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정치
몇 달 만에 돌아온 베이징 시내는 활기가 넘쳤다.
변발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장포 대신 서양식 양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자금성 가까운 객관에 짐을 풀자마자 쿵쿵거리며 누군가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자는 부쩍 수척해진 리위안훙.
"한신!"
"살이 왜 이렇게 빠졌습니까."
"술친구가 없어서 그래."
볼이 파여 광대가 생긴 리위안훙이 내 두손을 잡고 흔들었다.
"잘 왔네, 잘 왔어!"
"일정이 끝나면 바로 내려가야 됩니다. 정무가 바쁘거든요."
"쳇. 얼마나 있을 건데."
"최대 일주일이요."
"내려가기 전에 자네가 해결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뭡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위안훙이 창밖의 중난하이 정원을 가리켰다.
"저기 집무실에서 3일째 나오지 않고 있는 일벌레를 끌어내야 돼. 이대로면 죽고 말 거야!"
"쑹자오런이요?"
"아니. 그깟 놈 어떻게 되든 알바인가. 너와 나, 우리 우한파가 죽고 말 거라고!"
"차근차근 얘기를 해보시죠."
리위안훙에게 자리를 권했다.
다리를 쭉 펴고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쑹가 놈이 제정한다고 설치는 임시약법(臨時約法)은 아는가?"
"알죠."
약법은 한나라 유방의 고사에서 유래한 용어.
진나라를 점령한 유방은 진 왕조의 가혹했던 법령을 폐지하고 세 가지 임시 시행령만을 남겨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 칭했다.
쑹자오런의 임시약법 역시 일종의 예비헌법이었다.
수천 년간의 왕조시대를 끝내고 이제 막 일어선 중화민국의 기틀을 잡기 위해, 정식헌법 제정 전 헌법의 역할을 하게끔 고안된 것이었다.
거의 구안이 끝나 공포만을 남겨두었다고 아는데.
"하···. 내가 법은 잘 모른다만 그래도 얼마간 살펴보았지. 나 같은 군인이 보기에도 과해. 너무 과해! 총만 쏘는 게 전쟁인가? 대놓고 그런 약법을 제정하는 것도 전쟁이야!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그 정돕니까? 그 친구가 욕심이 많긴한데."
"정치판에서 지난 20년간 보신해올 수 있었던 내 비결은 분수를 아는 거야. 과하게 큰 과실을 한 번에 삼키려 들었다간 목이 막혀 죽을 수 있는 걸 왜 모르나. 게다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닐세."
리위안훙은 부쩍 피곤해 보였다.
우창과 한커우의 전선에서는 오히려 살이 피둥피둥 올랐었는데.
"몇 달 있으면 전국 총선거가 열려."
"오···. 벌써 시간이."
"지금 베이징 정치판에 폭풍이 부는 것도 그래서야. 누가 어떤 정당을 창당하고 누굴 영입할 것인지 눈치 싸움에 심신이 피폐할 지경이야. 내게도 하루가 멀다고 인사 오는 놈들이 한 바가지라고."
"각하를 모시고 싶은 사람이 많은가 보죠."
"생전 듣도보도 못한 놈들인데. 무슨 예전에 장사를 하며 내 고향 황베이(黃陂)를 지나쳤었다느니, 톈진학당에서 공부해볼까 고민했었다느니, 되도 않는 구실을 대며 내게 접근한단 말일세.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게 있어야 영입하든가 하지, 그딴 턱도없는 소리로 우리당에 들어오겠다고? 내가 그리 만만해 보이나?"
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하려다 참았다.
대신 간단히 말해주었다.
"제가 알아보지요."
리위안훙은 그 대답으로 안심한 것처럼 보였다.
***
중난하이의 섭정왕부(攝政王府).
한때는 궁전이었으나 지금은 중화민국의 내각회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집무실 앞의 명패.
「사법부장관 쑹자오런」
노크 없이 열고 들어갔다.
그다지 넓지 않은 방은 온통 서류 더미로 꽉 차 있었다.
어디 곰팡이가 폈는지 매캐한 냄새에 코를 절로 킁킁거리게 됐다.
"장관님."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시야를 가린 서류 더미를 헤치고 전진하자 미친 사람처럼 무언가를 휘갈기는 쑹자오런이 보였다.
