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개막
지역에 깊숙이 뿌리내린 후베이성 향신 세력의 해체 작업.
다소 급박한 작전이었으나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다.
내가 노린 것은 지주의 토지에 묶여 착취당하는 소작인들을 임노동자로 전환하는 일.
계약에 따른 임금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의식이 싹트기를 바랐던 것이다.
청조의 수백 년간 제대로 된 전수조사 한번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유지된 토지제도.
농업국가 중국에서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최선은 토지를 전면 몰수하고 재분배하는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거지만 이제 막 일개 성의 도독으로 취임한 내게 그런 권한은 없다.
북양정부의 대총통인 위안스카이라고 해도 토지 개혁은 쉽지 않다.
그만큼 수 대에 걸쳐 부를 축재해온 향신 세력의 뿌리는 깊고 튼튼했으니.
따라서 내 작업은 중화민국의 농림법을 바로 세우는 데 국한되었다.
향신들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딴지를 걸기에도 애매한 수준의 개혁.
나는 처음부터 오직 후베이성의 도독으로 법률에 의한 공무만을 집행했으니 향신들이 설사 중앙정부에 읍소한다 하여도 명분은 내 쪽에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합리와 이성은 떼쓰기 앞에 무용지물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들이 아침부터 내 집무실을 점거하고 있었다.
"도독! 향신들은 후베이성 지방 정부를 지탱하는 근본입니다. 그들과 적대하고서는 결코 정무를 이끌어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옥에 가둔 어르신분들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이쪽의 착오를 정중히 설명하고 예를 갖춰 보상하면 어르신들도 크게 문제삼지는 않을 겁니다."
중화민국의 새 군제에서 소장으로 명명된 두 사단장. 쌍으로 헛소리를 떠든다.
육군부장관이 직접 임명한 놈들이다. 돤치루이의 비호를 받으며 머릿속엔 사사건건 개길 생각밖에 없다.
"착오가 있었다고?"
"예."
"무슨 착오?"
놈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먼저 말하라는 듯 떠밀었다.
결국 1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타지 출신에 아직 어리신 도독은 잘 모르겠지만, 후베이성에는 후베이만의 관습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법에 따라 딱딱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도독도 좀 더 세상을 살다 보면 이해하게 될 테니.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물고기가 살지 못합니다. 묽은 듯, 검은 듯, 조화롭게 어울리며 맞추어 가는 것이 병법에도 옳습니다."
이 새끼 말하는 거보소. 대놓고 기어오른다.
그러나 나는 면박을 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두 장수는 세상 경험이 많으니 보는 시야도 넓겠어. 깜짝 놀랐다니까 정말."
자신의 이야기가 먹혀들어 간다고 생각했는지 2사단장이 끼어들어 떠들었다.
"수천년간 임야에 불과했던 땅을 시간과 품을 들여 개간한 것이 지금의 향신들입니다. 그 고된 작업을 어찌 욕심만으로 해냈겠습니까? 후베이성의 애향심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향신들이 지금껏 지주로서 어느 정도 이득을 본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그들이 없었더라면 전답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땅. 해악보다 이득이 많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소작농들은?"
"그 땅마저 없으면 당장 굶어 죽을 년놈들입니다. 오히려 땅을 빌려주는 것을 고마워해야지요."
말을 마친 2사단장이 자칫 오바했나 내 눈치를 보는데.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과연. 나도 그리 빡빡한 사람은 아니야. 지역의 어르신들과 완전히 척질 생각은 없어."
"아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좋아, 그럼 옥에 이야기해서 지금 바로 어르신들을 회관으로 모셔 와라."
"그러지요."
신이 난 사단장들이 나가자 나는 부관 리페이양을 불렀다.
"해체 쇼를 한 번 더 한다. 장부는 가져왔지?"
"예."
"샤즈광은?"
"연대를 이끌고 도독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좋아. 가자."
리페이양과 함께 회관에 도착했다.
내가 들어서자 향신들이 흠칫 놀라 사시나무 떨듯 떨어댔다.
향신 서른 명에 사단장 두 명.
도합 서른 두 명의 후베이성 토박이가 오늘의 청중이었다.
