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 해체 쇼
멀리서 아는 동생이 보였다.
허옌(何言)은 살짝 손을 들어 보였다.
"이제 오는가."
"예, 형님."
둘 다 가마에 올라탄 덕에 서로 눈높이가 맞았다.
"저는 형님은 안 오실 줄 알았슈."
"내가 왜?"
"제깟 놈이 도독이랍시고 어디 감히 우리를 오라가라 호출하는데, 괘씸하잖슈."
"그래도 신임 도독이 잔치를 열어 향신들을 대접하겠다면 얼굴은 보여주는 게 진사(進士, 과거 시험 합격자)된 도리지."
"에이···. 흐흐흐. 그게 아니라 도독 놈을 초장에 길들이려는거잖요? 모르는 사람은 형님의 사람 좋은 웃음에 깜박 넘어가지만 내가 벌써 형님을 알고 지낸 지 사십년이요. 형님의 수완은 장강 일대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으요."
허옌은 피식 웃으며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허, 무슨 말인가. 말했듯이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후베이성의 도독을 보러 가는 거라네. 물론 도독의 방침이 나와 맞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신임 도독이 형님의 눈 밖에 나지 않기를 빌어줘야 겠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꽤 넓은 장원.
담장 밖에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와 향긋한 음식 냄새가 전해져 왔다.
"오호."
대문에 들어서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치라면 평생 즐겨왔던 허옌인데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급비단으로 바닥을 깐 실내에는 곱게 색을 갖춰 입은 무희(舞姬)들이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고.
주방에서 풍겨오는 오향장육(五香醬肉)의 진한 간장 냄새에 코가 절로 찡긋거렸다.
그때, 안에서 훤칠한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더니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후베이성 도독으로 부임한 한신입니다. 초임이라 모든 것이 서투르니 아무쪼록 경험 많은 어르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옌은 말없이 같이 온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예상외의 환대.
요즘 혁명이랍시고 설치는 젊은 놈들을 보면 어른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데 이놈은 좀 달라 보였다.
"허옌일세. 간편히 허 진사라고 부르면 되네."
"아니요.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허 선생님으로 공대하겠습니다."
반응을 보려고 대뜸 하대했는데도 신임 도독의 반응은 공손했다.
장유유서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시대일진대.
흠, 제법 괜찮은 놈인가?
허옌이 자리에 앉자 풍악이 울리며 본격적으로 잔치가 시작되었다.
후베이성의 향신들을 한데 모은 자리.
도독 한신은 오는 사람마다 극진히 대접하며 정무의 조언을 구했다.
허옌도 몇 마디 덕담을 해주었다.
가슴에 고이 간직하여 신조로 삼겠다는 도독의 말은 다소 과한 듯도 했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새 잔치는 도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화술과 비위 맞추는 솜씨는 대단하여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리는 일 없이 화기애애하였다.
다만 허옌은 약간 떨어져 앉아있었다.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았을 때, 신임 도독이 생각 외로 싹싹한 놈이란 건 좋은 신호.
그러나 어디까지나 서로의 경계선 안쪽에서 경제적 관계가 없을 때 이야기다.
선을 넘어 향신 세력의 이권을 침탈하려 들 경우에는 단단히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이번에 부임한 후베이성 도독은 혁명파에 조선인.
아무 연고도 없는 새파란 젊은 놈에게 머리 굵은 관료들이 바로 복종한다면 그게 더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미 상당량의 금을 뿌려 후베이성 관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허옌이었다.
군부대의 장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베이성 두 개 사단의 두 장군 모두 자신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임 도독은 군에 간단한 명령 하나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어느덧 잔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도독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신입니다. 이 자리에 어려운 발걸음 해주신 선생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도독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자 손뼉이 터져 나왔다.
"오늘 각지의 유수한 분들께서 한자리에 모이셨으니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그간 후베이성에서 복무하며 인상 깊었던 것은 끝없는 장한(江漢) 평야와 장강 일대의 비옥한 곡창지대입니다. 후베이성은 중국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해있으며 저 제갈공명도 가장 먼저 형주(荊州, 지금의 후베이성)를 차지해야 한다고 설파했을 만큼 천하의 요충지입니다."