연필 꼬다리가 잔상을 남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장관님."
"지금은 바쁩니다. 나중에 오세요."
"한신입니다."
"한신 도독?"
종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쑹자오런이 벌떡 일어났다.
"오! 그렇지 않아도 서신을 보내려 했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요."
쑹자오런은 얼마나 깎지 않았는지, 얼기설기 뒤엉킨 수염에 눈알이 퀭했다.
그런데도 눈빛은 광기에 번뜩이고 입가는 헤실헤실거리는게 일 중독자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습니까?"
"약법의 공포가 코앞이니 시기에 맞춰 국무원 관제(官制)에 부칙(附則)을 달 것이 있어서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도독님도 건의할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언제든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일단···, 큰일을 많이 벌렸던데요?"
"제가요?"
"예."
"무슨 큰일이요?"
언제부터 쑹자오런이 이리 해맑았던가.
마치 잠깐 나갔다 온 사이 집안을 엉망진창 만들어놓은 어린애가 천진난만하게 되묻는 꼴이지 않은가.
"사법부의 임시약법 성안(成案)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려라니? 기대를 잘못 말한 것 아닙니까?"
"기대도 있지만 우려도 심상치 않아요."
언뜻 책상 옆에 빼곡한 글씨 쪼가리가 보였다.
맨 위에는 당당한 필체로 '중화민국 임시약법'이라 적혀있었다.
"저게 성안입니까?"
"그렇습니다. 제 혼을 갈아 넣은 필생의 역작입니다."
말끝마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감정이 전해져왔다.
약법은 총 7장 57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볍게 훑었다.
「 약법 제1장 제1조. 중화민국의 주권은 모든 국민에게 있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것을 시작으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한 내각책임제를 정부 형태로 삼고.
대총통과 장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등 쑹자오런의 사상이 녹아들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오히려 지방관의 권한은 강화하였다는 것.
쑹자오런의 정치 기반은 어디까지나 후베이성 정부.
그래서인지 중앙집권보다는 지방분권 정치를 강조하는 약법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 조항이 있었으니.
의회의 권한을 설정한 3조였다.
총리가 내각회의를 주재하며 내정의 최고 권력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의회의 불신임으로 내각을 총사퇴시킬 수 있으며 대총통의 명령 또한 총리의 동의를 받아야만 통과되었다.
대놓고 식물 대총통을 만드는 법이다.
아니, 괴물 총리를 만드는 법이라고 해야되나?
가만히 앉아서 팔다리가 잘릴 위안스카이가 아니다.
임시약법 선포는 전쟁 선포나 다름없다는 리위안훙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이걸 공포하겠다고요?"
"어···. 예. 무슨 문제라도?"
위안스카이와는 언젠가 승부를 봐야 하겠지만.
지금 시비를 거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위안스카이를 지나치게 궁지에 몰면 또다시 전쟁이 터질 거다.
북양3걸이 이끄는 6진. 6개 사단은 여전히 건재하며.
내가 후베이성에서 힘을 키우는 동안 그들도 놀고 있던 것이 아닌 만큼 지금 시점에 전쟁은 피해야 한다.
베이징에 리위안훙이나 쑹자오런과 같은 인물을 힘들게 꽂아 넣은 이유가 뭔가.
전쟁 같은 골치 아픈 짓거리 집어치우고 사바사바 뒷공작으로 과실을 삼키려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이건 되려 전쟁을 일으키는 꼴이다.
"훌륭한 법안입니다. 이대로면 민주공화국의 첫걸음을 뗄 수 있겠어요."
"하하! 역시 그렇지요?"
"다만 몇군데는 수정 하는 게 어떨지."
"어디요?"
"의회와 행정부 간의 우열을 규정한 3조를 손봤으면 합니다."
쑹자오런이 꺼림칙한 얼굴로 법안을 훑었다.
이제 이 정치 과몰입 환자를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하는데.
"그러지요. 저도 마음에 계속 걸리더군요."
의외로 시원한 대답이 나왔다.
"그럼 괜찮습니까? 총리가 내각회의를 주재하는 권한을 축소하고, 의회의 내각불신임에 맞서 행정부에도 의회 해산 권한을 명시하지요. 이럼 어느 정도 균형이 맞을 겁니다."
"의회 해산이라."
