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08)

근대화의 개막3

 "한야평공사를 인수한다고?"

 "그렇소."

 "무슨 수로?"

 "값만 지불하면 되는 것 아니오?"

 "돈은 있고?"

 "있으니까 나섰겠지."

 미쓰이물산의 일본인들이 내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쑥덕거렸다.

 일본어로 나누는 얘기가 다 들렸다.

 "전무님, 어떡하지요? 저놈이 인수에 나선다는데요."

 "흠. 걱정할 것은 없다. 지나놈들 수작쯤은 내 손바닥 안이야. 보나 마나 후베이성 경제국 이름으로 어음 따위를 발행할 생각이겠지."

 "후베이성 정부의 어음이라니 그깟 게 효력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그딴 걸 받아줄 리가 있느냐."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미쓰이물산의 전무가 내 쪽을 보고 말했다.

 "허허. 당신이 후베이성 도독이든 경제국장이든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요. 한야평공사의 부채 규모를 듣고도 인수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거요?"

 "귀사는 이만 가보란 이야기를 못 들었소? 오늘부로 한야평공사는 외국에서 차관 따위를 들여오는 일은 없을 터이니, 당신들의 볼일은 끝났소."

 "아직 안 끝났다면?"

 "뭐가 또 남았소?"

 전무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미쓰이물산은 지난 몇 년간 한야평공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우호를 다져왔소. 그 덕에 차관 계약 또한 큰 규모로 이루어진 것이오. 그러한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같은 외부인이 나타나 갑자기 계약을 파토내려 드는 건 월권이며 전횡이요!"

 "그 말은 내게 이렇게 들리는군. 오랫동안 작업 쳐놓은 먹잇감에 눈독 들이지 말고 꺼지라는 말로."

 "입이 험하오. 당신 정말 도독 맞소?"

 "후베이성에서 장사한다는 사람들이 도독 얼굴 정도는 알아두셔야지."

 "본사는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장사하니 그딴 데 쓸 여력 따윈 없소. 무엇보다 이걸 알아두시오. 이번 계약은 미쓰이물산이 한야평공사에 커다란 편의를 봐준 것이었소. 본사는 당장 300만 위안에 달하는 부채에 상환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공사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대출을 허락하였소. 이런 선한 기업이 어디 있단 말이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정말 선했다면 한양제철소를 담보로 잡지 않았겠지. 선의 따위로 거래하는 기업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최소 100년은 나타나지 않을 거요. 내가 안다고."

 "지방 정부의 월권을 본사는 참을 수 없소. 이건 최후통첩이요. 한야평공사를 인수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는 집어치우고 관료들을 이끌고 이 자리에서 나가시오."

 "안 나간다면?"

 "본사는 그간 한야평공사에 부여하던 특혜를 취소하고 지금 당장 부채 전액의 상환을 요구하겠소."

 손짓으로 리페이양을 불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린 리페이양이 봉투에서 수표를 건넸다.

 "얼마였지? 부채가 300만 위안이었나."

 나는 액수를 기재한 수표를 건넸다. 

 전무가 피식거렸다.

 "어음 따위는 안 받소. 지나에서 장사하면서 한두 번 속아봤어야지."

 "어음이 아니오. 수표요."

 "수표라고?"

 받아든 전무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였다.

 "한양은행?"

 "그 이름을 잘 기억하시오. 장차 투자를 크게 벌일 이름이니까."

 또다시 일본인들이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한양은행이라고? 이런 은행이 있느냐?"

 "있긴 합니다. 얼마 전에 문을 열었는데, 그렇다 해도 당장 300만의 거금을 융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요."

 "역시 그렇지? 저놈이 하는 말은 한 가지도 믿을 수 없다. 아마 경제국의 사람이라는 것만 사실일 터. 한야평공사가 미쓰이물산에 넘어간다는 정보를 듣고 급히 달려와 어떻게든 막아보려 발악하는 거겠지."

