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개막2 (수정)
한양은행은 민간은행과 중앙은행 사이의 아주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분명 후베이성 도독인 내 주도로 설립된 은행이기는 하지만 그 자금은 100퍼센트 민간의 것.
8할 이상이 향신들의 투자가 바탕이었으며 그나마 내가 출자한 300만 위안도 개인 자산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단순한 민간은행이라기에는 후베이성 정부와 유착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처음부터 유착을 하려 만든 금융기관에 가까웠으니.
당장 후베이성 정부 소유긴 하지만 자금 문제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는 기업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기업들에 한양은행의 자금을 다이렉트로 연결하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특혜였으나.
뭐, 어쩔? 내가 도독이다.
"도독님, 가시죠."
부관 리페이양의 호위를 받으며 병사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도독부를 나섰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
우창에서 장강을 건너 한참을 내려가자 언덕으로 둘러싸인 공장지대가 보였다.
턱없이 넓은 부지와 높게 늘어선 굴뚝은 흡사 거대한 산업단지를 연상케 했으나.
중요한 굴뚝에서 연기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시뻘건 쇳물이 흘러야 할 용광로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편전쟁의 처참한 굴욕 이후 절치부심한 청나라는 망조에 들기 전 마지막 발악처럼 대대적인 근대화에 나섰다.
이름하여 양무운동.
한야평공사는 바로 그 양무운동의 상징이자 실패였다.
중공업부흥의 책임을 맡은 당시의 양무대신은 대뜸 큰 예산을 들여 한양에 대규모 근대식 제철소를 지었다.
그게 1894년이었으니 일본 최초의 근대식 제철소보다도 7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허나 부지선정과 원료의 수송, 원가계산, 이윤확보 등 경영에 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없이 무작정 지은 제철소가 어디 가동이나 제대로 되겠는가?
양무대신이 한양에 제철소를 지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닌 한양이 자신의 본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온 국가가 총력을 기울였던 양무운동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였다.
한야평공사는 끝없는 적자행진 속에 막대한 부채를 지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부지에 들어서자 공사 직원들이 모여서 귀뚜라미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생기 없는 눈을 하고 귀뚜라미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미리 연락한 대로 도독부에서 왔소. 대표이사와 약속이 있는데."
리페이양의 말에 직원들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도 없이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도독의 방문에도 다소 거만한 행동에 리페이양이 나서려 했으나 나는 가로막았다.
"됐어. 내가 직접 간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으니 저들은 그저 평소의 시찰이라 생각할 거야. 지금은 실컷 놀라고 해. 조금 있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예."
응접실에 도착하여 리페이양이 문을 열려는데 웬 뚱뚱한 사내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일반직원과는 차림새부터 다른 것이 제법 중요한 지위를 맡은 것처럼 보였다.
"누구요?"
"도독부에서 왔소."
"아, 오전에 온다던 관료들인가 보군. 뭐 이리 많이 왔소? 지금은 선객이 있으니 좀 기다려야 하오."
"선객? 누군지 물어봐도 되는지?"
"음···."
뚱보는 무슨 연유에선지 뜸을 들였다.
겨우 입을 열었으나 시원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뭐, 공장 운영에 관련된 사람이오."
"얼마나 기다려야 하오?"
"결정된 것이 없어 뭐라 말하기 어렵소."
리페이양이 떠드는 동안 나는 말없이 뚱보를 지나쳐 응접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어어? 뭐 하는 거요.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소!"
벌컥.
안쪽의 풍경은 요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털보 중년인이 있고.
그 앞에는 멀끔한 양복 차림의 신사들이 목덜미를 빳빳이 세우고 털보를 다그치고 있었다.
"결정하시오. 마지막 기회요. 다음번은 없을 터이니!"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뭘 더 생각한다는 거요! 이미 모든 계약이 도장이 찍혔소. 당신만 동의하면 끝나는 일인데 이리 질질 끌거요!"
내가 들어서자마자 양복쟁이들은 하던 말을 멈추고 내게 시선을 꽂았다.
털보는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여전히 고개 숙인 채였다.
코를 훌쩍이는 거. 저거, 우는 거 아니야?
"함부로 들어오면 어떡하오! 아무리 관리라 하여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것을."
따라 들어온 뚱보가 날 내보내려 했으나 리페이양이 바로 제지했다.
"법도라니, 무슨 법도를 말하는 거냐?"
"뭐, 법전에 무슨무슨 법이든 적혀있지 않겠소? 모르겠으면 댁의 도독에게나 물어보시구려. 흥, 민생은 내팽개치고 어디서 뭘 하는지."
"도독께 물으라고?"
"지난 십몇년간 한야평공사는 끔찍한 자금난에 시달려왔고 후베이성 정부에 수도 없이 차관을 요청하였으나 모조리 묵살당하였소.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민간에서 차관을 끌어다 어떻게든 공장을 살리려는 것인데, 그때마다 정부는 민족 운운하면서 차관 도입을 막아왔지. 오늘도 시찰을 핑계로 같은 짓을 반복하려는 것 아니오? 진작 당신들의 아편 빠는 돈으로 석탄을 공급해줬으면 한야평공사가 이 지경까지 몰렸겠소?"
급발진하는 뚱보의 말에 리페이양은 어리둥절해했으나.
나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양복쟁이들의 외모와 말투, 분위기에서 익숙한 도쿄의 냄새가 풍긴다.
저들은 일본인이다.
게다가 상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종이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자연스레 훑었다.
주식회사 미쓰이물산이라.
거기다 '일본한야평공동계약'?
눈대중으로 보아도 상당한 규모의 대출 계약이다.
제대로 생산량도 맞추지 못하는 제철소에 이만한 대출이라면 보나 마나 한야평공사의 상당량의 권리가 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가는 계약일터.
