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3
"한신?"
위안스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기억이 났는지 손뼉을 쳤다.
"들은 적이 있소. 리위안훙 장군을 보좌하여 한커우 전투를 이끌었다지, 아마?"
"그렇소. 세간에는 마치 내 주도하에 대승리를 거둔 것처럼 알려져있지만 실제 주역은 한신 총참모요."
"특별한 흠결만 없다면 반대할 이유는 없겠소만···."
말을 마치기 전에 뒤에서 누군가가 귓속말을 했다. 돤치루이였다.
위안스카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하, 회의 중에 죄송하오. 후베이성은 이번 혁명에서 가장 격전이 많았던 지역이니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겠소."
"무슨 말이오?"
"몇 가지 결격사유가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소."
"어떤 사유?"
"그자, 조선인이오?"
리위안훙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얘기는 물어뜯기 좋아하는 자들이 떠드는 얘기일 뿐, 한신은 이미 태어나길 광둥성 출신이오. 어려서부터 홍콩의 소학교를 다녔으며 조선 땅은 밟아본 적조차 없소."
"그래도 핏줄은 조선 민족이잖소."
"게다가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가서 이미 사관생도 시절부터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 활동을 해왔고, 임관 후에는 우창의 봉기에 초기부터 참여하였으며 한커우의 승리에도 기여한 공이 있소. 이런 인재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소?"
잘한다. 우리 형.
예상 질문을 뽑아 답안을 작성하고 반복 숙달한 효과가 빛을 발한다.
역시 연습이 최고라니까.
리위안훙의 단호한 발언.
위안스카이의 뒤에서 돤치루이가 다시 중얼거렸다.
속삭임을 들은 위안스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 외에도 문제가 많소. 나이가 지나치게 어린 점은 차치하더라도 한커우 전투 과정에서도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돈다고 하오."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요?"
"전쟁은 참혹한 것이지만 그 안에도 최소한의 인의와 도(道)라는 게 있소. 한신이라는 자의 전쟁은 그런 도의를 벗어나 목불인견(目不忍見)으로 악독했다더군."
"어···. 그런 얘기는 잘 모르겠는데."
예상 리스트에 없던 질문이 나오자 리위안훙이 버벅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불과 몇 달 전까지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던 사이지만, 중화민국의 미래를 위해 이곳 한자리에 모였소.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학살을 저지른 자까지 포용하고 가기는 어렵소. 한커우에서만 화북의 젊은이 오천이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죽었다오. 그 외에도 갖가지 잔악한 행위들에 대한 증언이 쏟아지고 있소."
"음···. 그런 일이 있었소?"
아니, 뭐하냐고.
그런 일이 있었소? 이러고 있네.
나는 조용히 리위안훙에게 다가가 귓속말했다.
"제게 넘기세요. 제가 말하지요."
땀을 찔찔 흘리던 리위안훙이 반색했다.
"그러지 말고, 여기 당사자가 왔으니 직접 인사 청문을 하는 게 좋겠소. 후베이성 총참모 한신이오."
"안녕하십니까. 한신입니다."
위안스카이가 눈을 위아래로 깔며 내 행색을 훑었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것과 같은 어린아이의 눈이었다.
"자네가 한신이로군. 혁명에 기여한 공은 인정하지만 한 성의 도독은 아직 일러. 경험을 더 쌓고 오게나."
"돤치루이 장군과 몇 가지 사실관계에 확인 작업을 거치고 싶은데 이 자리에서 가능하겠습니까?"
내가 아랑곳않고 돤치루이를 호출하자 위안스카이의 눈살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고민하던 위안스카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돤치루이에게 손짓했다.
"돤치루이요. 하실 말씀이 뭐요?"
"한신입니다. 전장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여긴 또 새롭군요."
"용건이나 말하시오."
"제가 저질렀다는 잔악한 행위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돤치루이가 코웃음 쳤다.
"소문이 있소. 후베이성 제8진 장뱌오 장군을 저격하여 사살한 것이 당신이라는."
"그게 문제가 됩니까?"
"그럼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살인이 정당하다는 것이오? 전쟁에서 살인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최소한의 협의까지 저버리는 건 다른 얘기요. 장뱌오 장군은 오랫동안 군에서 복무한, 당신보다 훨씬 큰 어른이신데 멀리서 허무하게 목숨을 앗아가다니. 대체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어디 있단 말이오?"
"아하. 장유유서라."