 작전회의를 마친 전무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당신은 기업 간 거래가 얼마나 위중한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소. 이 방에 들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장난질만 쳐대니. 도독의 신분으로 공수표를 발행할 수는 없을 거고. 정체가 뭐요? 솔직히 말하시오. 그저 헛소리를 하며 시간만 끄는 작전 따위는 통하지 않소."

 "궁금하면 바로 사람을 보내 확인하시오. 한양은행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오는 김에 신문도 한 통 사 와서 내 얼굴도 구경하고."

 전무는 한참 날 째려보다 막내에게 턱짓했다.

 미쓰이물산의 막내는 조심스레 수표를 들고 방을 나갔다.

 "저 친구 혼자 보내도 괜찮으려나? 300만 위안인데."

 "허허. 300만. 그따위 말은 믿지도 않소."

 "마음대로 하시구려. 하지만 알아두시오. 나는 한야평공사의 부채를 전액 지불했소."

 "글쎄, 그깟 수표는 못 믿는다니까 그러네."

 응접실이 적막에 잠겼다.

 수표 따위 믿지 않는다고 호기롭게 외쳤으나 전무의 입술은 정직하게 바짝바짝 말라갔다.

 마침내 견디지 못한 전무가 소리쳤다.

 "야! 너랑 너도 가!"

 "어딜요?"

 "어디겠냐! 한양은행이지!"

 "아, 예."

 "뛰어! 얼른!"

 후다닥 달려 나가는 부하들을 보며 전무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나는 빙글거렸다.

 "안 믿는다면서?"

 전무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미쓰이물산의 일본인 세 명.

 전무가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냐?"

 막내가 말없이 신문을 내밀었다.

 며칠 전 신문이었는데 헤드라인이 강렬했다.

 - 홍콩상하이은행 게 섰거라!

 - 한신 도독의 새로운 도전. 한양은행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후베이성 향신들의 눈물겨운 헌신.

 보기 드물게 민족자본으로 꽉꽉 채워진 한양은행의 자본금 분석.

 홍콩상하이은행과 같은 외국계 은행들이 잠식한 중국의 금융계에 한양은행이 희망이 될 수 있을지 전망하는 기사였다.

 기사 중앙의 선글라스를 낀 내 사진이 내가 보아도 위풍당당했다.

 전무가 사진과 내 쪽을 번갈아 힐끔거리다 인상을 찡그렸다.

 마지막 희망을 담은 목소리로 막내에게 묻는 전무.

 "수표는 가짜지?"

 "진짭니다. 부피 상 가져오진 못하고 한양은행에 안치해 놓았습니다."

 "진짜? 진짜라고? 300만을 그 자리에서 턱 내놓았다는 거냐?"

 "예."

 나는 가만히 듣고 있다 유창한 일본어로 그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이로써 한야평공사와 미쓰이물산은 어떠한 이해관계도 얽혀있지 않은 완전한 남남이 되었소. 이제는 정말 가보시오."

 미쓰이물산의 전무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성난 눈으로 쏘아보다가 발길을 돌려 사라지는 것밖에는 할 게 없는 그였다.

 일본인들이 떠나자 비로소 응접실이 한산해졌다.

 한야평공사의 대표이사, 털보 리쯔위는 외모와 다르게 눈에 물기가 많은 자였다.

 아까 훌쩍였던 건 참은 거라는 듯 하염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됐소. 일어나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뭘 믿고 감사하다는 거요? 지금부터 내가 뭘 할지 알고?"

 털보는 놀랐는지 눈을 껌벅거리다 의자에 앉았다.

 "지금껏 놀아서 편했겠소?"

 "예···?"

 "이 근방은 지천에 널린 것이 철광산에 석탄의 조달 또한 평향탄광산과 독점계약을 맺어 해결한 것으로 아오. 헌데 내가 후베이성에 부임해 지낸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한양제철소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꼴을 못 보았소."

 "그, 그것은 사정이···."

 "지난 사정은 알 바 아니요. 이제 쉴 시간 따위는 없소. 지금부터 한야평공사는 한양은행의 감독 하에 경영될 것이니 개같이 구를 준비나 하시오."

