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정치2
"한 도독님이 우창에서 피워올린 혁명의 봉화는 남방의 모든 뜻있는 지사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도한 건 아닙니다. 부총통 각하께서 혁명군을 영도한 거지요."
"회음후 한신을 연상케 했던 배수진과 한커우 평원에서 펑궈장의 북양군을 석 달 동안 묶어놓은 행보는 또 어땠습니까. 저는 윈난성의 도독이기 전에 한 명의 군사 전략가이니, 한 도독님의 전투를 두고두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과찬입니다. 저 역시 육사 시절부터 차이 도독님을 모범으로 삼고 학업에 정진하여 이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낯간지러운 인사가 오고 갔다.
"베이징에는 정부의 초청을 받아 오신 겁니까?"
"예. 후베이성 근대화의 성과를 보고하라더군요."
"저도 윈난성의 성과를 보고하라는 명을 듣고 올라왔습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곧 마주칠 운명이었군요."
차이어의 윈난성은 수백만냥에 이르던 청 왕조 시절의 적자를 1년 만에 청산하고 흑자로 전환했다.
서쪽 후미진 곳에 위치하여 중국 전역에서 가장 가난했던 지역인 윈난성은 차이어의 지휘 아래 변신하고 있었다.
차이어가 량치차오 쪽을 힐끗 보며 다시 말했다.
"실은 한 도독님이 오기 전부터 우리는 도독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 얘기요?"
"예. 염치없지만 량 선생님께 부탁드려 도독님의 사관생도 시절도 캐물었지요."
"장관님이 아는 제 사관생도 시절은 별거 없을 텐데요."
"아니요. 얘기할 거리가 끝이 나지 않더군요. 특히 그 워게임이라는 것 말입니다.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차이어가 눈을 반짝였다.
스스로를 군사 전략가로 칭하는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실제로 그가 편찬한 군국민편(軍國民篇)과 증호치병어록(曾胡治兵語錄)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군사학 개론서다.
"제가 사료를 수집하여 찾아본 뤼순 공방전은 결코 러시아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도독님의 지휘 아래 러시아가 승리를 거두었으니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머리로 쉬이 들어오지 않더군요."
"기물로 하는 장난질을 어찌 실제 전쟁에 비견하겠습니까. 그때 이겼던 건 워게임의 시스템적 허점을 악용한 덕이었습니다."
"아니요. 단순히 그리 폄하될 전훈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한커우 전투를 워게임으로 도식화하여 교본으로 삼으면 향후 중국군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가늠하고 있습니다."
"한커우 전투는 전훈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땅굴에 숨어 버티기만 했는데요."
"그게 대단한 거지요. 병력의 질과 양, 보급과 군기가 모두 차이 나는 싸움에서 버텨냈다는 것 말입니다."
더 있다가는 헐어버릴 것 같아 량치차오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량치차오는 차이어와 내가 대화 나누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일본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하고 많은 인재를 만나보았으나 그중 두 분이 최고셨소. 중국의 미래가 풍전등화처럼 어지러운 이때 두 분이 자주 교류하며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오."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언제부터 제게 존칭을 쓰셨다고···."
"어허. 일개 각료(閣僚)따위가 어찌 한 개 성을 총괄하는 지방관님께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소."
차이어에게 면박을 준 량치차오가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손님으로 오셨으면 용건이 있을 터인데 너무 우리 얘기만 했구려. 그래서, 어쩐 일로 외교부를 찾아주셨소?"
어쩐 일이냐면···.
다가오는 총선거를 위해 비열한 협잡질을 하려고 온 거긴 한데.
차이어가 있으니 묘하게 신경 쓰였다.
저런 대쪽 같은 선비 스타일은 자꾸 나를 돌아보게 만든단 말이지.
그렇게 바로 앞에서 내 칭찬을 해댔는데 대뜸 수작을 부리자니 입이 안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다소 멀더라도 빙 둘러 가기로 했다.
"입헌파의 향후 목표는 무엇입니까?"
내 말이 뜬금없었는지 량치차오가 멈칫했다 말했다.
"물론 중화민국의 무궁한 발전이오."
"입헌군주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요?"
"물론 그것도 포함되오."
"아니지요. 입헌파의 목표가 입헌군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량치차오가 되물었다.
차이어또한 의아한 표정이었다.
"입헌파가 입헌을 주장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존재하던 전제정에서였습니다.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가 국사(國事)를 전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입헌파는 황제 위에 있는 헌법의 입안을 주장했었지요."