나이 지극한 향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후베이성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토박이들.
그러니 후베이성의 중요도를 강조하는 말은 그들의 입맛에 딱 맞게 달콤했다.
"허나 조정에서는 그만한 대접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수백 년간 후베이성은 토지세를 가장 많이 낸 지역 중 하나였으나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토록 성실히 조세를 납부하였더니 잘하는 놈 떡 하나 더 주기는커녕 조정은 호구 잡은 것처럼 수탈에만 열을 올립니다. 이게 정녕 맞습니까?"
강경한 발언에 향신들이 호응했다.
"어유, 말 한번 잘했다."
"세금이 너무 많아."
"후베이성은 차별받고 있다!"
자리에 모인 향신들은 대부분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니 토지세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도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중앙정부의 가장 흔한 수법은 토지의 질과 양을 멋대로 결정하여 토지세를 부풀리는 겁니다. 여기 계신 지주 여러분들도 몇번이고 당해보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맞아, 맞아.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후베이성의 근간은 수 대 동안 농작에 힘써오신 여러분 어르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신임 도독으로서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은 토지 정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공헌해오신 분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허옌은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주 훌륭한 청년.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이다.
어른의 가려운 곳을 찾아 긁어줄 줄 안다.
"마침 지주분들이 한자리에 모이셨으니 제게 토지대장을 가져다주시면 검토하여 중앙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겠습니다. 다시는 토지를 두고 장난질 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고마운 소리군!"
향신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허옌도 한마디 했다.
"우리 도독이 아주 바르게 컸어."
흥겨운 분위기 속에 잔치가 계속되었다.
향신들은 청주를 기울이며 하인으로 하여금 토지대장을 가져오게 시켰다.
허옌도 마찬가지.
잔치는 밤까지 계속됐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난 허옌은 찌뿌둥한 몸을 움직여 마당으로 나갔다.
어제 잔치의 여파가 상당했다.
"가볍게 산책이나 하고 올까."
밖으로 나가려던 허옌은 대문에서 멈추어 섰다.
군복을 갖춰 입은 험상궂은 병사가 자신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너 뭐야? 뭔데 여기 서 있어?"
"직무수행 중입니다."
"나 누군지 몰라? 비켜."
"직무수행 중입니다."
"너 누구야? 무슨 권리로 출입을 막아? 나중에 어떻게 되려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허옌의 협박에도 병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허옌은 자는 향신들을 다그쳐 깨웠다.
"일어나! 다들 일어나라고!"
"아, 잘 자고 있었는데···. 형님, 왜 그러슈."
"뭔가 이상하다. 우리는 지금 장원에 갇혔어."
하나둘씩 상황을 공유한 향신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총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원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평생 이런 수모를 당해본 적 없는 향신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데.
저벅저벅 신임 도독이 나타났다.
"이보게, 한신!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병사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네! 어서 도독의 권한으로 저들을 쫓아내 주게!"
"병사들이요?"
"그렇다네. 어서!"
향신들이 닦달했으나 도독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제야 허옌은 깨달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두게, 다들. 우리를 가둔 자가 바로 도독이야."
어젯밤 잔치에서 지나치게 친해진 탓일까.
향신들은 믿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했다.
"허어! 그럴 리가."
"분명 한신 도독은 후베이성 지주들의 구원자였는데···."
하지만 향신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도독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병사를 부른 사람은 제가 맞습니다. 군 통수권자인 제가 여기 있는데 병사들이 함부로 움직였을 리가 있습니까? 저들은 나의 명령을 받고 장원을 봉쇄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허옌이 물었으나 도독은 말없이 걸어가 어제 잔칫상이 차려졌던 기다란 상 앞에 앉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병사들이 낑낑거리며 문서 더미를 들고 왔다.
