법부."

 "사법부?"

 "쑹자오런은 중국 최고의 법률 전문가다. 네 말대로 혁명은 성공하였으니 앞으로는 더 나은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지."

 천치메이는 내 말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눈알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이야. 오케이. 사법부장관은 쑹자오런."

 "딜."

 회의장도 아닌 자금성의 담벼락 앞에서 내각의 한 자리가 결정되었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였다.

 쑹자오런을 사법부장관에 앉혀 임시 헌법을 제정하는 것.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천치메이와 손을 맞잡았다.

 억센 힘이 느껴졌다. 뼈를 부술 것처럼 천치메이가 손아귀를 말아쥐었다.

 나는 조용히 왼손을 가슴 품으로 집어넣었다.

 "항복. 항복. 쏘지 마!"

 ***

 며칠 후.

 자금성 근처의 정원. 중난하이(中南海).

 회의에 참석할 인원들이 속속들이 배석했다.

 잔잔한 호수를 가만히 지켜보는데 옆에서 리위안훙이 자꾸 보챘다.

 "이게 맞는 거냐? 아무래도 나는 모르겠다."

 "어젯밤 다 동의하셨잖아요."

 "어젠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지. 방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 또 불만입니까. 대총통이 아니라 부총통이어서? 말했잖아요. 차근차근 올라가면 된다고. 한 번에 높이 뛰려다가는 장대에 걸려 거꾸러진다니까요."

 "그게 아니야. 부총통만 해도 감지덕지하지."

 "그럼 뭐가 문젭니까?"

 리위안훙이 불안한 듯 입술을 핥다 말했다.

 "나는 부총통. 너는 후베이성 도독이 원래 이야기였지."

 "그쵸."

 "그런데 네가 후베이 도독이 되면 너는 우창에 머물게 될거잖냐?"

 "당연히."

 "그럼 나는 어떡해?"

 "뭘 어떡합니까?"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떡하냐고!"

 마지막 말은 제법 커서 주위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얼굴이 붉어진 리위안훙이 다시 속삭였다.

 "여기 베이징은 복마전이야. 이 마귀들 틈바구니에서 너 없이 나 혼자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지가 않다."

 "쑹자오런이 같이 있을 겁니다."

 "그놈이 어떻게 널 대신하겠나. 너는 국사무쌍의 한신에 비견되는 전략가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내가 잘 알아."

 이건 뭐. 사랑 고백이야?

 전투할 때 코빼기도 안내밀었으면서 가까이서 지켜보긴 개뿔.

 "어린애도 아니고 징징대지 마십시오."

 "그, 그래도···. 네가 없으면···."

 "정 그러면 가끔 부총통의 권한으로 도독을 초빙해 모시던지요."

 "좋은 생각이야. 역시 전략의 천재답구나!"

 리위안훙과 떠드는데 올백 머리를 한 남자가 싱글벙글 다가왔다.

 입헌파의 수장 량치차오. 얼마 전 귀국한 참이었다.

 "전략의 천재, 한신 참모장!"

 뭘 자꾸 전략의 천재래.

 그래서 듣기 싫은가? 아니, 그건 아니야.

 짜릿해. 항상 새로워.

 "량치차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학생티가 났었는데···. 불과 몇 년 만에 수만의 군대를 호령하는 장군의 면모가 보이는구려."

 "과찬입니다."

 "그거 아시오? 온 세상 사람들이 한커우의 선전에 경악할 때 나는 혼자 놀라지 않았다오. 참모장께서 우한에 계신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소."

 한동안 량치차오의 찬양을 묵묵히 들어야 했다.

 항상 짜릿하지, 물론.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을 말해도 되오? 윈난성의 차이어가 자네를 꼭 만나고 싶어 했는데 거절했었다고 들었소. 내게 소개장까지 부탁해 갔던 바인데···."

 "거절했다기보다는 시기가 맞지 않아 만나지 못한 거지요. 조만간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길 빌겠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위안스카이가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나타났다.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위안스카이 쟁탈전의 승리자는 쑨원이었다.

 쑨원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위안스카이와 어깨동무를 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지난 며칠간 꾸준히 만남을 갖더니 위안스카이에게 홀딱 빠진 모양이었다.

 배석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위안스카이가 단상에 섰다.

 "오늘 이렇게 천하 영웅분들이 이 자리를 찾아주시니 이 사람이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오히려 대총통께서 고생하셨습니다!"

 "우와아! 대총통 위안스카이 만세!"

 위안스카이의 가벼운 인사에 화답하듯 문무백관들이 소리 질렀다.

 어제는 황제를 위해 눈물 흘리던 자들이 오늘은 대총통을 위해 웃음 짓고 있었다.

 "허허허, 제가 대총통이라니요.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자리는 정식으로 중화민국이 출범하기 전, 정부 구성의 방향을 잡아보려는 회의입니다. 그럼 동석하신 분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볼까요?"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는 말이 끝난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위안스카이는 약식으로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내각의 주요 요직들도 속전속결로 결정되었다.

 미리 치열한 물밑작업을 거친 터라 결정된 사항을 안건에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부총통에 리위안훙.

 사법부장관에 쑹자오런이 임명되었다.

 천치메이는 산업부장관이 되었고 외교부장관은 량치차오였다.

 의견 충돌이 있던 곳은 육군부장관이었다.

 중화민국이 출범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불안한 정세.

 군권을 누가 틀어쥐느냐는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황싱이 어떻소? 후베이성 군정부의 혁명군에서 함께 싸웠고 이후에는 상하이로 건너와 난징을 함락하는 대공을 세웠소."

 "황 선생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우한의 전쟁은 황 선생보다는 리위안훙 장군의 공이 크다고 사료되오. 게다가 육군부의 병력 대부분은 북양6진의 군대인데 기존에 잘 통솔해왔던 사람이 맡는 것이 적당하지 않소?"

 "누굴 추천하시오?"

 "돤치루이요."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의견이 처음으로 엇나갔다.

 양 세력이 서로 눈치를 보는데 의외로 쑨원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하하. 그렇게 하시오. 아무렴 나보다는 군에 오래 몸담으셨던 선생께서 더 잘 아시겠지."

 "걱정 마시오. 황 선생은 난징 유수로 봉해 혁명군의 재편을 맡길 테니. 그쪽이 황 선생도 훨씬 일하기 편하실 거요."

 "명석한 결정이오!"

 이외에도 위안스카이는 이것저것 이유를 대며 요직에 자신의 심복을 앉혔다.

 그때마다 쑨원은 박수를 치며 위안스카이의 결정에 탄복할 뿐이었다.

 결국 혁명파는 내각에서 상당한 손해를 봐야 했다.

 약속된 다섯 자리 중 네 자리밖에 못얻었으며 그것도 죄다 한직이었다.

 안건이 지방관으로 넘어간 후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다음은 후베이성 도독 문제요. 리위안훙 장군은 부총통으로 가시니 자리는 비워질 터. 추천하는 사람이 있소?"

 "왕잔위안 장군을 추천하오. 후베이성 출신으로 실전경험이 뛰어난 자요."

 "좋소."

 그래왔듯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멋대로 결정을 내리려는 찰나.

 "잠깐!"

 "왜그러시오? 장군."

 "내 후임이니 추천은 내가 해야겠소. 후베이성 총참모로 재직 중인 한신을 추천하오."

 어이어이. 리위안훙.

 믿고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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