"그렇소."
"황제를 그대로 두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함. 입헌파는 최대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청조와 반목하지 않고 동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입헌군주제였던 겁니다."
"정확하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는지 량치차오의 낯빛이 바뀌었다.
"작년의 혁명 이후 청조는 하루아침에 영락했고 전 중국이 혁명의 열기에 들끓고 있습니다. 장관님은 돌다리를 만든 후에 강을 건널 셈이었지만 성질 급한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헤엄쳐 이미 건너편에 가 닿았습니다."
"내가 보기엔 아직 허우적거리고 있소."
"그래도 생각 외로 수영 솜씨가 썩 나쁘지 않다는 건 장관님도 동의하실 겁니다."
"그건 그렇소."
량치차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입헌파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헌법 역시 혁명파에서 입안 중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의 입헌파는 모호한 목표를 두고 표류하는 꼴이 아닙니까."
"무릇 입헌파에 쓴소리하는 이유가 있을 터인데, 인제 그만 알려주지 않겠소?"
"알려드린다기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입헌파의 목표는 중국의 평화와 안정이 되어야 합니다."
"흠. 맞는 말이긴 한데 다소 뻔한 이야기군."
"아니요. 그 평화와 안정을 위해 넘어야 할 명명백백하게 정해진 경주로와 장애물이 있습니다. 입헌파의 목표는 그 장애물을 돌파하고 경주로를 완주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량치차오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차이어였다.
"지금 한 도독님은 천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생님."
"천하?"
"예. 천하입니다. 중화민국은 개국했으나 아직 천하의 길은 요원하지요. 혁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북양 정부가 개막했는데."
"그 '북양' 정부가 문제지요. 어째서 중화민국의 정부가 북양 정부로 불린단 말입니까. 제가 있는 윈난성만 해도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가···."
침음하는 량치차오 대신 차이어가 내게 물었다.
"말씀하시는 바를 알겠습니다. 입헌파의 목표는 평화와 안정. 그 목표를 위해 정국의 불안을 어찌 타파할 건지 묻는 거군요."
"맞습니다."
"지금 제게 물으신다면 솔직하게 답하겠습니다. 저는 북양 정부를 지지합니다."
앗. 왜?
"하지만 방금 북양 정부의 여론이 좋지 않다고···."
"여론은 바뀌어 갈 겁니다. 이제 막 수립한 정부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해서 섣불리 반기를 든다면 어느 국가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정부에 힘을 보태야 할 시점입니다."
확실히 성향이 보인다.
개혁과 안정을 저울질하면 항상 안정 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자다.
하지만 이래도?
"북양 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헌법을 수호하며 중화민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때의 얘기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그 조건이 바뀌었을 때는 어쩌시겠습니까? 북양 정부가 청조와 똑같이 폭정을 일삼는다면?"
"그땐···. 도리가 없지요. 다시 봉기입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량치차오와 차이어를 번갈아 보았다.
드디어 본론.
"중국은 오랫동안 황제 일인의 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해혁명 이후 하루아침에 공화정으로 변모했지요. 하지만 호사가들이 예측했던 것처럼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은 오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빠르게 적응하였고 그저 어제와 똑같이 자기 삶을 영위할 뿐입니다."
량치차오와 차이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중국 시민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장관님일지 모릅니다. 그저 황제의 치세 아래 우민(愚民)인줄로만 알았던 그들의 손으로 혁명은 이루어졌습니다. 지식인들이 점진적인 개혁 운운하는 동안에 시민들은 벌써 이루고자 하는 성과를 초과 달성해버린 겁니다. 오늘날 거리에 황제를 찾는 이는 없습니다. 도리어 다가오는 총선거의 열기에 전국이 들썩이고 있지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권력자 일인의 지도아래 유지되는 국가는 언제나 위협이 잠재합니다. 중국의 그 긴 역사 동안 수많은 폭군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북양 정부 역시 공화정을 표방하고는 있으나 강력한 대총통제가 유지된다면 청조와 다를 바 없게 될 겁니다."
"위안스카이는 꽤 합리적인 인물로 보였소만."
역시 위안스카이의 연기력은 알아주어야 한다.
쑨원에 이어 량치차오까지 깜박 속아 넘어간 듯.
"사람은 변합니다. 바뀌고요."
"원래 다 그런 것 아니요?"
"제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지금 사법부에서 입안하는 약법의 골자는 의원내각제입니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지방정부의 의사를 반영한 의회 중심으로 정치를 꾸려나갈 겁니다."