"게다가 당신의 병사들은 한커우 공방전 내내 땅굴을 파고 그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소. 그건 정정당당과 직상직하(直上直下)로 일컬어지는 병사의 덕목이 아니오.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리고 당신의 병사들은 그 겁쟁이들에게 죽어 나갔고.
나는 배석한 인물들의 면면을 훑었다.
위안스카이와 쑨원, 량치차오와 리위안훙, 천치메이에 쑹자오런. 거기에 북양군의 지휘관과 각 성에서 올라온 지방관들까지.
중국을 떠받드는 유력자들이 한데 모인 자리.
홀연히 단을 박차고 섰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중국은 깊습니다. 그 역사를 관통하는 사상은 유교. 여기서 춘추 시대 공자의 사상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유교는 국가사상으로 공인된 이래 지난 수천년간 턱없이 폭주하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병자)로 전락시켰다는 겁니다."
"동아병부라니! 말이 심하시오!"
"조선인은 내려와라!"
"감히 공자의 유학을 비판하는 거요?"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으나 상관치 않고 다시 돤치루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때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며 다른 나라들을 발아래 굽어보던 중국이 이렇듯 몰락한 연유가 어디에 있다 생각하십니까? 전쟁하는데 인의도덕을 찾다니. 저 구미의 열강들에 얻어맞을 때도 장유유서를 읊을 겁니까? '나이 든 아버지가 되어 자식뻘 되는 놈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 맞아주는 게 이기는 거다.' 와 같은 정신 승리나 하고 있을 거냐는 말입니다."
"···."
"중화민국의 기는 오색기(五色旗)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사상이 무엇입니까. 오족공화는 오대민족을 포함하여 어떤 민족이든 그 핏줄을 기반으로 한 차별에 반대합니다. 헌데 오늘 제 혈통을 두고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도 되기 전에 왈가왈부하는 목소리가 나오니 참으로 가탄스럽습니다."
여전히 돤치루이는 아무 말 않는데 쑹자오런이 손뼉을 쳤다.
"옳소!"
리위안훙이 따라 치자 하나둘씩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위안스카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우리 젊은 친구가 말솜씨가 아주 독하군! 쑨 선생의 생각은 어떠시오?"
발언권을 넘겨받은 쑨원은 굳은 표정이었다.
"후베이성 한신 참모장과는 일전에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잘 아는 사이요. 그가 방금 밝힌 소견에도 대체도 동의하는 바이고. 다만 중국을 동아병부로 지칭한 것에는 꼭 사과를 받아야겠소."
"···제 실수입니다. 감정에 휩쓸려 헛소리를 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참모장은 아직 어린 나이이니 실수는 할 수 있소.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귀관의 앞날에 중화민국의 미래가 함께하길 바라겠소."
대화를 듣던 위안스카이가 말했다.
"그럼 쑨 선생은 한신의 후베이성 도독 임명을 찬성하시는 거요?"
"그건 아니오. 그에게는 사상의 숙성이 필요하오. 그가 말했다시피 한족과 다른 민족이 평등한 것은 맞으나 중화를 위한 마음의 깊이까지 같은 것은 아니오. 어찌 됐건 만족의 압제를 몰아내고 혁명을 일구어낸 것은 한족. 한 성의 도독과 같은 높은 자리는 한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바르다고 보오."
"흠. 쑨 선생의 의견은 알겠소. 그렇다면 본관의 의견은···."
위안스카이가 말꼬리를 흐리면서 주변을 살피는데 돤치루이가 연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리위안훙은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입술을 쥐어뜯었다.
위안스카이가 하던 말을 끝맺었다.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오."
"무슨 소리요?"
"저자가 밝혔듯이 중화민국의 국기는 오색기요. 민족의 평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기이니 조선 민족을 고급 지방관 자리에 앉힌다면 큰 홍보가 될 거요."
"그렇다 하여도···."
위안스카이는 쑨원은 무시한 채 리위안훙에게 물었다.
"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당연히 좋소! 총통 각하의 말씀대로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에 큰 힘이 될 거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쑨원은 입맛을 한번 다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총통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위안스카이의 급작스러운 변심. 연유가 짐작은 갔다.
어쨌건 덕분에 도독이 되니 나는 개이득.
비로소 한 지역의 일인자가 되었다. 2만여 병사들의 군권이 손안에 들어왔다.
***
"대총통 각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놈이 쏴 죽인 북양군의 수가 오천이 넘습니다. 그런 놈을 어찌 도독 자리에 앉힌단 말입니까!"