"약법의 기본적인 골자는 의원내각제. 다만 행정부에 최소한의 방어 수단을 쥐여준 겁니다. 이 정도 조항만으로도 어느 정도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테니까요."
"훨씬 낫군요."
왜 이리 고분고분하지?
쑹자오런이 이리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심혈을 기울여 궁리한 법안에 함부로 덧칠했습니다."
"아닙니다. 실은 그 부분은 제가 쓴 부분이 아니라."
"그럼 누가 썼는데요?"
"사법부에 기타가 특수 법률 자문으로 있습니다. 그 친구가 고안한 부분이지요."
또 너냐. 기타 잇키.
일본에서 혁명이 어려우니까 중국에서 대리만족 하는 건가.
기타 잇키에게 법안을 맡겼으면 턱없이 폭주했을 터인데.
이쯤 되니 오히려 기타를 이 정도로 제어한 쑹자오런이 대단해 보인다.
약법 문제가 일단락되었으니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총선이 열릴 예정이라면서요?"
"아하! 맞습니다."
"정당도 많이 조직되었겠습니다. 주요 정당이 있습니까?"
"사실 난립하는 당들은 많습니다만 크게 4개를 꼽을 수 있겠군요. 우리 부총통 각하가 대표로 있는 공화당. 그리고 쑨원 선생이 대표로 있는 국민당. 량치차오의 민주당, 왕스전(王士珍)의 통일당이 그것입니다."
공화당, 국민당, 민주당, 통일당.
"세는 어디가 강합니까?"
"선거 날 투표함을 개봉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공화당과 국민당이 여당 자리를 놓고 다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놓고 쑨원 선생님의 난징파와 다투게 되었군요."
"동맹회는 이미 1년 전에 분열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수가 없어요. 공화당이 선거에서 이겨 의회를 장악해야지요."
분열. 분열.
쑨원과는 함께 갈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나치게 반목할 필요까진 없다.
선결하는 적은 어디까지나 위안스카이의 북양 정부.
그러나 우습게도 북양 정부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의회를 구성하는데 그 다수당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다고 져줄 순 없지.
"선거 계획은 있습니까?"
"약법을 공포하고 나면 바로 전국에 유세를 돌 겁니다."
"그것 말고는요?"
"국민들의 가슴을 절절 울릴 수 있는 연설을 준비해야지요!"
음.
물론 투표는 국민들이 하는 거긴 한데.
이번 선거는 어째 돈다발이 투표할 것 같은 예감. 아니지, 확신!
정직하게 경쟁하려다간 낭패를 볼 거다.
"다른 정당들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동태요? 정확히 어떤 걸 묻는 건지?"
"아닙니다."
몇 날 며칠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쑹자오런에게 뭘 묻고 있나.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
선거는 정치의 꽃.
정치질하면 동맹이다.
국민당을 적수로 둔다면 동맹을 맺을 만한 정당은 2개.
입헌파의 수장인 량치차오의 민주당과.
북양3걸 중 한명인 왕스전의 통일당이다.
역시 만만한 쪽은 일면식이 있는 량치차오쪽.
사법부에서 나온 나는 외교부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려 했으나 이미 활짝 열려있었다.
똑똑 치는데 안쪽에서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발걸음을 옮기자 집무실에 앉아있는 량치차오가 보였다.
그 앞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사내가 서 있었다.
"선객이 계셨군요. 기다리겠습니다."
"전략의 천재 아니신가!"
량치차오가 냉큼 뛰쳐나와 내가 어디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잡아끌었다.
"귀한 손님이 동시에 두 분이나 오시다니. 오늘 겹경사가 났소이다."
량치차오에게 끌려가는 도중 먼저 온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살짝 눈인사했다.
가벼운 몸짓에도 기품이 배어있었다.
"참, 먼저 서로 인사부터 나누시오."
엉겁결에 사내 앞에 서게 된 나는 작게 읍했다.
"안녕하십니까. 후베이성 도독으로 재직 중인 한신입니다."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읍했다.
좀 전에 들었던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윈난성 도독으로 재직 중인 차이어라고 합니다. 인연이 있으면 언제고 뵐 거라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날에 기회가 오니 역시 대천명(待天命)이 틀리지 않은 듯합니다."
차이어(蔡鍔).
원역사에서 위안스카이를 패퇴시킨 영웅.
군신(軍神)이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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