허옌은 문서 더미의 정체가 전날 밤 제출한 향신들의 토지대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제 예고한 대로 지금부터 후베이성 토지제도 정상화에 들어갑니다. 리페이양, 장부를 건네라."
"예!"
도독이 향신들이 제출한 문서를 하나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신양현(新陽縣) 허옌의 논전. 상등급이 서른 갑(甲)에 중 등급이 서른 갑이다. 헌데 상등급으로 일괄 적용하여 지난해 토지세만 오백석 넘게 냈군. 시정하면 토지세는 삼백석대로 줄어들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허옌에게 좋은 말처럼 들렸으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런데 장부를 보면 지난해 거두어들인 토지세 오백석 중 절반 이상은 소작인들에게 부과되었다. 토지세는 어디까지나 지주에게 부과되는 조세. 소작을 볼모로 토지세를 농민들에게 전가하는 행위는 중화민국 농림법에 어긋난다."
허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독을 노려보았으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사유지의 경계가 모호한 점을 빌미로 하여, 소작인의 토지를 지대(地代) 명목으로 강탈한 정황이 있으니 이는 차후에 면밀히 조사해야 할 사안이다. 또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에서 임노동이 아닌 농노 수준으로 착취한 사례가 곳곳에 발견된다. 즉시 계약 관계를 새로 하고,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도 소작료를 소급 적용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치부가 속속들이 폭로당하는 느낌.
저놈에게 토지대장을 건네는 게 아니었다.
허옌은 어제의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으나 도리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자신의 토지가 소작인들에게 분할되고 재산이 뜯겨나가는 광경을 감내해야만 했다.
허옌은 시작에 불과.
장원에 모인 향신 서른 한명의 토지대장이 예외없이 낱낱이 분석되고 까발려졌다.
향신 한 명의 장부를 해치울 때마다 도독은 병사 몇 명을 밖으로 내보내 공무를 집행하였다.
장원에 갇힌 향신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독은 앉은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읽고, 해석하고, 명령하기를 반복하였다.
무서운 집중력.
한나절.
후베이성에서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부를 쌓아온 지주 집단이 해체되는데 걸린 시간이 딱 한나절이었다.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 도독은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어르신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후베이성의 토지 제도와 거래 및 소작 현황은 제갈공명이 현신해와도 꼬투리 잡을 것 없이 깔끔해졌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몇분, 아니 대다수분들은 불법행위가 적발되어 조만간 다시 뵙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고작 몇 시간 만에 폭삭 늙어버린 향신 무리.
허옌은 활짝 웃으며 노인들을 배웅하는 도독이 밉살스럽게만 보였다.
"퉤!"
욕을 하기도 아까운 나머지 침을 뱉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허옌.
얼른 집에 돌아가서 도독 놈이 토지와 재산을 압류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놈은 후베이성의 군권을 아직 장악하지 못했다.
두 사단장은 자신의 편이니 도독이 움직일 수 있는 병사의 수는 한정적이다.
얼른 사병을 모아 저항하면 재산을 지킬 수 있을 터.
"뭐, 뭐야?"
하지만 돌아온 자신의 저택은 초토화되는 중이었다.
수백 명의 병사가 멋대로 곳간을 열어 귀중한 보물들을 털어가고 있었다.
"나는 신양현의 허 진사다! 분명 후베이성의 병사들은 오늘 움직일 수 없을 터인데, 너흰 어디서 나온 병사들이냐?"
"허 진사? 당신이 허옌이오?"
"이눔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웃어른의 이름을 부르느냐! 어디서 나온 병사들이라 묻지 않느냐!"
"우린 한신 도독님 직속의 독립특공연대요. 나는 연대장 샤즈광이니 문제가 있으면 나중에 따지시오. 각종 탈세와 불법 농지약탈 혐의로 당신을 체포하겠소."
독립특공연대? 그딴 건 들어본 적도 없는데?
끌려가며 병사들끼리 떠드는 소리를 들은 허옌은 이들이야말로 우창의 혁명이 시작되었을 당시 최초로 한신과 함께 봉기한 제18영의 병사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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