"헛, 뭐 하는 거요! 계약서를 함부로 훔쳐보다니, 당신 누구요!"
일본인이 급히 서류들을 가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볼 만큼 다 본 후였다.
"안녕하시오. 후베이성 경제국에서 나왔소."
악수를 위해 내민 내 손에 똥이라도 묻어있는 것처럼 째려보는 일본인.
"후베이성 경제국? 그런 부처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아마 그럴 거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
"언제 출범했길래?"
"어제."
"지금 장난하시오?"
미쓰이물산의 일본인이 역정을 냈으나 나는 상관치 않고 말을 이었다.
"대출액이 얼마요? 300만쯤 되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아마 담보 대출일 거고. 그만한 돈에 담보를 잡히려면 적어도 대야철광(大冶鐵鑛)쯤은 저당 잡혔겠지. 이자는 얼마를 타 먹을 계획이요? 5프로? 10프로?"
"닥치시오!"
그때 잠자코 있던 털보가 중얼거렸다.
"250만에 1년 상환···. 기한 내 갚지 못하면 한양제철소가 넘어가게 되오···."
"한양제철이 통째로? 250만에 제철소 전체는 너무 과한데."
"부채가 300만이 더 있소···."
"그래도 과하게 후려친 가격이요."
한야평공사는 한양제철소와 대야철광산, 평향탄광산(萍鄉炭鑛)을 모두 합친 기업.
그중에서도 최고의 알짜배기는 물론 한양제철소다.
550만에 삼킨다면 턱없이 남는 장사.
하지만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일본인이 참지 못하고 뚱보에게 따졌다.
"이보시오! 한야평공사의 앞날이 걸려있는 중대한 자리인데, 어찌 이처럼 허술하게 관리할 수 있소!"
"죄,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른 저자를 쫓아내시오."
"예."
뚱보가 내게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나는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 말했다.
"아까 도독이 어쩌고저쩌고하던데 불만이 많으시오?"
"됐고 얼른 나가기나 하슈."
"이번에 신임도독이 취임했다는데 이름은 아시는지?"
"뭐더라, 한신이었나?"
"그게 나요."
뚱보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뭔 말이요?"
"내가 한신이오."
"도독과 동명(同名)이오?"
"내가 바로 도독이란 얘기요."
"그, 그런···. 도독이 직접 행차하다니···. 가만있자, 어리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어릴 줄은···."
뚱보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나는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전에 당신의 얘기는 제법 인상 깊었소. 한야평공사를 살리려는 그 노력이 아주 눈물겹더군. 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렇게 공사를 살리려는 자가 담보로 한양제철소를 걸다니, 그것도 아주 헐값에."
"무, 무슨 말을 하는거요!"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대표이사 린훼이(林惠). 말하시오. 미쓰이물산의 이사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났소?"
"탐이 나다니! 나는 바란 적도 없소! 저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에 불과하오!"
"어쨌건 사외이사로 가기로는 되어있었나 보군."
일본놈들 계약서에서 언뜻 읽은 걸 바탕으로 찍었는데.
에효. 이놈들 하는 짓거리야 질리도록 본 뻔한 패턴이다.
아니, 누가 계약할 때 비리가 없으면 세상이 망한다고 협박이라도 했냐?
"대충 정리되었군. 리페이양, 저놈 체포해라. 특혜성 계약 비리 혐의다."
"예."
뚱보 린훼이가 사라지자 응접실이 조용해졌다.
미쓰이물산의 일본인이 중얼거렸다.
"후베이성 도독이라고···? 분명 좀 전에는 경제국 사람이라 했는데···."
"경제국 국장도 겸하고 있소. 말했듯이 어제 출범한 터라 아직 국장을 못 뽑았거든."
"도, 도독이라 하여도 진행 중인 계약에 멋대로 개입할 수는 없소. 이미 대표이사 한 사람의 인장이 찍혀있소이다."
"하지만 그자는 방금 옥으로 끌려갔는데."
"그렇다 하여도 미쓰이물산이 계약한 것은 그전의 일. 계약은 유효하오!"
나는 일본인이 억지부리는 꼴을 무심히 보다가 말했다.
"한야평공사의 대표이사는 두 명. 저기 앉은 리쯔위(李紫羽)의 인장이 찍힐 때까지 계약은 유효하다고 할 수 없지."
한야평공사의 또 한 명의 대표이사. 독일의 뮌헨공과대학에 유학까지 다녀온 고급 재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털보 리쯔위는 돌아가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 보였다.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리쯔위. 한야평공사의 설립초기구성원으로 지금껏 힘써온 것을 알고 있소. 미쓰이물산과 계약 진행 상황이 어떻소?"
털보는 망설이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대출액 250만 위안에 한양제철소를 담보로 하여 대출 기간 1년, 연이율 1할, 이자는 두 번에 나누어 지급합니다. 또한 기존의 부채 300만 위안에 대한 상환기간을 1년 연장해 주는 특약도 추가로 있습니다."
"미쓰이 물산 외의 부채는?"
"···그것도 아시는군요. 다른 일본 기업 세 개에 각각 80만과 120만, 250만의 부채가 더 있습니다···."
"그럼 부채를 합치면 총 750만 위안이군."
"네···."
생각보다 건실하게 운영했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부채가 1,000만을 넘기기라도 하면 아무리 자금력 빵빵한 한양은행이라도 부담이 되지만 이정도면 할만하다.
당초 투자를 생각하고 온 것이었느나 결심이 섰다.
단순한 대출 투자를 넘어 인수합병에 나서기로.
나는 한껏 화가 난 미쓰이물산의 일본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귀사는 이만 가보시오. 한야평공사는 이쪽에서 인수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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