 털보는 입을 헤 벌리고 있다 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소인 개같이 일하겠습니다! 용광로에 쇳물이 가득 찬 모습이야말로 소인이 꿈에 그리던 광경인데요."

 "소인 같은 쓸데없는 경어는 집어치우고 당장 내일부터 석탄이 들어올 것이니, 지금 즉시 공장 가동 준비에 들어가시오."

 "네!"

 세상에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대부분은 맞다.

 수년 간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막혀있던 한야평공사의 배수관에 1,000만 위안을 호가하는 뚫어뻥을 쑤셔 넣었다.

 그 결과는?

 1,000만 위안께서 가라사대 뚫으라 하시니.

 뻥~!

 미쓰이물산을 제외한 다른 일본기업들과의 부채문제도 해결되고.

 한양제철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대신 금속을 가공하는 둔탁한 소음이 공장을 가득 채웠다.

 경제성이 없어 운영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하소연은 규모의 경제로 찍어 눌렀다.

 한야평공사에서 생산되는 철은 즉시 한양병공창으로 흘러 들어갔다.

 본격적인 중공업의 중흥이라기에는 많이 부족하였으나 가열차게 돌아가는 공장들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근대화의 궤도에 올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한양은행의 남은 자본금은 교통과 운수, 방직공사와 같은 광범위한 분야에 투자되었다. 

 유망한 기업이 있으면 신용대출을 해주고.

 한야평공사와 같은 부실기업은 인수합병에 들어갔다.

 수요는 예측되는데 공급이 없는 분야에는 내가 직접 나서서 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예컨대 물류와 보험 등의 분야가 그러하였으니.

 상품을 잔뜩 생산해내면 당연히 내다 팔기 위해서 물류산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보험업의 성장또한 자연스러웠다.

 지역 언론사는 처음엔 반신반의했으나, 여론이 점차 반전하여 내 작업에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기사가 뽑혀 나왔다.

 주제는 언제나 후베이성의 발전이었다.

 - 천릿길은 옛말, 이제는 물류회사 장강통상(長江通商)이 있다!

 - 찢어져도, 부서져도, 잃어버려도 걱정하지마세요. 장강보험(長江保險)에 맡기세요!

 신문에서 알아서 광고를 해주니 이 얼마나 좋은가.

 교육방면에도 신경을 썼다.

 - 신설 한양공업학교(漢陽工業學校)의 입학생, 졸업 즉시 한양병공창과 채용계약 맺는다.

 - 후베이무비학당(湖北武備學堂)에 10만 위안 규모의 교육 교보재 지급키로.

 내가 도독으로 취임한 것인지, CEO로 온 것인지 헷갈릴 때 즈음.

 베이징의 리위안훙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한신, 잘 지내는가? 신문을 통해 자네의 활약상은 잘 듣고 있네. 여기 자금성에서 후베이의 지방지를 구독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자금성은 삭막한 곳일세. 나는 여기서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아. 날 진심으로 상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때로는 그날을 떠올리곤 해. 우창에서 우리가 처음 일어섰던 날 말일세. 당시의 나는 돼지꼬리를 단 붉은돼지에 불과했으나 자네와의 만남 이후 새 사람으로 발 돋음 했지. 이후로도 잡음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부총통 자리까지 올랐고. 하지만 이제와 느끼는 것은 직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세. 자네가 가진 것과 같은 능력이 중요하지. 이번에 대외적으로 자네를 부르는 형식은 후베이성 근대화의 성과를 듣기 위한 초청이지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와야 될 거야.

 문제는 내각 회의일세. 나는 직접 총탄과 포화에 부대껴봤지. 그러나 이곳은 또 다르네. 총성없는 전쟁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어. 사법부장 쑹자오런은 일에 미친 놈이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네만, 나는 알 수 있네. 평생을 내 보신에 신경쓰며 살아왔거든. 자금성에서 우리 우한파는 궁지에 몰려 있다네. 자네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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