회의가 끝나 사람들이 빠져나간 중난하이 정원.
돤치루이가 역정을 냈다.
반면 위안스카이는 심드렁했다.
"야, 돤치루이. 너는 모르는 거냐?"
"뭘 말입니까?"
"한신은 혁명파의 인물, 게다가 우창 봉기를 이끈 리위안훙의 오른팔이다. 그런 놈을 후베이성 도독에 추대하려는 건 혁명파로서는 당연한 계산이겠지. 그에 발맞춰 우리는 반대하고 말이야. 결국 정치 세력다툼이야. 그 과정에서 조선인이라든가 나이가 어리다든가 하는 건 핑계일 뿐이고."
"피, 핑계 아닌데···. 어찌 조선인을 도독에···."
"그런데 그저 허허 웃을 줄이나 아는 쑨원이 놈의 인사에 반대했단 말이야."
돤치루이는 여전히 어리둥절.
"그게 무슨 의미가···?"
"쑨원과 리위안훙 사이에 반목이 있다는 거다. 혁명파의 분열을 획책할 기회야."
"그래도 한신 그 자식은 하룻강아지 같은 게 전투에서도 야비하고 비겁한 수를 쓰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돤치루이. 모르느냐? 사람들은 북양삼걸이 대단하다며 떠들지만 나는 너를 북양파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러기 위해서 너는 화를 참고 감내하는 법을 배워야 해. 지금 당장은 한신이란 놈이 아니꼬울지 몰라도 후베이성은 본래 북양파의 거점. 지방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괄괄한 향신 세력을 그 어린놈이 무슨 수로 통치하겠느냐? 기다려라. 몇 달만 지나면 향신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테니."
돤치루이가 감격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알겠습니다."
"신경 써야 할 쪽은 난징 정부다. 쑨원은 단순하여 요리하기 쉬운 녀석이지만 그만큼 배알이 한번 수틀리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음이야. 수도를 난징으로 두지 않는다는 얘길 들으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혁명파를 분열시키려는 거군요. 자기들끼리의 세력다툼에 정신 팔려 다시는 봉기를 못 하도록 말입니다. 역시 혜안이 깊으십니다."
"오냐. 그러니 중화민국 정부가 출범하여 확실히 내가 대총통에 오르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위치를 지키도록."
"예!"
풍취를 즐기는 위안스카이를 두고 정원을 빠져나온 돤치루이는 생각에 잠겼다.
위안스카이를 따라 베이징에 가기로 결정된 이후 펑궈장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한신을 족쳐! 반드시!"
"그놈이 뭐 어쨌길래?"
진압군의 1군을 맡았던 펑궈장은 전쟁 내내 한신과 전선을 맞대었었다.
2군장인 돤치루이 자신은 허난성에 주둔하여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대치한 석 달 동안 나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수십을 침투시켰으나 돌아온 놈은 단 한명도 없어. 전투 때마다 적군의 생포를 시도했으나 모조리 실패하였지. 저 한커우의 평원을 뒤덮은 참호 아래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무슨 전술로 놈이 북양군의 대규모 돌격을 막아내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놈을 족치라고?"
"무슨 수를 쓰든 간에 한신이 요직을 차지하는 걸 막아. 놈이 성장하면 장래 북양파에 큰 위협이 될 거다."
"그러지."
알겠다는 대답에도 몇번이나 신신당부했던 펑궈장인데.
한신은 후베이성 도독으로 간다.
흥, 그깟 놈이 뭐?
돤치루이는 펑궈장의 말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대총통이 직접 말했다.
북양파의 후계자는 나라고.
게다가 총통의 말대로 지방 향신은 다루기 쉬운 놈들이 아니다.
이미 수 대 동안 일대의 거점을 장악하고 왕처럼 지내는 벼슬아치무리가 향신놈들.
후베이 출신도 아닌 조선인이 대뜸 윗자리에 부임한다고 순순히 따를 리가 없다.
그래. 걱정할 게 뭐 있어.
나는 육군부장관이 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이 된다.
그런데도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돤치루이였다.
자꾸만 회의장에서 한신이 웅변하던 광경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신이란 놈이 후베이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군벌화한다면?
혁명파의 쑨원을 잡으려 먹이를 준 토끼가, 용이 되어 도리어 베이징의 북양파를 집어삼킨다면?
문득 펑궈장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놈은 악마다.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거야."
흥, 개소리.
돤치루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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