"지난 며칠간 고초가 많으셨습니다. 옥에 모신 건 다른 게 아니라 도독부에 숙사(宿舍)가 없어서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옛 총독부 건물이 넓고 좋았는데, 우창 봉기 당시 제 병사들이 포격으로 다 부셔 먹었던 게 아쉽게 느껴지는군요."
제법 친근하게 말꼬를 열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향신들의 표정은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너무 철저히 분쇄했나?
그간 법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부당행위를 시정할 때마다 옥에 갇힌 향신에게 빠뜨리지 않고 고해왔다.
사정을 보아준다고 했던 게 되려 그들에게는 실시간으로 재산이 공중분해 되는 순간을 중계하는 일이 돼버렸는지도.
"저기 앉은 두 사단장이 좋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어르신들께서 하신 일은 후베이성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고 오늘날의 후베이성 역시 어르신들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말이었지요. 저 역시 크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계신 분들의 생각도 그렇습니까?"
물었으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미 한번 크게 속은 탓인지 반신반의로 날 힐끗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사단장들이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그렇다고 믿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베이성의 도독으로 여기 계신 모든 분께 기회를 하나 드릴까 합니다."
"무슨 기회?"
"투자 기회입니다."
앞자리 노인의 반문.
분명 이름이 허옌이었지. 은연중에 향신 세력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자다.
"우리는 도독 덕분에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네. 투자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네. 도독이 다 갈취해가지 않았나."
"다 갈취했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옥에 가두고 병사를 시켜 곳간을 터는 것이 갈취가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다' 갈취하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아직 압류할 재산이 한가득입니다. 벌써부터 빈털터리라는건 너무 엄살이 심하십니다."
허옌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허옇게 센 머리를 양껏 굴리는 소리가 단상까지 전해져 왔다.
은닉한 재산이 들통났나 무섭지? 걱정 마, 아직 못찾았지롱.
장부에 적히지 않은 돈은 추적하기 어렵다. 방금은 그저 미끼를 던졌을 뿐이다.
그리고 일이 잘 풀린다면 허옌은 알아서 은닉한 돈을 내 앞에 대령할 것이다.
"자, 얘기를 마저 하면 여기 후베이성의 발전을 위해 심려하시는 여러분들을 위한 최고의 투자처가 있습니다. 바로 한양은행입니다!"
향신들의 얼굴이 어리둥절했다.
사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에 있는 후베이성의 전장(錢莊)들은 그 규모가 지나치게 작고 기업에 필요한 여신(與信)과 수신(受信) 업무에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베이성은 육로와 수로를 포함한 물류 교통의 중심지이며 한양병공창은 중화민국 최대 크기의 군수공장입니다. 가히 금융산업이 발달하기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지만 그에 걸맞은 상업은행의 설립은 지금껏 요원하기만 했습니다."
후베이성 근대화 열차 출발!
토지 다음은 은행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후베이성의 유지들께서 모이셨으니 분명 큰일이 일어나라는 하늘의 계시입니다. 현재 관에서는 여러분들이 부정 축재한 재산들을 압류 중에 있으나 그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행정력 또한 큽니다. 그러니 기회를 드리지요."
나는 향신들을 한바탕 훑었다.
다들 정신없이 내 말에 몰입해 있었다.
"부정 축재한 재산을 자진하여 출자하는 분들에 한하여 범법 기록을 말소해 드리겠습니다. 출자한 자금은 채권으로 돌려드리며 상환기간 3년에 이자는 1푼을 드립니다."
어떻게 보아도 손해 없는 제안.
웅성거리는 향신들로 회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벌써 일어나 납부하겠다는 자도 있었다.
다만 사단장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1사단장이 소리쳤다.
"도독!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 향신들을 사면하겠다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아니, 분명 제 말에 깜짝 놀라서 감명받았다고 했잖습니까!"
"놀랐다고는 했지. 네 말솜씨가 아니라 네 횡령 솜씨에."
"회, 횡령이라니요?"
이걸 또 해야 되네.
"리페이양."
손짓하자 리페이양이 회계장부를 들고 왔다.