량치차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알겠군. 선거에서 공화당을 지지해달라는 말을 어렵게 하셨소."
량치차오가 고심하는 듯 턱을 매만지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입헌파에도 정당이 있소. 지금껏 민주당에 봉사해온 구성원들이 있는데 무턱대고 지지 정당을 바꿀 수는 없소."
"지지 정당을 바꾸라는 게 아닙니다. 연립정부를 제안드리는 겁니다."
"연정을?"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던 중국의 평화와 안정을 생각하십시오. 일인 통치의 시대는 저물었습니다. 이제는 향후 중국의 중심을 잡아나갈 시스템을 제대로 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수의 몇 명이 일으키는 폭정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견고한 체제를 세워야 합니다."
량치차오는 차이어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의논해보겠소."
***
「전국 우수 지방관 초청 성과설명회」
대총통 위안스카이를 비롯하여 내각 각료들이 즐비한 가운데 30분을 떠들어야 한다.
이미 차례를 마친 차이어가 씨익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에···. 그래서 한야평공사의 채무를 청산하고···."
"잠깐!"
"예, 각하. 말씀하십시오."
"그 한양은행이라는 곳은 무슨 자본금이 그리 많은 건가?"
"후베이성의 향신들이 투자를 많이 해서 그렇습니다."
위안스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방의 토호는 그리 마음 씀씀이가 넓은 족속이 아닐 터인데."
"제가 만난 분들은 다르더군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중화민국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지출을 감내한다고들 말씀하셨습니다. 그 마음이 감사해서 지방정부 차원에서 훈장이라도 달아드리려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럴 리가. 그렇게 애국심이 투철하면 중앙 정부에도 좀 기부할 것이지."
"근래에는 좀 어렵겠습니다. 그만큼 한양은행에 투자금이 컸습니다. 한양은행의 성공은 후베이성 향신들의 애향심이 바탕이 된 것이니 베이징에 가까운 즈리성의 향신들과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떻습니까."
"그게 말처럼 되야."
위안스카이가 즈리성 도독 펑궈장에게 호통쳤다.
"이봐! 펑궈장! 후베이성에는 저렇듯 애국지사가 즐비한데 즈리성은 어떻게 된 건가!"
"···노력하겠습니다."
"젠장. 머릿속엔 탈세할 생각밖에 없는 양아치 놈들 같으니라고. 정부에 보탬에 될 생각은 않고 자기 보신에만 몰두하는 향신 새끼들."
몇 달 만에 본 위안스카이는 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태화전에서 보았던 조심스러운 행동거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곳의 대장은 나라는 거만한 분위기가 온몸에 흘러넘쳤다.
무사히 성과 보고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온 후,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리위안훙은 연신 내 등을 두드리며 술을 마셔댔다.
"이제야 술이 들어가는군. 자네가 있으니 마음이 편해, 편하다고. 이 마음을 아나?"
집무실에 처박혀있는 쑹자오런은 만찬에 나올 리 없고.
차이어 또한 간간이 눈을 마주칠 뿐 내게 다가와 어울리진 않았다.
그 덕에 연회장은 전부 모르는 자들뿐, 이 아니라.
내적친밀감을 느끼는 자가 한 명 있기는 하다.
석상(席上)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기차게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의 주인공.
즈리성의 도독이자 한때 진압군의 대장으로 한커우 전투에서 맞붙었던, 장군 펑궈장.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다.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지만 전선을 맞대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아는 사이인 느낌이 들었다.
물론 저쪽에서는 날 죽이고 싶겠지만.
어차피 아는 척할 일도 없을 테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뚜벅뚜벅.
펑궈장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후베이성 한신 도독? 할 말이 있소."
"하시오."
"여기선 그러니, 따라오시오. 아는 곳이 있소."
긴장되는데 이거.
어째 사관생도 시절이 생각난다.
옥상으로 따라와! 하고 다구리 처맞는 거 아냐?
펑궈장을 따라간 방은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였다.
문 뒤에 어깨라도 한명 숨어있나 목을 움츠렸으나 아무도 없었다.
탁자를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았다.
펑궈장은 말없이 탁자 밑에서 서류 가방을 끄집어 올렸다.
딸깍.
가방이 열릴 때까지도 권총이 들어있으면 빠르게 뺏어 조준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안에는 10위안짜리 지폐가 다발로 묶여있었다. 펑궈장이 입을 열었다.
"북양파로 들어오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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