"작년에 후베이성에 부임하여 훈련을 시키려고 보니 총알이 없더군. 덕분에 입으로 빵야빵야 소리를 내며 사격훈련을 했지. 그 많던 총알을 누가 다 먹었을까? 여기 답이 있다."
장부를 흔들자 사단장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후베이 신군의 한양 88식 소총은 7.92밀리 탄을 사용한다. 헌데 병공창에서 생산한 탄환이 호환이 맞지 않는다며 반환하고 다시 생산케끔 지시되었다. 재원 부족으로 생산은 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탄환이 부족해졌어. 그런데 여기서 그 잘못 생산했다는 탄환들은 어디로 간 걸까? 어디서도 폐기했다는 내용은 없다. 답은 뻔해. 총알은 만들어진 적도 없이 처음부터 모두 네놈들 뱃속에 들어간 거야."
"바, 반환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왜 너희들을 불러놓고 지금껏 떠들었다고 생각하나? 너희들에게도 자진 출자의 기회를 주마. 한양은행의 채권을 받아 가라."
삽시간에 자본금이 모였다.
내 뻥튀기가 통한 걸까, 꼭꼭 숨겨둔 비밀재산까지 죄다 갖다 바치는 향신 무리였다.
사단장 두 놈 역시 횡령금뿐만 아니라 향신들에게 뇌물로 받은 돈까지 털어놓았다.
향신들이 내게 굴복했으니 뇌물을 받은 것도 금방 들통나리라 여긴 모양인데.
음. 탁월한 선택이야.
"한양은행은 중국 최고의 은행으로 성장할 거다. 원리금을 돌려받지 못할 염려는 없으니 이제 집에 가서 두 발 뻗고 푹 자라."
사단장들과 향신들이 떠난 후 모은 돈을 셌다.
중화민국 화폐로 1,621만 위안.
여기에 일본의 파칭코 사업으로 꾸준히 벌어들인 자금 300만 위안을 추가하여, 총 1,921만 위안.
시작부터 이만한 투자를 받아 설립된 은행은 전 중국 어디에도 없을 거다.
일반적인 구식 전장의 규모가 아무리 커도 10만 위안을 못 넘기는 것을 생각하면 조그만 나라를 세울 만한 금액.
다소 짧은 상환기간에 1,600만 위안이 넘는 돈을 투자받은 것은 제법 위험부담이 있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1푼의 이자를 합쳐 3년안에 채권을 상환해 주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상공업을 억제하던 청조는 몰락했고 북양정부가 들어섰다.
드디어 중국의 금융업은 막 발아에 돌입하니.
지금부터는 닥쳐오는 호황기에 대비해야 한다.
저 먼 서유럽에서 벌어질 대전쟁.
그들에게는 재앙이지만 근대화의 후발주자들에게는 기회다.
열강들이 자기들끼리의 상잔에 정신 팔렸을 때 크게 도약하는 거다.
문제는 중국의 근대화가 생각보다도 더 처참하다는 건데.
예컨대 미국이나 일본이 잔뜩 꿀 빨았던 군수품과 같은 수출은 기대할 수 없다.
아니, 군수품뿐만 아니라 애초에 유럽 쪽으로 수출할 만한 상품을 몇 년 안에 만들어낼 역량이 없다.
대신 내가 노리는 것은 중국 시장이었다.
1914년의 세계대전에서 중국이 직격으로 받는 영향은 유럽에서 수입해 오던 공산품의 감소.
덕분에 방직이나 제분 등에서 소비재의 수요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상품 가격은 폭등한다. 그 시장을 노리는 거다.
굳이 저 먼 타역에 고생고생해가며 물건 팔아먹을 필요 있어?
바로 이 땅에 4억명이 있다.
이 시장만 잠식한다 하여도 JP모건 부럽지 않을 터.
그 첫 단추를 위한 한양은행.
지분은 100퍼센트 내게만 있다.
일부러 잔뜩 욕심쟁이가 되어 투자자들에게 주식은 주지 않고 오로지 채권으로만 퉁쳤다.
돈에는 눈도, 귀도, 입도 없으니.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 언제나 정직하게 내 편으로 있어 준다.
나는 중화민국 전체를 내 친구들로 빵빵 채워 넣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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